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통일을 두려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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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나쁜 것인가? 얼마 전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가운데 약 80%의 응답자가 통일을 기대한다고 대답했다. 다른 한편 약 80% 응답자가 통일은 다음 세대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통일은 지지하지만, 지금 당장 이루어지기는 원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통일 과정에서 발생할 경제적 부담을 우려하는 듯 하다. 이런 여론을 반영한 듯 얼마 전 이명박 정부는 공개적으로 '통일 비용'을 해결하기 위한 '통일세'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세에 대한 여론은 그다지 높지 않다. 왜 그럴까?
독일인은 통일은 원했나?
1989년 10월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기 약 6개월 전 독일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 통일을 기대한다는 응답은 약 15%에 불과했다. 당시 독일인 대부분은 통일을 기대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의 자유주의 지식인과 사회주의 정당은 대개 통일을 두려워했다. 올해 5월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개최한 통일 세미나에서 베르너 페니히 교수는 "독일의 지식인들은 독일 통일이 거대한 국가와 권위주의 체제의 부활을 이끌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독일 통일은 정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혁명처럼 이루어졌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은 통일보다 사실상 분단현실을 인정하는 현상유지를 목표로 추구했다. 베를린자유대학의 만프레드 빌케 교수는 "1950-60년대 기민당 정부의 통일정책은 주로 동독의 체제전환과 화폐통합을 고려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동방정책을 추진한 사민당 정부에서 사실상 통일 정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빌케 교수는 "갑작스러운 통일이 일어나자 통일 계획을 찾아 정부의 서류함을 열었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이 헛된 노력은 아니었다. 동방정책을 통해 동독과 서독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독일인이 하나의 국민이라는 신념이 널리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통일을 기대하지 않았던 동서독 정부 당국자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극적인 독일 통일 과정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신뢰 쌓기
독일 통일은 기본적으로 독일이 같은 국민이라는 신뢰 속에서 가능했다. 브란트 정부의 동방정책은 독일 통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서독 사이에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하나의 국민이라는 연대감과 동질성이 강화되고, 정부와 민간 차원의 대화도 증가했다. 동독과 서독은 통일 전에 600만 명이 서로 방문했다. 서독은 동독에 다양한 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동독의 인권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다. 서독은 동독의 망명자를 받아들였으며, 서로 파견한 간첩을 교환하기도 했다. 동독도 서독과 교류를 통해 동독의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적 지원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구동독 지역이었던 바이마르 고전 재단에서 만난 엘리히 교수는 "동서독 사이의 문화 교류가 통일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민간조직인 괴테 게젤샤프트(괴테 연구회)는 동독과 서독의 괴테 연구자가 한데 모여 다양한 대화와 토론을 벌였다. 비록 울브리히트와 호네커 시절의 동독 정부는 괴테에 대한 연구를 통제하고 사실상 마르크스주의 해석만 강요했지만, 괴테 게젤샤프트는 분단을 초월하여 괴테 연구를 통해 독일의 문화유산을 공유했다. 심지어 동독의 저명한 연극 연출가인 하이네 뮬러가 서독에서 괴테의 '파우스트' 공연을 주도했다.
엘리히 교수는 남북 언어 동질성 회복을 위한 고은 시인의 관심에 큰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분단 시절 정치군사적 대립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민간차원의 교류를 통해 하나의 국민이라는 믿음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한 점이라 볼 수 있다. 만약 서로 하나의 국민이라는 신뢰가 없다면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주변국과 긴밀한 외교적 협력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급격한 통일이 일어났다. 이 순간 서독의 콜 정부는 동독의 자결권을 선언하고, 주변국의 개입을 막고 동독과 서독이 주도하여 통일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동독 주민들도 즉각적 통일을 원했다.
콜 정부는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승전국으로서 독일의 운명을 결정한 미국, 영국, 소련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했다. 독일이 강대국으로 다시 부상하는 것을 경계하는 서방 국가의 의구심을 누그러뜨리는 외교 전략이 필요했다. 당시 통일에 반대한 영국 대처 총리는 "우리는 두 번 독일과 싸워 이겼다. 그들이 다시 일어나려고 한다"는 표현으로 영국인의 심경을 표현했다. 심지어 "우리는 독일을 너무 사랑하기에 두 개의 독일을 원한다"고 말했다.
