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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님의 노무현 시민빈소 지켰던 눈물겨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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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3건 조회 5,218회 작성일 10-10-05 13:56

본문

(한국 거주 사시모 회원이신 용 님의 글입니다.  이 일은 우리가 기억해두어야 할 사건이며, 용 님은 온 몸으로 바른 생각을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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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월 5월 23일 노대통님의 빈소를 차린 후 여러분과 마찬가지인 상주의 한사람으로 그사이 겪었던 일을 짬짬이 메모하여 지난 과정과 현재를 정리하여 오늘에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혹 여러분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질책은 말아 주십시요.

왜냐하면 여러분들도 똑 같은 상주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7월3일 금요일 여섯번째 제사가 대한문에서 있고, 7월10일 49재가 거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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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3일 집을 나와 열하루 동안 빈소를 지켰습니다.

제 맘 안에는 신이 들었습니다.

정부에서 억지로 만든 노대통령님 빈소에는 번듯한 넘들만 오는데 대한문앞에서 쌈쌈하며 시민들이 맹긴 노짱 빈소에는 끝이 안 보이게.....

5월 29일 광화문에서 쥐바기가 하는 체면 치례로 영결식을 마치고

성남 연화장 그 뜨거운 열에서 노짱님 타는 냄새를 저만 맡았습니다.

영결식이 끝나면 치울 줄 알았던 빈소가 남아 있으니까

담날 새벽 막내 아들보다 10년 젊은 전경을 앞세워 군화발로 빈소를 때려 부셨습니다.

견찰에 항의를 하니까 잘못했다고 49재까지는 보장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바로 옆에 빈소를 재건하고 깨어있는 시민의 문상을 받았습니다.

한 20여일은 괜찮았습니다.

견찰놈을 믿고 11시50분 시청앞 마지막 지하철로 귀가를 했고 6시 30분 현장 도착 출퇴근을 하다가

6월 24일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에 귀가하여

밤을 새워 빈소를 지킨 상주와 교대를 하기 위해 오전 5시30분에 기상하여 6시 30분쯤 대한문 앞에 도착하니

난장판이었고 소식을 듣고 온 많은 시민과 상주들이 간이로 분향소를 꾸미고 있었다.

혼란 속에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침 5시 40분쯤 10여명의 보수를 가장한 깡패들이 분향소 뒤쪽 차도에서 천막을 훼손하기 위해 자그마한 연필 깎기 접는 칼등을 들고 성스러운 시민분향소를 침탈하였고 뒤이어 군복을 입은 2, 30명이 조선일보사 쪽인 시청앞 2번 출구쪽에서 달려와 바로 옆에는 경찰들이 있었는데도 불과 2,3분만에 빈소를 난장판을 만든 뒤 프라자호텔 뒤쪽으로 유유히 사라졌단다. 영정도 없어졌단다. 상주단과 시민들은 혹 영정이 훼손되지나 않았을까 또는 유기되지나 않았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삼삼오오 찾으러 갔으나 발견을 못했다.

침탈로 엎어진 제단, 깨진 그릇 등 훼손된 분향소는 그대로 둔 채 시민들은 경찰이 수사를 위해 쳤다는 노란 포리스 라인을 걷어내고 햇빛에 뜨겁게 달구어진 인도에 조그만 탁자위에 영정을 모시고 초와 향을 준비 돗자리를 깐 그야말로 초라하게 만들어진 노천분향소는 내려쬐는 여름 아침 뜨거운 햇살로 초가 녹고 촛불이 바람에 자꾸 꺼진다. 제단이라도 햇빛을 가리기 위해 조그만 천막을 치려졌고 시도했으나 또 일부가 부서진채 무산되었다.

‘그래!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도 국민들의 노무현에 대한 존경심과 그리움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노천에서 뜨거운 햇살아래 몇 몇분의 분향이 시작되었고 엎드려 절을 하는 사람마다 흐느낌의 시간이 길어지고 어깨가 심히 움직인다.

“죄송합니다. 경찰이 뜨거운 햇살을 피하지 피하지 못하게 하는군요. 이제 장마도 시작되는데 어떤 압박이 들어오고 비가 와도 저희는 비닐로 덮고 신문지를 깔고라도 여러분의 조문을 받겠습니다.”

잠시 후 몇일 전부터 도로를 점유했다고 치워 달라고 그사이 풀방구리처럼 드나들었던 중구청 직원과 낯선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속으로는 우리의 대통령의 빈소가 부서지고 영정이 없어져서 국민들이 분에 차 속속들이 모일 줄 알았다. 그러나 오후 들어 경찰의 숫자도 늘어 가는데 새로 나온 시민들의 숫자는 늘지 않는다.

