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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조국 방문기 3. 선양에서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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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634회 작성일 14-09-26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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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3


선양에서 만난 사람


인천에서 선양으로 가는 비행기는 얼마간의 빈 좌석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승객들이 참 많다.  국제선이라서인지 점심으로는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맛있는 기내식으로 잘 요리된 닭고기와 밥, 그리고 빵과 약과도 나온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모두 비웠다.   비행 시간은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1시간 4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날씨가 흐린데다 창가에 앉지 못하여 착륙 전에 광활한 만주벌판을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지만 선양에 다가갈수록 우리 선조들이 고조선 시대와 그 이전부터 이 넓고 광활한 대륙에서 말달리며 살아온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나를 이루기까지 이어온 그 선조들이 어디서 살았는지를 자꾸 거슬러올라가면 결국 오랫 동안 그들이 살던 땅은 바로 이곳 드넓은 만주벌판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고대로부터의 역사를 생각하니 감회에 벅차다.  이 넓은 땅을 모두 잃은데다 한반도마저 지금은 반으로 나눠져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양 공항에 도착하여 제법 긴 여정을 위하여 준비한 큰 가방을 찾아서 나오니 세관에서 열어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미 나라와 나라 사이의 장벽이 많이 무너졌고  사람들의 짐 또한 그 부피가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국경을 초월하여 무역이 활발해진 덕분에 이젠 먼 곳에 여행했다가  물건들을 잔뜩 사오는 경우가 점점 사라지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십 년 전, 내가 미국으로 온 가족이 이민을 떠날 때 제대로 들 수도 없었을 만큼 무거웠던 이민 보따리를 떠올리며 웃음을 머금는다.  이번 여행은 제법 긴 여행이라 큰 가방을 새로 구입하여 갈아 입을 옷을 많이 챙겨왔는데도 겨우 절반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은 상태다.  내 가방이 크긴 하지만 북부조국과 미국 사이엔 무역이 없으므로 내가 북부조국에서 무엇이든 구입하게 될 경우 그건 아주 귀중한 물품이 되며, 내 가방 안에 넣을 공간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하지 못해 애를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게다가  아주 좋은 바퀴가 달려있어 별로 힘들이지 않고서도 밀고 다닐 수 있어 다행이다.


카트에 짐을 실어 밀고 나오니 약속대로 로스앤젤스 민족통신을 운영하시는 노길남 박사님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나를 향해서 카메라를 들이대고는 사진을 찍어주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환영받는 주인공을 볼 때처럼 난생 처음으로 공항에서 나를 마중나와 사진을 찍고 환영해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몸둘 바 모르도록 한다.  박사님은  푸른 색깔의 한반도 기를 꺼내서 내가 들게하고 사진을 찍어주신다.  박사님도 함께 찍자하고는 곁에 섰던 중국인에게 요청하여 나란히 한반도 기를 펼쳐 들고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생각해보니 노길남 박사님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이제부터 이곳 중국 선양 땅에서 비로소 북부조국을 찾는 나의 공식 일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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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박사님이 중국에 오실 때마다 사용하신다던 핸드폰에 뭔가 잘못 눌러져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를 공항에서 호텔까지 태워다줄 이곳 젊은 동포에게 김 씨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어 여기저기 전화기를 빌려줄 만한 분을 물색하다가 어떤 한국말이 통하는 조선족 동포에게 부탁하여 겨우 전화를 하여 동포 김씨의 차를 타고 선양 시내로 향했다.  


선양 공항 인근의 한적한 풍경들이 점점 새로 짓는 빌딩들로 바뀐다.  엄청나게 많은 빌딩 숲이 새로 건설되고 있다.  생각보다 선양은 아주 큰 도시다.  중국에서 5대 도시 가운데 들어갈 만큼 큰 도시인 것이다.  새로 공사를 하면서 도시가 확장되어가는 곳은 활기에 넘치는 곳이다.  미국 어느 도시 가운데 저렇게 거대한 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서는 곳이 있던가?  도시로 몰려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선 이렇게 아파트 건설이 활발히 이뤄져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로 짓는 60층 건물이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동포 김씨가 말해준다.  높고 크고 웅장한 건물을 볼 때마다 카메라를 줄곧 눌러대었다.  


한편으로 지금 막 지어진 저 수많은 아파트들이 팔리지 않게 되어 모두가 어렵게 되었다고 이야기해준다.  중국 정부에서 갑자기 주택융자 받는 것을 까다롭게 했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에서 2008년에 일어났던 일이 이제 여기서도 재현되는 듯하다.  융자를 너무 쉽게 풀어주어 능력에 닿지 못하는 사람들이 집을 구입하게 되었을 때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은 너무도 명확하다.  매월 상환금을 은행에 갚지 못하면 결국 은행에서 그 집을 차압하게 된다.  그러니 융자를 까다롭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편 미화로 십 만 달러가 되는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주 제한되어 있는데 융자마자 까다로워졌으니 이제 활발하게 건축하던 아파트 공사는 주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의 미국처럼 새 건물을 짓는 것이 아주 드물게 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없으면 집을 소유할 수 없다.  내가 북부조국에서 살펴보고 싶은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주택문제인 것이다.  그래 중국의 현실 또한 운전하는 동포를 통하여 이렇게 잠깐 살펴보는 것이 내 생각을 정리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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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 씨타는 (서탑이라는 의미)이곳 선양에서도 코리아타운이라 불릴만 할 정도로 한인들이 모여 상가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선양에서 가장 큰 간선도로로 오다가 씨타로 오기 위해서 옆길로 들어섰는데 그 길도 차들과 사람들이 빼곡하다.  자전거에 오토바이들도 많이 붐빈다.  씨타의 거리는 제법 휘황한 간판들과 함께 사람들로 북적인다.  작은 시장골목도 있어 꼭 한국의 장터같은 풍경이다.  저앞에 우리가 찾는 호텔 간판이 보인다.  내가 중국에서 환전할 새가 없었기에 노 박사님이 차비와 내가 묵을 호텔비를 계산하신다.  얼른 환전해서 갚아드리고 앞으로의 이런 비용은 내가 부담해야겠다.  


