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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제대로 하는 것이 통일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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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주동포
댓글 0건 조회 3,599회 작성일 11-02-1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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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②

≪조국광복회≫는≪민족대단결의≫창조물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남녘 언론인들이나 지식인들, 그리고 자본주의 나라에 거주하는
해외동포들은 이북의 실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퍽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남녘의 어처구니 없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이북의 실상이 남녘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도 현실이었다. 그런가하면 이북에
대해서 그 정체성을 알고 있는 동포들도 알고 있는 지식을 마음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민족통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과정과 그 정체성을 알아보는 기획을 마련한
것이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이어 두번째 연재기획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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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인 규모의 ≪조국광복회≫가 1936년 5월5일 결성된 역사적인 날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②

≪조국광복회≫는≪민족대단결의≫창조물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공동]남녘 언론인들이나 지식인들, 그리고 자본주의 나라에 거주하는 해외동포들은 이북의 실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퍽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남녘의 어처구니 없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이북의 실상이 남녘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것도 현실이었다. 그런가하면 이북에 대해서 그 정체성을 알고 있는 동포들도 알고 있는 지식을 마음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북을 아는 사람이 사실을 말해도 친북이니 빨갱이니 하면서 불이익을 당해 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해야 한다. 그래서 <민족통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과정과 그 정체성을 알아보는 기획을 마련한 것이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이어 두번째 연재기획을 소개한다.

이북 정부 수립의 뿌리는 그 전통과 정통성이 우리 민족의 반외세 자주 투쟁의 정신이 어려있는 역사 깊은 항일투쟁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뿌리는 또 우리 민족의 진보운동사에서 기둥이 되는 조선공산주의 청년운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항일투쟁사가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초가 되었다.

전국규모의 각계 각층 대표들이 모여 조직된 ≪조국광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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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시 백두밀림에서 최후공격전을 지시하는 김일성 주석(1945.8.9)
김일성 주석은 항일투쟁을 벌이면서 가장 강조하여 온 것은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이었다. 그 중에 가장 괄목할만한 조직이 ≪조국광복회≫ 였다. 이 조직은 1936년 5월1일부터 보름동안 무송현 동강의 수림속에서 각계 각층의 대표들로 묶어진 전국적 규모의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 평가받는다.

≪조국광복회≫ 창립선언문에서도 김일성 주석의 ‘민족대단결 철학’이 반영된다. 여기에서도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식량있는 사람은 식량을 내고, 기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지혜를 바치며 2천만 민중이 일심동체가 되어 반일조국광복전선에 총동원된다면 민족의 해방과 독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김일성 주석의 의지가 발견된다. 이 창립 모임에 참석한 모든 대표들은 그의 민족해방 철학에 모두가 감동과 감격을 받고 그의 두리에 뭉친다.

이러한 조직이 결성되기 몇 년전에 유사한 조직으로 우리가 많이 들어 온 <신간회>가 있었으나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신간회’는 1927년 2월 조직되어 1931년 5월까지 운영되어 왔으나 일제의 음해책동을 물리치고 조직을 능숙하게 운영해 나 갈 중추적 지도역량이 부재한 탓으로 불행하게도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한 과정의 연장 선상에서 전국규모의 반일민족통일전선체로 부상한 조직이 바로 ≪조국광복회≫이다.

또한 ≪조국광복회≫를 견인할 기관차로서 ‘반일인민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조직되어 백두산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로써 반일민족해방 투쟁의 사령부가 자리잡은 강력한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조직력 때문에 김일성 주석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은 그 이듬해인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한다. 이 소식은 당시 동아일보 뿐만아니라 해 내외 동포들의 입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소식을 들었던 당시의 우리 동포들은 “역시 김일성 장군”하면서 기쁨으로 충만했다.

≪조국광복회≫역량 확대사업에 동분서주한 김정숙 항일여성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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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광복회≫확대를 위해 동분서주한 김정숙 항일여성투사
≪조국광복회≫ 활동 영역과 그 역량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재생산 되었다. 김정숙 항일여성투사의 활약도 눈부시게 돋보였다. 장백현 도천리 지구와 17도구, 신파지구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꾸리고 신파지구를 발판으로 하여 장백현 일대에 반일청년동맹, 반일부녀회, 반일노인회, 반일소년회 등 계층별 조직을 확대하면서 이 일대의 대중을 포섭하여 '조국광복회'에 끌어 들이기 위해 김정숙 항일여성투사는 동분서주하였다.