오후 2시쯤 경찰버스가 마치 보수단체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 마냥 분향소 뒤쪽을 에워 쌓기 위해 길에 있는 천막 철골조 잔유물를 인도로 집어넣는다. 잠시 후 버스는 사라지고 트럭 여닐곱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고 20여명의 마스크를 쓰고 몇몇은 팔에 문신을 한 청년들이 떼를 지어 잔유물과 집기를 트럭에 실기 시작한다.

실랑이가 있었지만 철저한 경찰의 비호 하에 철거 작업은 진행되었다.

쓰러진 창고 아래 양초, 종이컵 박스, 행인들에게 시원한 얼음물을 제공했던 스텐으로 만든 물통, 야외용 부루 스타, 때 뭍은 쟁반에 상식을 올리는 게 불경스러워 노무현과 처음 접한 해에 큰 아들이 사다준 집에서 나만이 사용하던 조그만 찻상, 김희선 전의원께서 가지고 온 수라상등, 또 쓰러져 있던 제단, 몇 일만에 한번 씩 새벽에 부부임 직한 젊은 두 양주가 영정 밑에 “사♡랑”이라는 글씨를 장미와 튜립으로 정성스럽게 만들어 영전에 바치곤 했는데 그 꽃도 짓뭉개져 있고.....

주위에는 소식을 듣고 온 시민들 고작 200여명과 경찰병력 3~400백명이 분향소를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어느 덧 용역 깡패들은 임시로 만든 빈소의 돗자리마저도 치우려고 일어나란다.

젊은 상주하나는 영정을 부둥켜안고 울음으로 절규를 한다.

‘뭣 때문에 너희들은 노무현대통령의 조문을 못하게 막느냐? 너희는 국민들이 아니냐?“

나는 돗자리에 앉아서 꼼짝 않고 있었다.

잠시 후 앞에서 돗자리를 잡아 다니니 몸의 중심이 흔들리더니 양말만 신은 채 뜨거운 돌 맨바닥에 앉게 되었다. 구두를 찾으니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전경들 군화사이로 딩굴고 있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게 무엇인가?

시민들이 1,000여명만 왔어도 빈소에 손을 대었을까?

잠시 후 중구청에서 나온 차는 없어지고 주위에 있던 경찰들도 조금 떨어져 있다.

시민 한둘이 옆에 있더니 영정 앞에 은빛 돗자리를 깔고 몇몇 분이 조문을 하기 시작하자 10분도 안되어 또 경찰들이 압박해온다.

이번에는 대한문 바로 앞 약간 경사진 곳으로 영정을 옮겼으나 마찬가지였다.

아 얼마 전에 경찰이 대한문 앞만 아니고 옆 돌담길로 가면 괜찮다고 했지?

물론 상징적인 곳은 대한문 앞이지만 어두워진 지금까지 상황이 호전될 기미가 없으니 돌담길 초입에 빈소를 차리고 신문지를 깔고 조문을 받자 그 자리에서만 밤늦게까지 네번의 압박과 시민 연행이 자행되었다.

24일 하루만 31명이 연행된 것이다.

왜 연행했을까? 무슨 죄일까? 항의하는 사람은 무조건 연행이다.

죄목도 없다. 차도 있으면 도로교통법으로 집어넣는다고 또 인도에 있으면 괜찮다더니만 행인통행 방해죄란다.

완전 코미디다.

경찰의 작전은 합법이던 불법이던 연행으로 모이는 사람의 수를 줄이는데 재미가 들렸고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일에 연행된 사람들이 재판까지 가는 경우 우리가 벌금을 내어 줄 수 있는가?

정말 이 정부는 노무현을 무서워하는구나.

분향의 ‘분’, 촛불의 ‘촛’자중 한 글자가 떠 오르면 발작을 일으키는구나하는 생각이 앞선다.

결국 연행된 사람들은 다음날 다 풀려났다.

다음날인 25일 대한문 앞 아침은 ‘특수임무종사자’ ‘HID' ’재향군인회‘ 국가유공자’등 군복을 입은 자들의 통행이 빈번하다.

우리의 검은 상복과 ‘근조‘리본을 째려보는 폼이 이상하다.

물론 옷을 입은 자태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도 눈에 띤다.

한마디로 팔려 나온 사람들이다.

저 사람들은 대한민국사람들이 아닐까?