노 박사님은 서울에서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이 이곳 선양에 와서 7년 만에 상봉하여 어제부터 함께 계신다고 하셨기에 짐을 풀고 호텔 방을 나와서는 박사님의 동생 분을 반갑게 만났다.   


호텔 밖엔 갑자기 아주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 두 개를 빌려서 나와 노 박사님 동생이 같이 쓰고, 카메라를 챙긴 노 박사님이 작은 우산을 받쳐 들었다.  먼저 환전하는 곳을 찾아갔더니 문을 닫았다.  노 박사님이 그곳 동포에게 물어 다시 원씨가게란 곳을 찾았더니 환전이 가능하다고 한다.  백 불에 613원이니 중국 인민폐와 미화는 대략 6대 1로 계산하면 되겠다.  

다시 빗속을 걸어 백 미터쯤 갔을까?  목란관이라는 이곳 조선족이 운영하지만 북부조국에서 파견된 접대원들이 봉사하는 식당을 찾았다.  내가 박사님과 그 동생분을 위하여 저녁을 내기로 했는데 이왕이면 북부조국 여성들이 공연도 하는 곳이라해서 이곳으로 정한 것이다.  아리따운 안내원이 2층으로 안내해주는데 제법 넓은 홀은 아주 화사한 색상으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밝은데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조선의 여성들이 우릴 반겨준다.  


메뉴에서 4가지 음식을 고르고 맥주를 주문했다.  소 갈비살, 찐 돼지고기 살, 조기구이, 그리고 넉넉한 양의 평양 배추김치다.  깔끔하고 정갈하게 나온 음식이라 사진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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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의 박사님 동생은 오랫동안 노 박사님이 미국에 가서는 자신이 어려운 가운데 있어도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7년 전 박사님이 서울에 나가셨다가  터놓고 통일운동을 한다는 것을 설명해주니 그런 귀한 일을 하면서 왜 이제서야 알려주는가고 했다고 한다.  박사님은 동생이 형이 하는 일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 지레짐작하고는 미국에서 돈 잘 벌며 살아온 것이 아니라 통일운동을 하느라 서울에서 고생을 하는 동생을 잘 돌보지도 못하였노라는 것을 말하지도 못하며 오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생은 형의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마음을 열고 이해해주었다는 것이다.  아니, 형님이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는데 당연히 동생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누가 하겠느냐면서 형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박사님은 동생이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것을 아셨다면 진작 속시원하게 터놓을 것을 하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듣고 보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 또한 세 동생이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이번 여행에 대하여 알려주지도 않았다.  나이 오십줄인 동생들인데 이해를 하던 않던 간에 일단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강원도가 고향인 박사님이 겨우 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기에 고학으로 그 어려운 시절에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시위에 앞장섰던 노 박사님이 1973년에 정권의 탄압을 피하여 미국으로 유학 길을 떠났고 이후 80년대부터는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때까지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동생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 형이지만 아버지처럼 여기며 살았다고 했다.  노동자로서, 트럭 운전에 택시 운전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 삶 또한 녹녹치 않았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런 그가 어찌 형에 대한 원망이 없었으랴.  미국에서 잘 살면서 동생을 돌아보지도 않고 있다는 오해도 할 수 있었으리라.  한데 그 형님은 이렇게 미주 지역에서 큰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독립운동하던 조상들이 그 가족들을 잘 보살피지 못하였듯이, 우리 조국의 통일을 위해 민족통신을 운영하며 북부조국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운동을 하고, 재미 동포들이 북부조국을 찾을 수 있도록 그 다리 역할을 하면서 통일운동에 자신의 모든 시간과 재산을 쏟아부어온 것이다.  


그렇게 형제애를 다시 찾은 두 분에게 잔을 올렸다.  지금이 7년만에 상봉한 두 분에겐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아니랴?  기념으로 사진도 찍어 드렸다. 

 

노길남 박사님은 몇 년 전에 북부조국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는데 그동안 60여차례나 북을 오가면서 통일운동을 해오셨다.  지난 봄엔 7순 생일잔치상을  뜻밖에도 북부 조국을 방문하였다가 받으셨고, 그동안의 통일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김일성상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이 기쁘고 영예로운 일을 그분을 아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축하해주었으니 박사님은 올해가 참으로 행복한 해인 듯하다.  이왕이면 한국 정부에서도 노길남 박사께 통일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수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도 사정은 그 반대로 노길남 박사님이 운영하는 민족통신은 이명박 정권 이후 한국 정부에서 차단해서 한국에선 인터넷으로 열람할 수조차 없도록 만들어놓았다. 


나와 박사님의 인연은 그렇게 차단당한 민족통신 기사들을 내가 동지 한 분과 함께 운영하는 hanseattle.com 에 수년 전부터 박사님이 올려서 널리 알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알고 보니 나와 박사님의 인연은 더 이어져 우리는 똑같은 한 분의 통일운동의 스승을 두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3086661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0-01 11:56:41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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