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을 제대로 아는 것이 통일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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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⑦
90년대는 범민련 시대로 3자연대 운동개막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이북 당국은 당국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에서의
통일정책도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남북 당국간 사이에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시기에는 해외동포들과의
연대활동에 관심을 갖고 실천해 왔다. 이번에는 일곱번째 연재글로 "90년대 범민련시대와 3자연대운동
개막"에 대해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⑥---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⑤---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④---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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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②---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①---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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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 2010-09-07]
민족통신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02-13 13:03:08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통일정책도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남북 당국간 사이에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시기에는 해외동포들과의
연대활동에 관심을 갖고 실천해 왔다. 이번에는 일곱번째 연재글로 "90년대 범민련시대와 3자연대운동
개막"에 대해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⑦ 90년대는 범민련 시대로 3자연대 운동개막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이북 당국은 당국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차원에서의 통일정책도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남북 당국간 사이에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시기에는 해외동포들과의 연대활동에 관심을 갖고 실천해 왔다. 이런 경우에도 이북 당국은 항상 민족자주의 원칙, 평화통일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해외동포들과의 통일운동 사업도 적극성을 보여왔다.
이 때문에 3자회의가 성사되지 못하고 남측 대표들과 해외측 대표들이 2자회의로 합의 한 사항들을 해외 측 대표들이 북측에 가서 마무리 합의를 통하여 3자 합의로 범민족대회를 치르기로 했다. 해외 측 대표들은 귀가하여 돌아가자 말자 즉시 준비하여 평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미주에서는 이행우와 노길남 2명이 대표로 가기로 했으나 이행우의 수속미비로 노길남 대표 1명만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에는 준비회의를 위해 유럽에서 임민식 이종현, 일본에서 양동민, 신기성, 그리고 재일총련 대표들, 재중대표들, 재소대표들이 1990년 8월6일과 7일 양일 동안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범민족대회 제3차예비접촉>을 갖고 남측에서 합의한 내용들을 가지고 토의한 후 제1차범민족대회를 개최하기로 고려호텔 별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내외에 선포했다. 이에 앞서 이를 위한 제1차 준비회담은 1990년 4월 일본 도꾜에서, 그리고 2개월 후인 1990년 6월2일과 3일 양일 동안 베를린에서 범민족대회 준비를 위한 실무회담, 7월3일에 일본 도꾜에서 범민족대회 촉진대회 등이 개최된 바 있었다. 이렇게 준비회담과 실무회담을 거쳐 평양에서는 1990년 8월14일 김일성 경기장에서 제1차범민족대회 전야제가 열렸고, 이곳에 참석하지 못했던 남녘에서는 연세대학에서 범민족대회를 지지하는 대회가 대규모로 열렸다.