저들은 집에서 자식들이 아빠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알까?

한마디로 측은한 감마저 든다.

8월 24일 국민행동본부 서정갑의 더러운 손에 탈취, 훼손돼 중앙우체국을 통해 봉하마을로 택배로 보내 온 100여만명의 시민이 조문을 했던 시민 분향소의 영정이 봉하로 부터 인편으로 고히 모셔와 27일 오후3시 시민의 품으로 다시 왔다.

경찰은 방패를 들고 보자기에 싼 영정만 졸졸 쫓아다닌다.

‘여봐요. 경찰나리들! 노무현대통령님의 영정 좀 그만 따라 다니세요!’

결국은 시민의 영정은 28일 오후 늦게 영결식 후 매주 월요일 7시 빈소에서 재를 올려주셨던 원불교의 권유로 흑석동에 있는 원불교제단에 임시로 모셔 놓고 오는 7월3일 대한문에서 거행 예정인 6재 그리고 49재때 시민의 품으로 다시 모시게 될 것이다.

우선 훼손이나 침탈로부터 우선 안심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 사이 존영을 한군데 모시지 못하고 휘둘린 것에 대해 상주의 한사람으로 또 국민의 한사람으로 노무현대통령님이나 국민들에게 입이 열이라도 변명할 말이 없다.

지난 이야기지만 영결식 이후인 5월 30일 새벽 경찰에 의해 첫 번째 침탈을 당했을 때부터 분향소 앞은 2,30집단의 기자회견장으로 변하였고 자기 일보다 우선하여 그 누구하나 빈소에서 예를 갖추고 헌화하는 집단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심지어는 묵념 조차도 않는 집단들이 있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상주가 아닌가?

자기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시간상 거리상 먹고 살기에 바빠서 매일 상식은 못 올릴 망정 바로 앞에 있는 빈소에 헌화하고 분향하기가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아마 이것도 이명박 정부에 빌미를 준 것이 아니가 생각도 든다.

아니 이미 예견되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달 23일 청천병력과 같은 노무현대통령님의 서거 소식을 듣고 지금의 상주단 일부와 몇몇 시민들의 협의하에 만들어진 대통령인 동시에 대한민국 보통 국민이 존경하는 어른의 빈소이었다. 국민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처음 친 빈소 천막은 세우기도 전에 경찰에 의해 무너졌고 오후에 들어서야 조문을 받을 만한 환경을 갖게 되었지만 중무장한 경찰에 의해 통로는 차단이 되었고 여기저기 경찰과의 다투는 고함 소리가 주위를 어지럽게 하였다.

오후 늦게 ××당의 도움으로 천막이 하나 더 쳐지고 조문을 하려는 시민들의 행렬은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 다음날 정부에서는 공식적인 빈소를 서울역에 마련하였다는 뉴스를 접했지만 많은 분들이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진 분향소로 더 많이 찾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

노무현대통령님께 국화 한송이 바치고 분향을 하는데 단 1분도 채 안 되는 행위를 위해 자정이 넘어서 까지 3~4시간을 서서 기다리시는 시민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감사하고 고마움에 다리가 아프기는 커녕 목이 메일 뿐이었다.

그렇게 6일이 흘렀다. 29일 영결식은 온국민의 애도 속에 광화문을 떠나 수원 연화장으로 화장을 모시러 갔고. 두어시간후 노대통령님의 한줌의 재는 봉화로 떠났다. 그 시간 대한문 앞 빈소에는 님의 영면을 기원하기 위한 분향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님께서 정치에 발을 들여 놓으신 20여년 동안 님은 사회적 약자, 소외된 서민, 배움이 짧고, 돈 없고 빽 없어 차별받는 보통사람들을 대신해 거대한 언론, 정치권력, 지배세력과 싸우셨다

그분은 오로지 혼자였다.

2002년 그분을 선택한 분들 뿐아니라 조중동으로 시작된 소설같은 논조에 휘말린 한겨레, 경향까지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영결식후 단 하루도 안 되어 경찰 군화에 밟혀 휘어지고 널브러진 시민 분향소의 영상을 보고 분개하여 전국 각지에서 머다 않고 달려오신 국민들....

