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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질문 9] 케인스주의는 진보주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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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419회 작성일 10-11-1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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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질문 9] 케인스주의는 진보주의인가?
(서프라이즈 / 스나이퍼 (kwonsw87) / 2010-11-10 15:31)



[노무현의 질문 9] 케인스주의는 진보주의인가?
(서프라이즈 / 스나이퍼 / 2010-11-10)


“복지의 사상과 케인스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역사적으로 진보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에서 케인스주의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소개하자." - <진보의 미래> 75쪽

"케인스주의는 진보주의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 <진보의 미래> 78쪽

케인스의 경제이론은 1930년대 후반에 발생한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총수요를 늘리는 재정확대정책으로 소비를 촉진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일자리를 만들고, 사회보장정책을 도입했다. 그래서 케인스주의자인 폴 크루그먼은 <미래를 말하다>에서 이 시대를 진보의 시대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케인스주의는 진보주의인가? 이런 질문이 나올만 하다. 왜냐하면 지금 이명박 정부가 벌이고 있는 4대강 사업을 정당화하는 논리도 케인스주의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대표적인 케인스주의자이다. 그가 4대강 사업을 옹호하는 것은 경제학자로서 일관성을 지키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케인스주의자들은 대체로 감세정책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는 현 정부 들어 <감세정책+재정확대정책>이라는 이상한 괴물(?)이 탄생하여 경제학 이론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체로 재정확대정책은 증세와 연결되고, 감세정책은 재정긴축정책과 패키지로 엮인다. 이게 케인스주의와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의 대립지점이기도 하다.

이는 앞서의 8번째 질문에서 나온 자유주의와도 관계가 있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제한정부론을 펼친다. 현재 한나라당에서는 이한구 의원같은 보수주의자가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다. 영국의 새로운 총리인 데이빗 캐머런 역시 재정적자를 이슈로 내걸어 재정긴축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스, 스페인, 아이슬란드 등 유럽 국가들의 부도위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의 재정적자 문제는 케인스주의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과연 케인스주의는 진보주의인가? 아니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제이론에 불과한 것인가?

 

[고세훈의 답변] 케인스주의는 민주적 원리가 결여


이 질문에 대해서는 고려대 공공행정학부의 고세훈 교수가 답변을 했다. 고 교수는 복지국가, 사민주의, 영국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질문의 대상자가 된 케인스에 대해서는 번역서를 출간한 바도 있다.

고 교수는 케인스주의와 진보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우선 진보의 개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밝힌다.

"진보라는 말은 적어도 두 가지 점을 전달해야 할 것으로 본다. 우선, '개혁에 대한 의지와 구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수적인 정치인이라도 현상 유지를 주창하지는 않을 터이니 이것만으론 불충분하다....(중략).....따라서 진보라는 말에는 개혁의 방법과 관련하여 일정한 시사가 있어야 한다. 개혁의 내용 또한 그것이 제안되고 추진되는 방법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그래서 진보의 개념에는 '아래'가 하나의 집단/계급으로서 조직되거나 동원된다는 사상이 제시돼야 하며, 이 점이야말로 진보가 민주주의와 별개도 사유될 수 없는 이유이다." - <노무현이 꿈꾼 나라> 148쪽

한 페이지에 걸친 내용을 내 마음대로 줄여서 전달한 것이라 제대로 축약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정도면 고 교수가 생각하는 진보라는 개념은 정리가 될 것 같다.

고 교수의 지적대로 개혁이라는 것은 진보진영의 전유물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진행된 것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보수)개혁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을 되돌리는 과정이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서글픈 일이지만, 그 반대편의 사람들에게는 통쾌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개혁에 대한 의지와 구상은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그래서 고 교수는 필요조건으로 개혁의 방법을 이야기한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부분은 고교수 말대로 민주주의 원리와 맞닿아 있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허전하다. 왜냐하면 <내용>이 빠졌기 때문이다. <무엇이 진보인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다만 앞선 글들에서 진보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교조적으로 명확하게 <이것이 진보다>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실질적인 민주주의, 실질적 법치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등에 관한 질문과 답변을 통해 공감대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다시 고 교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고 교수는 케인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케인스는 시장 체제에 대해 누구보다도 성찰적이고 급진적인 이론가였지만, 진보 체계로서 그의 정치경제학은 바로 진보의 이러한 둘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 위의 책 149쪽