이 행사를 통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결성하자는 제의가 합의되어 그 후에 해 내외 각 지역에 범민련 조직이 결성되어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 해외 3자연대 조직이 건설되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은 조국통일을 향한 남, 북 해외 온 겨레의 의지를 모아 지난 90년 11월20일 결성을 선포하였다. 90년 12월16일에는 해외본부(초대 의장 윤이상), 91년 1월25일에는 북측 본부(초대의장 윤기복)가, 91년 1월23일에는 남측본부 준비위원회(초대 위원장 문익환), 95년 2월25일 남측본부가 결성(초대 의장 강희남)되어 조국통일을 향한 남, 북, 해외의 목소리가 온전히 하나로 담기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범민족대회와 범민련 조직은 1991년 ▲제2차범민족대회를 서울서 개최하기 위해 그 준비회의를 독일 베를린에서 1991년 6월29일~30일 양일 동안 <의장단 회의>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1992년 ▲제3차 8.15범민족대회도 남한 당국의 반통일 정책으로 평양과 서울서 분산 개최되었다. 미주동포들을 포함한 해외동포들은 모두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 참석했다. 1993년 ▲제4차 범민족대회도 서울서는 한양대 교정에서 열렸고, 해외동포들은 평양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했다. 1994년 ▲제5차범민족대회도 서울에서는 김영삼 정권의 악질적인 탄압책동으로 2만여 명이 참가한 통일축제 행사를 페퍼포그와 체루탄으로 가로 막았으나 끈질긴 투쟁으로 폐막식을 가졌다. 이 행사기간 김영삼 정권은 2천4백여 명의 참석자들을 연행했다.1995년 제6차범민족대회는 남측본부(전창일, 이종린, 신정길)와 남측준비위(박순경, 함세웅, 이수갑, 황인성)간에 이견들을 교환하는 과정을 통하여 진행,
1997년 ▲제8차범민족대회도 분산개최되었다. 남측은 남측본부 신창균과 민족회의 이창복간에 회동이 있었으나 합의가 이뤄지지 못한 채 광주 조선대에서 대회가 진행되었고, 1998년 ▲제9차범민족대회는 범민련과 한총련을 중심으로 1천7백여 명이 서울대에 집결하여 범청학련 제8차통일대축전과 함께 범민족대회 행사가 진행되었고, 남측서 나창순, 서원철, 이성우, 강형구, 박기수, 황혜로 대표 참가 1999년 ▲제10차범민족대회도 서울과 평양에서 분산개최되었지만 평양에서 열리는 대회에 남측 대표들(나창순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서원철 청년대표, 이성우 전국연합 부산연합의장, 강형구 전국연합 부대변인, 박기수 전북노동자통일대녹두 집행위원장, 범청학련 황혜로 대표 등 6명)이 남한정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참석했다. 평양대회는 이들의 참석으로 뜨거운 분위기 속에 범민족대회 행사가 진행되었다. 해외동포들도 각 지역에서 대거 참석하여 이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민족통신》특파원이 1999년 5월 인터네트 일간언론으로 창간하여 평양행사를 직접 취재하여 현지 보도한 것은 이 통일대축전 행사(제10차 범민족대회)가 처음이었다. 이 보도를 통해 《민족통신》이 창간된 지 얼마 안된 기간에 남녘과 해외동포 사회에 빠른 속도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 1990년대는 북녘동포들로서는 가장 가슴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난 시대였다. 이북 당국자들과 동포들은 1994년 7월8일 이북의 최고지도자인 김일성 주석이 서거하자 슬픔에 잠겼고, 그 아픔이 채 사라지기도 전인 그 이듬해인 1995년 여름에는 한 세기에 한번 정도 오는 대홍수(큰 물난리)를 만났다. 북녘 땅에 농사 지을 수 있는 경작지의 75% 가량이 파괴되었다. 이북동포들은 이 같이 엄청난 자연피해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이른바 ‘동서냉전 시대’는 종말을 고했으나 소련과 그 위성국들이 제대로 진보사회를 건설하지 못하고 붕괴하는 바람에 이북 당국은 다른 진보나라들과의 교역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한층 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이북 당국은 또 설상가상으로 미국 제국주의 세력과 맞서 대결해야만 했다. 미제는 동서냉전이 끝난 시기를 악용하여 1극체제에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북압살고립 정책을 전개해 왔다.
특히 이남 당국이 미국에 의해 자유롭지 못한 구조적 모순관계, 즉 군사주권까지 미국에 의해 장악된 상황 때문에 남북관계가 원만히 이뤄졌어도 미국에 의해 제동이 걸리면 이남 정부 당국은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는 제한성을 갖고 있다. 이 문제가 가장 장애물이 되어 왔다는 것은 만인이 주지해 온 사실이다.
이북 정부 당국의 통일정책은 언제나 원칙들에 의거하여 반영되어 왔다. 그런고로 이북정부의 정책은 곧 조선 로동당의 정책이며 동시에 최고 지도자의 정책이기도 하다. 이북의 누구와 대화를 나누어도 “수령, 당, 인민대중은 일심동체”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원리는 곧 이북 당국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에서 비롯된다. (다음에 계속…) [VIDEO CLIP] SONG: KOREA IS 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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