근처 학교에 재학중인 아침 등교 길에 문상을 하는 중고생들,

밤늦은 시간과 새벽에는 취기를 빌어 굵은 눈물을 떨구는 청년 및 샐러리맨들,

문상을 와 하루 자원봉사를 하는 많은 젊은 사람들,

인천에서 암투병중에 서거 소식을 듣고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뒤늦게야 찾아와 미안하시다며 눈물을 흘리시는 아주머니,

고아로 자라 어렵게 사신다고 눈물을 지으시며 봉사자들에게 미안함을 표하시며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몇장을 주시는 환갑이 넘으신 아주머니(자매님)- 물론 정중히 돌려드렸지만-

휴가를 나와 집에 가기도 전에 분향을 하러 온 많은 군인들,

밤 늦게 얼굴이 붉으스레하여 흐느끼는 현직 경찰,

우리가 폐간을 주장하는 C일보사 내근직원,

밤새 몇 번의 꿈을 꾸었다고 아침 일찍 달려온 분당사시는 중년부인,

서거소식을 듣고 10일간 아파서 누웠다 왔다며 뒤늦어 미안하다며 영전에서 눈물을 한없이 흘리신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광주 양동시장에 사셨다는 불광동 사시는 아주머니,

2,3일에 한 번씩 퇴근길에 막걸리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영전에 올리고 눈물을 짓는 근처에 직장에 다니는 듯한 젊은 여성,

영결식전에는 사람이 많아 분향을 못했다고 미안해하면서 이틀에 한 번씩 잔을 올리는 택배 복장을 한 젊은이,

새벽에 노무현대통령님의 영정 밑에 “사♡랑”이라는 글씨를 장미와 튜립으로 정성스럽게 만들어 영전에 바치곤 했한 젊은 부부,

어디 주최인가인가 중학교 합창 콩쿨대회에서 1등을 하였다고 인솔교사와 함께 분향을 하고 영전에서 합창을 바친 ××중학교 2학년생들,

갓난아이를 데리고 와 묵념을 하라고 해도 부득이 왼손으로 애를 가슴에 품어 안고 큰절을 올리는 어린 주부,

상갓집 출입에 경험이 없다는 젊은 남녀와 학생들,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때 체류가 편했다고 눈물을 짓는 많은 중국동포,

꽃 한줄기가 피어 있는 노오란 화분을 영전에 바친 신경근육장애로 외출이 힘들어 10년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는 인천 사는 젊은 여성,

지나는 길에 들어오길 주저하며 입구에서 합장을 하며 지나는 행인들,

지금은 일본으로 귀국했겠지만 3일을 연이어 아침마다 문상을 드리며 눈물을 흘리던 일본인 민권변호사,

한국어를 제법하는 교토에 산다는 눈물을 글썽이며 귀국하기 전날까지 빈소를 찾은 젊은 일본청년 등

님을 그리워하며 빈소를 찾는 분들은 고소영, 강부자, 한나라, 뉴라이트가 아닌 지극히 보통사람들이었고 특히 장애우나 서민들에게는 더 사무친 것 같다

5재 때인 지난 주 금요일 불교계에서의 재도 무산되었고 그리고 그저께도 다섯분의 원불교교무님이 어느 월요일처럼 재를 지내기 위해 나오셨으나 결국은 대한문을 등지고 한 평반 남짓한 인도, 맨땅에서 재를 올리는 수모를 겪었다.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단기전으로는 이미 경찰의 시민 압박과 연행, 그리고 대한문 앞에 군중이 운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경들로 완전히 이쑤시개 꼽듯이 빽빽하게 채워 넣고 시민들을 덕수궁 돌담길과 차도로 몰아내는 작전은 성공했다.

얼마 전 경찰의 간부라는 자에게 왜 분향소를 막고 경찰을 배치하느냐고 물었더니 그자 하는 말이 가관이다. 상복을 입고 있는 나에게 하는 말이다.

“아니 선생님은 이웃집에 사는 좋아하는 아저씨가 돌아가셨는데 장사를 치루고 나서도 서운해서 길거리에 나와 앉아 있으면 됩니까?“ ”뭐요? 이웃집 아저씨? 당신은 이 나라 국민이 아니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예요. 나라의 부모요!“

경찰의 현재가 이렇다.

얼마 전 촛불시민에게 무자비하게 뭉둥이를 흔들었고 대한문 앞에서 시민에게 손가락질을 당했던 조삼환기동대장이나 이자도 일제 앞잡이로 독립군의 혀를 잘랐던 노덕술의 죄보다도 하나도 가볍지 않다.

나는 2006년 말 인혁당사건 재심 때 그 당시 남산에서 고문을 자행했던 아들에 의해 부축되어 재판정에서 들어와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32년만에 만난 유가족, 고문당했던 사람에게 갖은 욕설과 수모를 당하는 장면을 보았고 그당시 고개를 떨구던 대구에 사는 퇴임경찰관의 아들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또 2008년 7월 24일 KBS앞 노란 천막이 경찰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던 날 강원도 홍천에서 급류에 떠내려가는 한사람을 구하지 못해 망연자실하여 앉아있는 소방대원을 영상을 통해 보았다.

