3. 로야령을 넘어적구활동을 마치고 유격근거지로 돌아온 우리는 또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왕청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북만에서 활동하고있던 주보중이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여 방조를 요청해왔던것이다.나는 그 요청을 매우 심중하게 받아들이였다. 주보중은 반일병사위원회시절부터 나와 깊은 련계를 가지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싸워온 친근한 전우였다. 라자구전투를 계기로 나와 주보중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나이도 나보다는 10살이나 우였다. 나는 주보중의 요청에 응하는것을 신성한 국제주의적의무로 여기고 북만원정준비를 다그치였다.1934…
3. 동녕현성전투라자구담판후 반일부대련합판사처는 구국군과의 사업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판사처일군들은 린접의 산림대들에도 침투하여 그들을 반일련합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공작을 하였다.이 기구의 도움으로 우리는 1933년 9월초 라자구부근의 로모저하라는곳에서 오의성, 사충항,채세영,리삼협을 비롯한 반일부대의 지휘관들과 함께 동녕현성(삼차구)전투방안을 토의하기 위한 련합회의를 열고 작전방침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회의에서는 오의성사령의 제의에 따라 우리가 작성한 작전계획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였다.우리가 라자구담판후 동녕현성을 …
3. 쏘베트냐, 인민혁명정부냐?유격구에서 좌경바람이 제일 우심하게 나타난것은 정권건설분야였다.정권건설에서의 좌경적편향은 교조주의, 사대주의, 모험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의 소부르죠아적조급성의 산물이라고 할수 있는 쏘베트건설로선과 쏘베트의 명의로 실시된 일부 시책들에서 집중적으로 발로되였다.정권건설과 관련된 문제는 벌써 《ㅌ.ㄷ》시절부터 우리의 론의에 올라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중요한 화제거리가 되였다. 정권문제는 조선청년들에게 있어서 독립후에 상정해도 될 장래의것이고 또 국권수복이 이루어지는 조건에서만 그 건설에 착수할수 있는 …
3. 기쁨과 슬픔반일인민유격대의 남만진출과 때를 같이하여 우사령부대에서도 200명으로 편성된 구분대를 통화지방으로 파견하였다. 이 구분대의 인솔자는 류본초선생이였다. 우사령이 자기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류본초참모장을 남만으로 보낸 목적은 당취오자위군과의 합작을 실현하며 자위군을 통하여 무장을 해결하려는데 있었다. 그 당시 우사령은 무기의 부족때문에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료녕성에 본거지를 둔 남만지방의 자위군은 우사령의 구국군부대보다 좋은 무기를 많이 가지고있었다.우리가 원정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소사하에 찾아온 류본초선생은 자기…
3. 무장에는 무장으로9.18사변으로 하여 우리에게는 항일전쟁을 시급히 개시해야 할 절박한 과업이 나서게 되였다. 새로운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부정의의 포성에 정의의 포성으로 대답할 절호의 기회가 닥쳐온것이다.일제가 만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가들은 모두 지하에서 나와 자기 진지를 차지하였다. 대륙을 뒤흔드는 포성에 만주지방사람들이 그해 가을 단단히 정신이 들었다고 할수 있다. 그 포성은 사람들을 위축시킨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성시키고 분발시키였다. 적의 폭압으로 초토화되였던 만주지대에는 또다시 새로운 투쟁기운이 태동하였다.…
7. 1930년 여름엠엘파계렬의 종파분자들은 5.30폭동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을 대신 1930년 8월 1일 국제반전일을 전후하여 길돈철도연선지방을 중심으로 또다시 무모한 폭동을 일으켰다.폭동으로 하여 우리 혁명앞에는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였다. 5.30폭동후 지하에 깊숙이 들어가있던 얼마 되지 않은 조직들마저 적들앞에 로출되였다. 우리가 감옥에서 나와 사방으로 다니면서 가까스로 수습해놓았던 조직들도 재차 타격을 받고 파괴되였다. 만주각지에서 우수한 지도핵심들이 무리로 붙잡혀 처형되였다. 적들은 공산주의를 헐뜯고 공산주의운동을 탄압…
3. 카륜회의6월하순이 되자 동무들은 약속한대로 카륜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카륜에는 이미 우리의 혁명조직들이 들어가있었다. 우리는 1927년경부터 만주각지로 쉽게 래왕할수 있는 교통의 분기점에 활동기지를 하나 만들어둘 필요를 느끼고 공청핵심들을 파견하여 이 일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우리가 카륜에서 회의를 하려고 결심하게 된것은 이곳이 교통상 편리한 지점에 자리잡고있다는 점과 회의참가자들의 신변안전과 비밀보장을 전적으로 담보할수 있는 은페된 활동기지라는 점을 고려해서였다.카륜은 반일운동자들의 래왕이 잦은 고장이였지만 적들에게는 로출…
10. 철창속에서《길림바람》이 만주의 여러 지역을 흽쓸게 되자 일제와 중국의 반동군벌은 점차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게 되였다. 길림에서 세차게 일어난 청년학생운동과 중동철도사건, 남만청총대회사건으로 하여 우리에 대한 소문이 여러곳에 퍼지게 되면서부터 적들은 길림의 공기를 소란스럽게 하는 장본인이 청년학생들이라는것을 간파하고 우리의 뒤를 캐기 시작하였다.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하여 도처에 정탐군들을 박아넣고 조선사람들의 일거일동을 예리하게 감시하는 한편 중국의 반동군벌을 부추겨 공산주의자들과 반일독립운동자들을 닥치는대로…
9. 왕청문의 교훈1929년 가을에 국민부는 흥경현 왕청문에서 동만청총과 남만청총을 통합하기 위한 대회를 소집하였다. 이 대회를 남만청총대회라고 하였다.국민부의 지도자들은 3부의 합작이 실현된 객관적조건에 맞게 청년운동에서도 분산성을 퇴치하고 통일적인 지도를 보장해야 한다고 하면서 두 청년단체의 통합대회소집을 발기하고 대회기간에 조선청년동맹이라는 단일조직을 내오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은 대회를 통하여 청년조직들에 스며들어온 새 사조의 영향을 막고 만주일대에 있는 모든 조선청년단체들을 저들의 손아귀에 거머쥐려고 하였다.우리는 동만청총과…
8. 차광수가 찾은 길길림시절을 회상할 때면 잊을수 없는 얼굴들이 수없이 떠오르군 한다. 그 얼굴들의 전렬에는 항상 차광수가 서있다.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것은 1927년 봄이였다.나에게 차광수를 처음으로 소개해준 사람은 최창걸이다. 최창걸은 화성의숙이 페교된 다음 정의부본거지의 하나였던 류하현의 삼원포에서 독립군생활을 하였다.하루는 그의 련락원이 쪽지를 가지고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그 쪽지에는 이제 차광수란 사람이 길림에 가니 만나보라는것과 자기도 인차 길림에 한번 오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며칠후 내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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