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과 보수층의 러브스토리
페이지 정보
본문
주체사상 창시자 황장엽씨와 한국의 보수층은 단지 김정일 정권에 대한 비판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원수에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친구가 한 명 있다. 이 친구는 지금은 정치나 외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반 기업의 영업 일을 하고 있다. 그래도 대학교 전공이라는 것은 이력서에 항상 따라다니는지라, 정외과 나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안 상대방이 꼭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한다. “그럼 엄청 말씀을 잘하시겠네요” 혹은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아요?” 심지어는 “이번 미국 지방선거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같은 것들이다(물론 그런 방면으로 이 친구는 별로 아는 게 없다).
우리는 정치나 외교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것을 생각한다. 책상에 앉아 외교적 수사가 가득한 문서를 다듬는 사람, 그의 머릿속에는 국가의 정치적 역학 관계 혹은 국제 질서라는 큰 말판이 자리하고 있다. 대개 남자이고, 나이와 연륜이 꽤 있으며, 날카로운 눈매와 카리스마를 풍길 것이다.
그런데 그쪽 분야를 보면 볼수록, 평범한 남녀의 연애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치권 한 계파의 중견 정치인이던 아무개 의원이 몇 년 전 자기 파 보스를 안 좋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그 조직에서 배척당했다거나, 어떤 이는 다른 정치인의 제안을 공개적으로 반대해서 체면을 구기게 한 적이 있다거나, 공통의 적을 다 같이 욕하는 데 동참하지 않아서 섭섭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다. 가령 몇 해 전 송두율 교수 사건도 그랬다. 그 사건을 요약하자면 북한은 우리의 적인데 북한을 두둔한 송 교수에게 왜 함께 욕을 퍼붓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요컨대 뭔가 크고 거창한 일을 다루지만 그 작동 원리 같은 것은 상당히 ‘쫀쫀’하다는 이야기다. 기업은 이해관계로 협력 여부가 갈리지만, 정치인들은 과거 힘들 때 도움을 주었다거나 반대로 뒤통수를 때려서 체면이 상했다거나 하는 상호간의 ‘관계’가 상당히 중요하다.
북한 주체사상의 창시자 황장엽씨가 대한민국에서 훈장을 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국립현충원에까지 묻힌다는 다소 ‘쇼킹한’ 소식을 들었다. 많은 이가 지적하듯 황장엽씨는 남으로 망명한 뒤에도 자신의 사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며 집단이 개인에 우선한다는 것, 국가의 영광을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점을 최근까지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주체사상이 이렇게 쓰일 줄 몰랐다”라며 후회한 적은 있지만, 그건 사상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김정일 정권이 그 사상의 적용을 잘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4대강 사업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건설업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황장엽씨, ‘국가의 영광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일상생활에서 권장할 사항은 못 되지만) 제3의 인물을 같이 욕하면서 공감대를 나누는 것이다. 김정일 정권에 대한 비판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원수에서 사랑하는 사이가 된 황장엽씨와 한국의 보수층, 이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를 능가하는 극적인 러브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원수 집안의 아들과 딸로 태어난 태생적 한계밖에 없었지만, 우리가 목격한 황장엽판 러브스토리는 마치 원수 집안의 남편과 부인이 만나서 열렬한 불륜에 빠지고, 그것도 모자라 사후 가족 묘역에 안장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황장엽씨가 한국의 진보층을 비판했던 큰 요지는 (주체사상에서 가르치는 것과 일맥상통하게) 국가의 빛나는 미래, 강건한 국가주의 건설을 위해서 매진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방해한다는 점이었다. 대한민국(의 지배층)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지배층)이 겉으로는 죽일 듯이 싸우지만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 생각보다 그들의 공감대가 넓다는 것이야말로 이 러브스토리의 마지막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출처: 최내현 (출판인)
- 이전글통일부가 고용한 탈북자는 몇명? 달랑 1명! 10.11.02
- 다음글"확성기로 북한 비난하고 삐라 뿌려봐야 아무 소용없다" 10.10.1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