지금 국민들의 마음은 지하에 있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용암과 같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단 하루를 살아도 떳떳하게 살아라

그래 압박해라! 방패로 밀어라! 그리고 부수어라!

우리는 이시대가 정말 살기 어려워 누군가에게 눈물로 호소를 하러 단 한분이 분향을 오시더라도 어디엔가 분향소를 만들고 지킬 것이다

원불교에서의 일기

(49재 D-6)오늘은 108배를 올렸다.

어제 6제도 지난 주 5제때와 마찬가지로 대한문 빈소가 있던 자리를 경찰이 앞뒤를 막고 아예 접근을 불허했다. 상주들은 대한문 던킨 도너츠 앞 프라자 호텔이 보이는 쪽 인도에서 젯상을 차린 후 이동하여 대한문 앞 행인들 다니라고 만든 통로에 대한문 정면을 바라보면서 젯상을 차리고 (기습)절을 올렸다.

기자들의 후레쉬가 터지고 왁자지껄하자 경찰들은 어안이 벙벙했는지 여기저기 무전기를 들고 야단들이다.

그사이 핍박 속에서 지냈던 제사보다 젯상도 푸짐하게 차려졌고 많은 시민이 음복할 기회를 가졌다.

어제 6제를 지내기 위해 모셨던 150만명의 문상을 받았던 영정을 흑석동 원불교로 다시 모시어다 놓고 한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갔다가 오늘도 어김없이 5시에 기상하였다.

상식을 준비하기 위해 씻어 불린 쌀을 앉히고 탕을 끓이고 있는데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상하게 ‘칙~’하는 소리가 계속난다. 알고 보니 압력솥에 스팀이 새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조금 더 자다가 직장을 나가는 안사람을 깨우기도 무엇해서 지나쳤더니 냄새가 난다.

후에 보니 압력솥 내부가 까맣고 밥은 마치 잡곡을 섞은 것 같이 야간의 색을 띤다.

맛을 보니 다행히 탄내는 안 나고 쫄깃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다시마를 못 찾아 북어대가리 반쪽을 넣은 탕을 끓이고

조그만 보온병에 넣고 수저등을 챙겨 집을 나섰다.

흑석동행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삼각지역 지하도를 걷는데 무언가 찜찜하다.

알고 보니 탕이 담긴 통을 식탁에 놓고 안가지고 온 것이다.

그렇다고 말은 할 수 없지만 집에 다시 갈 여건이 아니었다.

탕 없이 맨 ‘메’만 올릴 수 없고 어떻게 하나?

어제 아침에는 상식을 제대로 올렸는데 오늘은 아침에 밥도 태우고 탕도 못 올리고....

7시 약간 지나서 흑석동 원불교4층 법당에 도착하여 향을 피우고 영전에 탕도 없이 상식을 올렸다.

존영을 보니까 웃으시는 것 같았다.

‘뭐 할라고 잠 안자고 이리 옵니까?‘

‘상주로서 이 환경 속에서 제가 할 일은 고작 이것 밖에는 생각이 안 납니다.

그래봐야 일주일밖에 안 됩니다. 맨 ‘메’이지만 맛있게 드세요‘

오늘은 땀을 흘리며 108배를 올렸다.

(49재 D-5)여러분과 함께 할 껄 하고 후회합니다.

어제 아침 노무현대통령님 상식 올릴 밥을 실수로 태웠는데(옛날 같으면 곤장에 태형에....)

밤 늦게 돌아와 물에 충분히 불렸지만 새까맣게 탄 밥이 눌어붙은 압력밥솥 안을 싱크대에서 철수세미로 닦으려니 솥바닥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여 욕탕에서 문을 꼭 닫고 닦았다.

어제는 용산참사현장에서 오후7시에 미사를 드리고 오후 9시쯤 대한문 앞에 도착하니 평일과는 달리 오랫 만에 보는 촛불동지들을 포함하여 숫자가 많아진 것 같다.

어느 때와 같이 대한문 앞 노무현대통령님 영정을 모셨던 자리는 경찰들의 차지였고 CCTV가 닿지 않는 덕수궁 돌담길에 모셔 놓은 간이 분향소 앞에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3,40명이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 주제는 어제, 그제, 또 그전과 다 같은 명바기, 조선일보, 친일파, 한나라.........등 내용이다.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오전 5시에 일어나 어제와 같은 실수 없이 7시 조금 넘어

흑석동 원불교 서울교구에 도착하여 촛불을 켜고 향을 올리고 상식을 올렸다.

