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질문 8]자유주의와 진보, 보수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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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 스나이퍼 (kwonsw87) / 2010-11-10 09:49)
[노무현의 질문 8] 자유주의와 진보, 보수의 관계는?
(서프라이즈 / 스나이퍼 / 2010-11-10)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이런 대비는 비교적 분명하다. 자유주의와 진보, 보수의 관계는?” - <진보의 미래> 78쪽
“진보주의와 자유주의가 자꾸 혼동이 되고 미국에서는 영어로 ‘자유주의(liberalism)’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진보주의’로 번역한 것도 있는데 진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이 관계들을 잘 한번 정리해봤으면 좋겠고요.” - <진보의 미래> 122쪽
이 질문은 한국 사회의 진보주의, 보수주의 공히 오남용이 심하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주의에서는 자유주의를 적대시한다.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로 각인된다. 그러니 이 시대 진보의 최고의 적, 신자유주의의 아버지 자유주의를 곱게 봐줄 수는 없다. 그런데 보수주의는 자유주의를 마치 자신들의 복음서인 양 남용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권조차 박해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마치 자유주의자인 양 행세한다.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유주의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행봉의 답변] 자유주의는 진보의 자산이다
<자유주의>라는 말만큼 다양하게 해석되는 말도 없을 듯 하다. 역사적 맥락을 볼 때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사상도 <자유>를 토대로 싹텄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을 근대시민국가로 이끌어 낸 시민혁명과 종교개혁의 기반도 자유주의였다. 사회주의 사상도 그 바탕에는 자유주의를 깔고 있었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쳐서 자유와 평등은 길항관계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주의는 보수, 진보를 망라한 근대 정치사상의 공통 기반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사회가 분화되고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정치적 지형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다양하게 전개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는 상쟁하는 여러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로 자신을 정립한다. 현상 타파가 아니라 현상 옹호의 변호론으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맞선다. 엄밀한 의미의 자유주의는 이 시점에서부터 성립하는 것이다.” - <노무현이 꿈꾼 나라> 133쪽 그렇다. 진보진영에서 자유주의를 보수주의 사상으로 생각하는 역사적 맥락은 이 교수의 설명에 나와있다. 19세기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유럽 전역의 혁명 과정 속에서 자유주의는 부르즈와 계급의 보수적 태도를 대변한다. 그럼에도 자유주의는 오늘날까지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가치가 되었다. 그것은 평등을 앞세운 스탈린의 전체주의, 히틀러식의 국가사회주의가 가져다준 끔찍한 공포 덕분이기도 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하이에크가 자유지상주의를 내세운 건 뜬금없는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교수는 답변을 통해 <진보적 자유주의>와 <보수적 자유주의>가 어떻게 분화되었는지, 그리고 진보와 보수가 공유하는 접점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이 교수의 답변이 어쩌면 유시민이 주창한 <진보적 자유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도 같다.
자유주의는 개인주의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자유주의를 공격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자유주의는 공화주의와 배치되는지도 모른다. 자유주의라고 해서 평등이라는 가치를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기서 평등은 경제적인 측면보다 이성적, 도덕적 평등을 말한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는 ‘과연 경제적 평등은 가능한가? 경제적 평등은 합리적인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레닌이 건설하고 스탈린이 완성한 소비에트 체제가 과연 평등했는지도 의문이다. 북한은 평등한가? 이런 질문이 연이어 나올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래서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같은 사람은 끊임없이 <공평>을 이야기한다. <합리적 불평등=공평>이라고 생각하는 게 자유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일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가보자. 자유주의는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의 이론적 기반이었다. 계몽주의 사상과 보조를 함께하며 점진적으로 사회를 개량하자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태도가 자유주의를 보수적인 사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는 오늘날에도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최후의 마지노선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역사적 이유는 이렇다. “법치주의와 제한정부론이 자유주의 정치 이론의 근간을 형성한다. 법에 의한 지배는 권력자나 전제군주의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법령에 근거한 질서 수립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권력의 팽창이 자유와 권리의 침해 가능성을 높인다는 전제 아래 무분별한 국가 개입을 억제하는 것이다.” - 위의 책 136쪽 오늘날 이명박 정부하에서 겪고 있는 법치주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법치주의는 본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이념이다. 그런데 현 정부의 법치주의는 국민을 억압하기 위한 이념으로 작동하고 있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얼마 전 고려대 법대에서 <법과 정의>를 주제로 강연을 한 유시민 참여정책연구원장의 말을 여기서 잠깐 빌려본다. “플라톤이 쓴 법률이라는 책에 나온 말, ‘법이 정부의 주인이고 정부가 법의 노예라면 인간은 신이 국가에 내린 축복을 만끽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부가 법의 주인이 되어 있는 한 인간은 국가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죠." - 2010년 11월 1일 유시민의 <법과 정의> 강연 중에서 이미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법치주의에 대해 명료하게 말해 놓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소크라테스가 하지도 않았던 말을 근거로 합리화시키는 법치주의가 창궐하고 있다. 이걸 형식적 법치주의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며 집단농장을 만들었던 소비에트와 북한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도 법에 의해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다. 그들 역시 법치주의를 말한다. 결국 자유주의의 핵심 근간은 국가권력이 법의 지배를 받는 (실질적) 법치주의와 제한적인 정부라고 할 수 있다.