고 교수는 케인스를 합리적 엘리트의 리더십을 신뢰했던 엘리트주의자로 규정한다. 케인스 이론의 핵심은 시장경제에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으로 축약할 수 있다. 그래서 고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케인스의 국가 개입은 계급 이해의 타협과 조화를 내용으로 하는 민주적 원리가 아니라 경제적 지식과 통찰로 무장한 지식인, 선의의 중립적 관료 엘리트, 그리고 이들의 전문가적 보좌와 자문에 의존하는 정치인들의 합리성에 의존하는 것이었다.....(중략).....케인스로서는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이 민주주의를 살리는 것이지, 민주적 정치가 국가의 시장 개입을 위한 정당성과 실효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 위의 책 153쪽

사실 이 부분에서 부연설명이 없어서인지 나로서는 고 교수의 주장이 선뜻 수긍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경제정책에 관하여는 케인스 정도의 사고가 합리적인 것 아닌가 하는 점 때문이다.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특히 거시경제를 관리하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어떤 민주적 방식이 존재할까?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데 국민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과연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4대강 사업을 생각해보면 고 교수의 설명이 이해가 된다. 4대강 사업은 합리적 지식인이라면 모두 반대하는 사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케인스가 말한 사례라고 가정을 해보자. 주지하다시피 4대강 사업은 전국민적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는 사업이다. 그래서 그 성격은 반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절차적인 측면에서도 위법이 있다는 이유로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등 전문가들이 소송을 진행중이다. 만약 고 교수가 설명한대로 두번째 조건, 즉 방식의 민주성을 고려했다면 4대강 사업은 마땅히 철회해야 했을 것이다.

4대강 사업은 케인스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가 어떻게 경제정책을 왜곡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 고 교수가 이런 설명을 부연해줬다면 관념적인 논리를 조금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인스주의가 갖고 있는 미덕은 있다. 그것은 아담 스미스 이래로 '보이지 않는 손(가격)'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고전학파와 그 후예들의 복음서와도 같은 경제이론에 타격을 가했다는 점이다. 고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케인스는 고전이론이 이론의 정담함을 먼저 가리기보다는, 애초부터 현실과 유리된 이론을 가지고, 그것이 현실에서 유리된 이유를 다시 현실에서 구하는, 다시 말하면 비현실적 가정이 실현 안 된 데 대한 책임을 현실에 귀착시키는 황당한-현실은 엄연하게 주어진 것이므로-순환론적 오류를 범한다고 질타한다." - 위의 책 149쪽

사실 대학 초년생 시절 경제학 원론을 공부하면서 가졌던 의문이기도 하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완전경쟁시장은 공급자와 수요자가 동일한 정보를 가져야 하고, 독과점이 존재하지 않아서 진입장벽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등의 전제조건이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이런 전제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가능한가? 케인스는 아담 스미스가 말한 완전경쟁시장의 조건들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고전학파와 그 후예들인 신자유주의, 그리고 시장만능주의자들은 이런 불가능한 조건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오직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복음서의 '메시아'와 비슷하다.

그리고 또한 케인스의 통찰은 2008년에 벌어진 금융위기에서 빛을 발했다. "금융은 은행가들에게 맡기기엔 너무 중요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G20 정상회의에서 국제적인 차원에서 금융규제 합의한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은행가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놓는, 그야말로 시장주의를 관철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공감대만큼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케인스가, 그리고 케인스주의가 진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완벽한 이론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좀더 좋게 만드는 데 필요하다면 그 이론이 어떤 성격이든 참고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고 교수는 케인스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글을 마무리짓는다.

"모름지기 진보는 개혁의 구상뿐 아니라 그것이 실천될 수 있는 방법, 곧 민주적 원리를 핵심적 기준으로서 그 안에 담아 내야 한다. 이 점이야말로 오늘날의 세계적 위기 상황에서 케인스이 통찰이 실천적 대안으로 구현되기 쉽지 않은 이유이며, 민주화의 허다한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에서 진보적이고 통합적인 대안체계로서 케인스주의가 갖는 한계라고 볼 수 있다." - 위의 책 158쪽

동의한다. 그러나 노무현의 질문은 애시당초 케인스주의에 이론적으로 무슨 대단한 기대를 걸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시장만능주의로 인해 발생한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민주주의가 강했던 유럽과 달리 특히 미국에서 복지정책을 이끌어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케인스주의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궁금했다고 보여진다. 그런 측면에서 고 교수의 답변은 다소 불충분한 측면이 있다.

다만 나는 개인적으로 고 교수가 중간에 써놓은 이 말을 교훈적으로 결론에 붙인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통제하는 데 무력하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불충분하게 제도화됐기 때문이고, 그때 자본주의는, 역으로, 민주주의를 통제하고 무력화시킨다." - 위의 책 157쪽

 

스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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