숭늉을 올릴 때까지 약 40분간 많은 생각을 하였고 제 잘못이 있음을 알았다.

‘서울에서 영정을 가까이 모실 시간은 불과 6일밖에 없는데 많은 분들과 같이 절을 드리고 상식을 올릴 걸’하는 상주인 여러분과 함께 하자는 말씀을 못 드린 것에 대한 후회였다.

또 오늘이 일요일 아닌가?

반면 ‘아니 일요일이라 놀러가는 사람들도 많고 모처럼 아침 일찍 쉬는데....’

상식을 물리고 원불교 건물 바로 옆에 40m 높이의 孝思亭(세종때 우의정, 한성부윤을 지낸 노한이 모친상을 당하여 선영인 이곳에 모시고 무덤 옆에 초막을 치고 3년간 서러워 그 곳을 떠나지 못했다는 곳) 벤치에 앉아 밑으로 지나다니는 자동차를 보며 노대통령님께서 물리신 수라로 아침을 했다. (혹 분위기나 맛 상상해 보세요)

49재인 7월10일 오전까지는 그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봉하를 가실 계획이 있더라도 낮에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한 번씩 작별 인사를 하실 겸 해서 다녀오세요.

한번이라도 더 가슴에 품으면 그만큼 노무현의 정신은 우리 가슴속에 더 깊이 남습니다.

그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살기 좋은 세상은 빨리 올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드시는지요.

그리고 내일도 역시 그리고 금요일까지 오전 7시에 상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점심과 저녁은 김희선 전 국회의원께서 올리시고요.

함께 하실 분은 흑석동 중앙대학교 입구 원불교 서울교구로 오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49재 D-4) 노무현대통령님 영정을 뵙고 나서

이제는 아무리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5시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을 깬다.

4일간의 시행착오를 겪었더니 상식을 준비하는 시간이 단축되었다.

다른 날보다 20분이나 일찍 집을 나서서 7시 전에 도착하니 법당 안에 향 내음이 가득한 걸 보니 교무님들께서 제를 올리시고 나가신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르고 7시를 기다려 상식을 올렸다.

숭늉을 올릴 시간을 기다리다 쏟아지는 잠을 못 이기고 깜빡했다가 인기척에 놀라 앞을 보니 대한문 빈소 영정 앞에 매번 정성스럽게 꽃을 올렸던 조그만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윤선생이 꽃을 들고 왔다.

지난 5재, 6재 때에도 꽃을 올렸고 노오란 노무현셔츠를 40벌을 기증한 분이다.

매번 정성에 감사를 드렸지만 제 글을 읽고 한번이라도 더 존영을 뵈러 나왔단다.

지난 번 6재때 스스럼없는 대화에서 내 아들보다 조금 나이가 더 들었다고 들었고

딸 같은 마음에, 또 매번 아침마다 이야기 상대가 없던 차에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숭늉을 올리고 2배반의 예를 하고 법당 뒷자리에 앉아 물리신 상식을 윤선생과 나누었다.

알고 보니 아버님은 지금 부산에 현주소를 두고 계시지만 서울 종로에서 조상대대로 살아오셨고 할아버님께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를 하다가 옥고를 치루신 집안의 자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한 분 한 분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이 함께하여 정보를 공유하고 자기가 할 일을 찾아 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날이 멀지 않음을 느낀다.

오늘 월요일 6시에는 영정이 모셔져있는 흑석동 원불교서울교구에서 제를 지낼 예정입니다.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상주라고 생각되시는 분 모두 참여를 바랍니다.

(49재 D-2) 대한문 옆 덕수궁 돌담길

어제는 상식을 물린 다음 조계사에서 한겨레, 경향에서 주최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심포지엄’에 참석하였다.

200여 좌석은 이미 만원이었고 시작 시간 10분 늦은 오전 9시 40분 연세대학교 김호기교수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TV에서 봤던 눈에 익은 분들이 참석하였고 오후에는 대한문빈소에서 가끔 뵙는 시민들과 인사도 나누었다.

님의 육신은 봉하마을에 묻히셨으나 정신은 온 국민의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DJ의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의 말씀이 와 닿았다.