김정숙 투사는 또 풍산지구의 천도교인들을 반일운동에 포섭하는 한편 지난 시기 ‘신간회’에 깊이 참여하였다가 쉬고 있던 리주연(후에 북 공화국 내각 부수상 역임) 등을 만나 단천지구에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했고, 차호지역에서 리준 열사의 아들 리용(후에 북 공화국 내각 초대 도시경영상 역임)을 설득하여 그가 운영해 오던 ‘반일회’를 ‘조국광복회’에 편입시켰고, 북청지역에서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활동에 관여하였던 리영(북 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 역임)을 만나 사업하여 그를 ‘조국광복회’에 가입시켰고, 이어서 강원도, 평남도, 경상북도 일대에 이르기까지 조직망을 확대시켜 나가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또 함경남도 노조, 농조들을 수습하여 ‘조국광복회’ 조직을 강화하는데 기여하면서 김일성 주석의 “조국광복회”사업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조국광복회≫는 그 이후에도 함경남도 대부분 지역과 강원도 철원, 평강, 평안북도의 후창, 동흥, 신의주, 평안남도의 평양, 남포, 경기도의 서울, 인천, 경남 부산 등지에 그 뿌리를 내렸고, 이 불길은 일본 땅에까지 번졌다. ≪조국광복회≫, 이 조직은 김일성 주석을 비롯하여 김정숙 항일여성투사 등이 종자를 묻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한 그야말로 ≪민족대단결의 ≫ 위대한 창조물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역량들에 기초하여 1940년대에 들어 와서는 일제를 향해 전면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1943년 7월 함북 은덕군(경흥군) 록야리 곰산에서 열린 곰산회의 방침에 따라 ‘조국광복회’를 중심으로 전국 도처에서 반일 전면무장항쟁을 개시하도록 치침을 주었다. 그는 1945년 6월 간백산 밀영 군정간부회의에서 8월8일 조선인민혁명군의 대일작전 개시를 선포하고, 8월9일 최후 공격명령을 내렸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조국광복회’산하 모든 조직들을 동원하여 만주와 조선관 내를 맹렬하게 공격하여 일제를 괴멸하는데 혁혁한 승전고를 기록했다.

이러한 항일 투쟁을 통하여 축적한 역량이 있었기 김일성 주석은 1945년 8.15 이후 또 다른 외세에 의해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는 시기에 돌입하자 남과 북 각계 각층 대표들을 불러 통일정부를 호소하며 민족통일전선을 강조했다. 그는 1946년 7월22일 민주주의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이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위원회에는 진보정당을 비롯한 4개 정당과 13개 대중단체 대표들이 6백만명의 회원들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 김일성 주석은 남녘에 거주하는 인사들에게 친히 편지를 보내어 ‘민족대단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비롯한 극소수의 사대주의 진영은 이러한 통일정부를 반대하면서 미국 지배세력에 기생하여 통일정부를 거부하고 단독정부, 단독선거에 매달리면서 민족주의 세력들을 탄압하고 살해하는 반역행위들을 서슴치 않았다. 그 과정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은 1947년 7월19일 서울 한복판에서 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김일성 주석은 애국자 여운형 선생과 각별한 관계였다. ‘조국광복회’를 조직할 때에도 함께 활동하였지만 그 후에도 조국의 해방과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하였던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민족자주 사상>과 <민족대단결 사상>이 두분의 관계를 맺어 주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으로 조국반도에는 민족세력대 반민족 세력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민족세력에는 진보사상, 민족사상, 반일사상을 가진 지도자들이 그리고 반민족 세력에는 이승만을 비롯한 소수의 친미사대주의 사상에 젖은 인물들과 과거 일제시대 친일사대주의를 지향하면서 우리 민족 성원들을 괴롭혀 왔던 인물들이 가담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와 함께 조국반도 남녘에는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간 채 반민족 세력이 미국의 지배세력에 편승하여 정치권력을 쥐게 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여기에 백범 김구 선생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민족주의 세력과 진보진영 세력들은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통일정부를 부르짖기 시작한다. 바로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북녘의 김일성 주석은 1948년 4월 역사적인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소집한다. (다음에 계속…)

[동영상]

***김일성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기획]이북정부와 그 정체성을 알아본다①---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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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입은 삐둘어도 말은 바로하자⑩---<남북 각 분야별 현주소들>...여기를 짤각해 열람!
***[특집연재]일본과 미국에 희생당한 코리아⑦...여기를 짤각해 열람!

[출처 : 민족통신 편집위원 공동 2010-09-03]

민족통신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1-02-13 13:03:08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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