동독의 배후에 있는 소련이 더 큰 문제였다. 당시 동독에는 10만 명이 넘는 소련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서독의 콜 총리에게 소련에게 경제원조를 제공하는 계획을 제안했다. 콜 총리는 소련의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과 비밀협상을 통해 통일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 후 1990년 9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대독일 화해조약'에 조인함으로써 독일의 통일이 외교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통일기금과 연대세
독일은 통일 과정에서 막대한 돈을 지출해야만 했다. 통일 직후 아무런 계획도 없었던 콜 정부는 6개월 후에야 화폐통합을 결정했다. 동시에 독일통일기금을 만들었으며 그 후 거의 1조 7000억 유로를 달하는 돈을 지출했다. 독일 국민은 통일 후 20년 동안 '연대세'를 납부했다. 다른 한편 통일 이전부터 서독 정부가 동독을 지원하는 상당수의 차관을 제공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에 대해 당시 서독 내부의 강한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통일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차관 제공이 통일 과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를 내린다.
반면에 통일 이후 독일 정부의 정책결정에는 심각한 문제도 발생했다. 화폐 통합은 독일 경제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동독 화폐를 1대 1로 절상하는 정책으로 동독 지역의 인건비가 급상승하면서 산업이 거의 몰락했다. 동독 지역의 신탁관리청은 8500개의 국영기업, 국영 도소매 서비스 산업, 정부와 통일사회주의당(SED)이 소유한 부동산, 인민협동농장(LPG)를 사유화하는 결정을 내렸다. 국영부문이 고용한 노동자는 410만 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45%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대다수가 직업을 잃었다. 동독 지역의 실업률이 20%를 넘어서면서 극우파 네오나치가 등장하는 등 사회불안이 매우 심각해졌다.
독일의 통일기금의 대부분이 경제재건에 투자되는 대신 사회보장 예산으로 지출했다. 통일 당시 협정에서 서독의 사회보장을 동독에 적용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절반 액수가 연금 등 사회보장비용으로 지출된 반면, 사회기반시설을 위한 투자와 기업보조금은 매우 적었다. 동독의 생산성은 서독의 20% 수준이었으며, 공장 설비는 너무 노후해 형편없었다. 당시 구공산권 진영에서 가장 산업이 발전한 국가라는 평가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그 후 동독 지역의 경제재건에는 많은 예산과 시간이 필요했다. 1990년대 동독 지역의 실업율은 서독 지역보다 높았으며 경제격차는 상당히 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독 지역의 임금 수준은 예전에 비해 빠르게 향상되었고 생활수준의 격차도 줄어들었다.
구동독 지역은 부활하는가?
나는 구동독 지역의 드레스덴에서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리일 회사라는 화장품을 생산하는 기업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독일 제국 시대에 창업한 리일은 분단 이후 동독 정부가 관리했다가 다시 민간기업이 되는 풍상을 겪었다. 서독인 출신 사장은 "통일 이후 신탁청을 통해 기업을 매입한 서독 투자자가 리일의 전통을 고려해 과거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대다수 구동독 주민들도 서독 제품을 선호하던 시기이어서 동독 기업의 이미지로 사업에 성공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점차 기술개발과 시장확대를 통해 기업은 회생했으며 동독 출신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아직도 독일 대기업 이사회에 동독 출신 기업인이 적지만, 많은 동독 사람들이 시장경제에 적응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상당수의 독일 학자들은 북한에 투자한 한국 기업이 입주한 개성공단과 같은 전무유무한 실험을 매우 주목하고 있다.
동독 경제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드레스덴은 과학도시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교육과 연구개발을 위한 많은 기술대학과 연구소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신속하게 폭스바겐 뿐 아니라 첨단산업 유치에 나섰다. 독일 정부도 동독 지역 재건의 상징적 의미를 고려해 드레스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드레스덴에서 만난 한 공무원을 만났는데, 그는 해외기업의 투자유치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드레스덴은 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다시 복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말했다. 통일 직후 우수한 인력이 빠져나가고 자본이 부족했지만, 작센주의 수도이자 통일 이전부터 반도체 산업의 중심지였던 역사적 전통은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은 좋은 것인가?
독일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통일 이후 많은 고통과 혼란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사람이 똑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드레스덴 시청에서 일하는 한 젊은 공무원은 "세대에 따라 평가가 다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인 세대는 자신의 과거가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중년 세대는 새로운 기회를 많이 얻었다"고 평가한다. 한편 젊은 세대는 통일 이전의 시대를 전혀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동독 시절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다. 실제로 베를린자유대학 이은정 교수는 "오랫동안 동독 지역에서 젊은 대학생을 만났지만 아무도 동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제 동독인과 서독인이라는 정체성 대신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이 젊은이들 사이에 커지고 있다. 이제 동독인은 더 이상 영화 '굿바이 레닌'(2003)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을 숨기려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통일은 인정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있다.