많은 발제자, 토론자, 기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그 수는 많지는 않지만 노대통령의 서거의 원인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노대통령님 서거 후 아니 작년 촛불 때에도 이명박을 찍고 그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더 열심히 시간을 내는 동지들이 있으니까 토론회 역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자손도 1년 내내 촛불에 참석하였고, 또 일정시대에 윗대 어른이친일쪽에 있었다고 고백한 자손도 죄를 씻고자 열심히 촛불을 든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오후가 되어 조계사 식당에서 아침 영전에 올렸던 물리신 것으로 점심을 하고 계속 된 토론회는 토론회 예정시간 보다 1시간인 늦은 7시에나 마치게 되었다.

마침 참석하신 분의 권유로 시민 상주의 한사람으로 마이크를 잡고 7월 10일 오후 2시경 대한문 앞에서 49재를 지낼 제대를 준비하고 3시부터 불교계를 시작으로 제사가 시작될 예정이라고 공지할 기회를 가졌다.

오늘 아침 상식을 올리려하니 연설대 안쪽에 보관해 두었던 조그만 나무쟁반이 안 보인다.

후에 찾기는 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물을 곳도 없고 하여 주발, 탕그릇, 수저를 따로 따로 옮기는 불경을 저질렀다.

아침마다 원불교교구에 도착하면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서둘러 도착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이 혼자 상식을 올린다.

내일, 그리고 49재가 진행되는 모레 오전을 끝으로 살아생전에는 3.1절, 4,19, 5.18, 8.15등 기념식때 매번은 아니지만 가까이서 뵙곤 했는데 ‘내가 이렇게 가깝게 영정을 모실 기회는 없어진다’ 하는 생각을 하니 섭섭한 마음이 그지없다.

대한문에서부터 내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탕외에는 올려보질 못해서 삼색나물이나 한번 올렸으면 했는데 준비할 여유가 없고 아내에게 말조차 건내지 못했다.

오늘도 역시 효사정(孝思亭) -조선 세종때 한성부윤과 영의정을 지냈다는 盧閈(노한)대감이 모친을 그리며 시묘살이를 했다는 정자- 으로 자리를 옮겨 아침을 했다.

공교롭게도 노무현대통령님과 노한대감과는?

아침을 들면서 함 생각하니 ㅋㅋㅋ....

잠시 후 어느 때와 같이 대한문 옆 돌담길에 있는 임시분향소로 나간다.

오늘은 작년부터 시국미사를 같이 했던 형제 자매님들과 오후 9시에 천주교에서 위령기도를 바치기로 했다.

몇 분이 참석하실지 모르나 종교와 관계없이 많은 분이 참석하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49재 D-1)어제의 대한문 앞 사건

오늘 아침도 메를 많이 태우지는 않았지만 약간 실수를 저질렀다.

압력밥솥에 약간 눌어 타기 직전에 불을 껐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았는데 왜 그랬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따라서 어느 때 보다 주발에 양이 좀 모자라는 듯 했다

그전에는 뚜껑을 덮으면 약간 눌려 삽시(수저 또는 시저를 꽂는 일)하면 모양이 좋았는데

오늘은 상식을 올리면서 보기가 불편했다.

다행히 나무쟁반을 찾아서 최대한의 예를 갖추어 올린 것으로 만회를 했다.

49재를 이틀 앞둔 어제 대한문 옆 덕수궁돌담길 간이분향소는 아수라장이었다.

낯선 젊은이들도 눈에 띄고 용산참사현장에서 나온 범대위식구들이 분향소앞에 기습으로 천막을 친다는 이야기가 들리니 경찰이 분향소앞으로 향해 옆 골목으로 들어오는 차량을 일일이 검문하고 3개 중대정도의 전경들이

분향소 앞에 앉아 있는 60여명 정도의 동지들을 압박하여 몰아낸다.

또 남대문 경비과장이라는 자가 마이크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통행을 방해하니 벌금 20만원 또는 징역 몇 개월이다'라는 되지 못한 소리를 지껄인다.

이자가 바로 얼마 전 분향소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를 압박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이웃집아저씨가 죽었는데 장사를 지내고 나서 내가 좋다고 길거리에 나와 앉아도 있어도 되느냐”고 사복을 입었지만 계급은 과장이니까 경정(경찰서장인 총경보다 한 계급 낮은 무궁화 세 개)계급의 나이도 얼마 안 먹은 자가 거만하게 나에게 도로교통법 운운했던 자이다.