법치주의와 제한정부론을 공통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는 시대변화에 따라 진보적 자유주의와 보수적 자유주의로 분화한다. 핵심 쟁점은 정치적 권리의 확대 여부였다. 프랑스혁명 등의 시민혁명에도 불구하고 투표권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이때부터 투표권을 획득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난다. 영국의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얻어내기 위해 일으켰던 차티스트운동이 대표적이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권리 확대를 옹호했고, 보수적 자유주의는 반대했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권리가 확대되면서 역시 입장이 갈리게 되었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빈곤이나 질병 등 개인의 불행이 단순히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확대되었고, 자유주의는 진보와 보수로 조금 더 명확하게 분화한다. 영국의 자유당과 보수당이 분화된 것 역시 그런 역사적 맥락이 있다. 이 교수의 설명에는 없지만 사유재산권에 대한 입장에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자유주의는 하나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워낙 다양한 형태의 자유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보통 자유주의를 사용하는 관례를 보면 어떤 하나의 개념이 있는 듯이 사용한다. 이 교수는 자유주의를 이렇게 분류하고 있다. “통상적인 분류 방식으로 크게 고전 자유주의와 근대(현대)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로 나눌 수 있다.” - 위의 책 139쪽 이 교수는 답변에서 자유지상주의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큰 맥락은 이렇다. “칸트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아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의 가치를 자유주의 핵심 사상으로 정립했다. 영국의 밀은 고전 자유주의와 근대 자유주의의 접점에 위치해 있다. 사회계약론을 비판하는 공리주의자로 출발한 밀은 공리주의의 개인주의적 성격을 넘어서는 집단적 자유주의론의 토대를 마련한다.” - 위의 책 140쪽 19세기 후반에 사회주의 사상이 유럽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로 인해 사회경제적 권리들이 헌법에 들어오게 되고, 노동자들의 권리가 대폭 향상된다. 사실상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파탄 나고, 집단주의적 자유주의(소셜 리버럴)가 그나마 온건한 개혁을 주장하며 급진적 혁명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와 맞서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리고 레닌의 소비에트와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가 등장한다. 이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전 자유주의가 옹호하던 자연권, 사회계약론, 법치주의, 제한정부론, 권리론, 시민사회론은 이후 자유주의 전개에서 중요한 이론적 전통이 되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전통의 격세 유전적 계승이자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위의 책 141쪽 결국 이 교수가 분류한 자유주의에서 고전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는 일반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이 비판하듯 보수적인 사상으로 자리매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대(현대) 자유주의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이 교수의 설명이다. “자유주의를 선구적으로 구가했던 영국에서 고전 자유주의에서 근대 자유주의로의 전환이 전형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은 1875년경부터 시작된 장기 불황 속에서 경제 구조의 심각한 변동을 겪었다……. (중략)…… 국가의 책무와 역할을 강조하는 그린 등의 옥스퍼드학파의 사상과 J.S.밀처럼 분배 개선을 강조하는 사회적 자유주의 등의 새로운 사상적 동향이 이러한 사태의 전개와 맞물리면서 근대 자유주의가 성립한다.” - 위의 책 141쪽 유시민이 말한 소셜 리버럴은 바로 이 같은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 어떻든 J.S.밀에서 분화된 사회적 자유주의는 이후 롤스의 <정의론>으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 샌덜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자유론에 관한 좋은 대중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1월 1일 고려대 법대에서 있었던 유시민의 <법과 정의>도 참고할 만한 좋은 강연이라고 하겠다.
<자유주의가 진보, 보수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라는 질문은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긴장관계 혹은 모순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이 둘을 섞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자명하고 필연적인 정치 체계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양자의 결합은 일정 정도 타협의 산물이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민주주의 확대가 자유주의 가치를 위협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 위의 책 142~143쪽 19세기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프랑스 혁명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요구했다. 절제되지 않은 욕구는 반동을 불러왔고, 반동은 또 다른 반동을 불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목숨이 사라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계급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공화정이 실패하는 이유가 되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수년 동안 살펴보고 경험한 토크빌은 ‘다수의 전제’를 우려했다. 다수를 앞세운 민주주의가 소수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인민민주주의를 표방한 소비에트체제는 토크빌의 우려를 증명해주었다. 그 결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타협한 것이 헌정주의다. 이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헌법은 기본권과 권력 구조를 규정하는 것을 중심 내용으로 한다……. (중략)…… 법치주의와 권리의 보장이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가치라면 민주주의 역시 권력을 통제, 감시하면서 국민의 의사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 위의 책 143쪽 우리나라 헌법도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기본적인 인권, 정치적인 권리, 사회경제적 권리에 관한 기본권 조항이 있고,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방지하기 위한 삼권분립을 바탕으로 한 권력구조에 관한 조항이 있다. 다만 이 교수는 양자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헌법적 제약 속에 민주주의를 가두려고 하는 반면에 민주주의는 헌법 제약을 벗어나서 국가와 사회 속으로 민주주의 영역을 확장하려 한다. 자유주의가 구심력이라면 민주주의는 원심력이다.” - 위의 책 143~144쪽
이 정도에 오면 자유주의의 한계, 혹은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적대모순관계라는 식의 생각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수의 설명을 이해를 돕기 위한 정도로 생각해야지, 그 자체로 어떤 논리적 완결성을 가졌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상이나 이념의 완결성을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아무리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하여도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를 훼손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교수도 이런 생각을 바탕에 뒀다고 생각한다. 이교수의 글 전반에 흐르는 논지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허약한 부분은 <시장>에 관한 것이다. 진보진영의 사람들이 자유주의를 공격하는 부분은 아마도 이 지점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자유지상주의가 내세우는 자유가 <시장>에 초점을 맞추었듯이 말이다. 그러나 J.S.밀 이후의 근대자유주의자들은 <시장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자나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런 자유를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 자유주의자들은 <공정한 시장>을 말한다. 이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자유로운 시장이 아니라 공정한 시장을 실현하려는 진보적 방향의 시장론이 제기되는 것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결함과 무능을 치유하려는 시장개혁론으로 봐야 한다. 시장은 자명한 것도 자연적인 것도 아닌 국가에 의해서 계획된 것이라는 폴라니의 지적은 공정 시장론을 지지하는 언명이다.” - 위의 책 144쪽 특히 이 교수는 정치 영역에 있어서 합의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자유주의는 정치에서 합의를 중시한다. 그러나 다수결주의를 넘어서는 합의 모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 위의 책 145쪽 그렇다. 대의제도는 다수결로 이루어진다. 선거도 다수결이다. 그러나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다수결 제도의 완결성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당장 정치현실을 봐도 그렇다.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다수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참여정부 당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였을 때 한나라당은 다수결에 승복하지 않았다.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다수결을 민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수결 자체를 민주주의로 아는 수준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 교수는 다수결을 넘어서는 합의 모델을 제시하지 못한 것을 자유주의의 한계로 설명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문제는 민주주의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다수결 제도는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수결 만능주의에 빠진 (형식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은, 자유주의가 내세운 합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합의 모델의 구체적인 형태를 물어오면 난감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조적으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했을 때 명확하게 답할 수 없듯이 말이다. 결국 민주주의의 성숙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실제로 국회에서 통과되는 수많은 법률은 대부분 합의를 통해 형식적인 투표절차를 거쳐 입법된다. 겉모습을 보면 투표절차를 거친 다수결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합의라고 봐야 옳다. 우리가 뉴스로 보는 소수의 갈등을 내포한 법안을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소수에 불과하다.
이 교수의 결론을 보자.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기는 했지만 이 교수는 자유주의의 역할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자유주의는 보수적인 사상이 될 수도 있고, 진보적인 사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교수는 이렇게 답변한다. “자유주의 승리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 초,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을 통해서 확인되었다고는 하나, 승리한 것은 근대 정치사상의 공통 기반으로서의 자유주의이지 좁은 의미의 경쟁적 자유주의는 아니다……. (중략)……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 질서는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자유주의, 사회적 연대와 정의 원칙의 구현을 중심에 두는 자유주의는 진보의 이론적 자산이다.” - 위의 책 146쪽 이 교수의 결론을 내 마음대로 표현하면 이렇다.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도 있고, 보수적일 수도 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들 중에서, 보수적인 생각을 많이 가지면 그 세상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갈 것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면 진보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자유주의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소수의 엘리트가 이 세상을 설계하고 디자인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시민들의 공감을 얻어서 움직이는 방향으로 이 세상이 움직인다. 이 경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결코 모순되거나 적대적이지 않다. 우리가 사는 세상, 미래세대가 살아갈 세상은 결국 우리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교수의 답변은 학자가 쓸 수 있는 방식의 글이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쉽게 쓸려고 노력한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오용과 남용, 그리고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는 답변이라고 하겠다. |
스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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