어제 내가 물었다. ‘지난번 내가 물었을 때 당신이 이웃집아저씨 운운했지요?’ 자기는 안했단다. ‘그래 전에도 얘기했지만 일제 시대 때 출세에 눈이 어두워 독립군 혀를 뽑았던 그 악독한 노덕술과 진배가 없는 네놈도 옆에서 들은 제대만하면 촛불을 들 양심있는 아들같은 전경들이 있으니까 증인으로 나타날 것이다. 반드시 네놈을 응징할 것이다‘라는 맘을 먹었다.

결국은 천막을 쳤는지 모르고 오늘 상식을 준비하기 위해 11시30분에 차를 타고 귀가하였다. 생각에 49재가 거행되는 내일 대한문 앞에서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내일은 상식에는 한번 만이라도 삼색나물을 올리겠다는 생각을 갖고 인터넷에서 요리법을 보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49재 D-1) 오늘은 어려운 일을 해결했으니 푹 자겠습니다.

마음 푹 놓고 잠 들어도 되겠습니다.

오늘 낮까지 마지막 상식을 올리는 내일 삼색나물을 한번 올렸으면 하고 끌탕만하고 있었습니다 나물 조리방법을 컴퓨터에서 출력하여 갖고 왔지만 만든다고 부산 떨다가 뜨거운 물에 덴다거나 엄두도 안 나기도 하여 대한문 앞에서 일찍 집에 들어와 그사이 내 대신 살림을 위해 일을 나갔다 들어 온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하여 해결했습니다.

‘49재 끝내고 봉화 다녀온 후 집안 꼴도 신경을 쓴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지난 6년동안 약속을 몇 번 했는지 기억도 없지만 내 아내는 속는 줄 알면서도

나물이 식은 후 냉장고에 보관하고 제단에 올릴 접시는 ........

어쨌든 오늘은 일찍 잠을 청해도 되겠습니다.

아들 녀석 헌주할 소주한병 사오라고 전화했더니 산사춘을 사왔고

그사이 탕에 넣을 다시마를 못 찾다가 오늘에야 찾았고

또 상주들을 다 불렀고 하니 내일 아침 늦잠만 안자고 일찍 일어나 메만 안태우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는 분은 작별인사 하러 참석하셔도 좋구요

49재날 아침

마지막상식을 올렸습니다.

여느 때와 달리 오늘은 눈치 안보고 오늘은 다시마를 찾아 탕을 끓이고

그리고 달그락소리도 내며 준비를 하였습니다.

오늘 따라 짐도 무거워 땀을 흘리면서 몇 분 늦게 도착하니

그사이 꽃 자봉을 했던 딸과 같은 윤선생이 삼색 나물을 걱정하는 것을 봤는지

나물을 가지고 일찍 도착하여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거기다 떡까지.........

상주4명과 윤선생 포함하여 5명이 상식상인지 제사상인지 구별 않고 한잔씩 올린 후 옆 효사정 정자에 앉아 물리신 수라상과 갖고 온 김밥으로 요기를 하고 거기다 음복까지한 후

영정을 모시고 대한문으로 왔습니다.

역시 경찰이 안 열어 놨더군요. 경찰과 협의끝에 49재를 허용한다니까 잠시 후 제단도 쌓고 준비를 해야 겠습니다.

마지막 보내드리는 길 많이들 나오셔서 작별 인사하셔야지요?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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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상님의 댓글

권종상 작성일

또다시, 눈물만 납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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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성님의 댓글

노재성 작성일

참으로 감동적인 글을 읽었습니다. 효사정을 복원한 장본인 노재성입니다.

한명회때 헐린 이후 500년만에 본인이 추진하여 서울시 건설본부에서 재정을 대고 신태진종합건설에서 시공을 해서 1993년에 복원했습니다. 후손으로서 할일을 했을 뿐입니다.

귀하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효심(?) 충성심(?)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존경심으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정성스런 메를 올린 49제 까지의 마음 감사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니까 절을 네번 해야하지요.

나는 봉화에 가서 시신앞에 술을 올리고 네번 절했습니다. 봉안하던날, 49제때 가서도 네번했습니다.

나와는 종친회 회장(노무현 회장권한대행), 나는 종무국장으로 전부터 여러번 뵈었지만 나이는 동갑이고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역대 왕, 대통령 중에서 국민과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그 분이 그렇게 가시다니
지금도 눈물이 흐릅니다.  수백만 아니 수천만 국민들의 눈물과 애도를 우리는 역사에 길이길이 기록하고 기억할 것입니다.  교하노씨효사정효덕효창회 노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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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성님의 댓글

노재성 작성일

교하노씨효사정효덕현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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