다른 한편 통일 직후 동독 공산주의 시절의 건물과 시설이 철거되고 서독인의 '승자 심리'가 동독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동베를린의 교통신호기의 상징인 '암펠만'이 서베를린에도 등장했다. 동독인들의 사라져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 시민운동을 벌인 결과이다. 심지어 DDR(독일민주공화국) 박물관도 등장했다. 이를 동독인의 노스탈쟈(오스탈쟈)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과거 동독 시절의 삶이야말로 자신들의 과거의 이야기(서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독과 서독의 통일은 단순히 영토의 통합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에 살고 있다는 의식과 가치의 통합 역시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통일은 단순히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내부 식민지화'에 불과할지 모른다. 독일 메르켈 총리 역시 "통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연하게도 진정한 사회통합이 없다면 '내부 통일'이 이루어지는 대신 '또 다른 분단'이 지속될 것이다.
어떤 통일을 준비하는가?
2011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은 베를린자유대학을 방문하면서 "통일 준비를 잘 해야"한다고 말했다. 정말 통일을 준비하다면 무엇보다도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국민이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념과 체제의 경쟁이 아니라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실질적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둘째,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남북간 대화를 재개하는 한편, 주변국들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냉전시절에도 동서진영은 지속적으로 군축과 평화 회담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통일을 위한 재정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하지만, 통일 비용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안 된다. 분단 비용이 통일 비용보다 훨씬 큰 것은 말할 나위없다. 독일의 통일은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이루어졌지만, 사실상 통일을 위한 노력은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통일은 단지 완수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아주 오랜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독일인은 통일은 원했나?
1989년 10월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기 약 6개월 전 독일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 통일을 기대한다는 응답은 약 15%에 불과했다. 당시 독일인 대부분은 통일을 기대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의 자유주의 지식인과 사회주의 정당은 대개 통일을 두려워했다. 올해 5월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개최한 통일 세미나에서 베르너 페니히 교수는 "독일의 지식인들은 독일 통일이 거대한 국가와 권위주의 체제의 부활을 이끌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다"고 지적했다.
독일 통일은 정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혁명처럼 이루어졌다. 1960년대 후반 이후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은 통일보다 사실상 분단현실을 인정하는 현상유지를 목표로 추구했다. 베를린자유대학의 만프레드 빌케 교수는 "1950-60년대 기민당 정부의 통일정책은 주로 동독의 체제전환과 화폐통합을 고려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동방정책을 추진한 사민당 정부에서 사실상 통일 정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빌케 교수는 "갑작스러운 통일이 일어나자 통일 계획을 찾아 정부의 서류함을 열었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이 헛된 노력은 아니었다. 동방정책을 통해 동독과 서독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독일인이 하나의 국민이라는 신념이 널리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통일을 기대하지 않았던 동서독 정부 당국자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극적인 독일 통일 과정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일 3.1절 기념사를 통해 "언제든, 열린 마음으로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북한의 '진정성'있는 자세 변화를 촉구했다. ⓒ청와대 |
하나의 민족이라는 신뢰 쌓기
독일 통일은 기본적으로 독일이 같은 국민이라는 신뢰 속에서 가능했다. 브란트 정부의 동방정책은 독일 통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서독 사이에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하나의 국민이라는 연대감과 동질성이 강화되고, 정부와 민간 차원의 대화도 증가했다. 동독과 서독은 통일 전에 600만 명이 서로 방문했다. 서독은 동독에 다양한 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동독의 인권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다. 서독은 동독의 망명자를 받아들였으며, 서로 파견한 간첩을 교환하기도 했다. 동독도 서독과 교류를 통해 동독의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적 지원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구동독 지역이었던 바이마르 고전 재단에서 만난 엘리히 교수는 "동서독 사이의 문화 교류가 통일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민간조직인 괴테 게젤샤프트(괴테 연구회)는 동독과 서독의 괴테 연구자가 한데 모여 다양한 대화와 토론을 벌였다. 비록 울브리히트와 호네커 시절의 동독 정부는 괴테에 대한 연구를 통제하고 사실상 마르크스주의 해석만 강요했지만, 괴테 게젤샤프트는 분단을 초월하여 괴테 연구를 통해 독일의 문화유산을 공유했다. 심지어 동독의 저명한 연극 연출가인 하이네 뮬러가 서독에서 괴테의 '파우스트' 공연을 주도했다.
엘리히 교수는 남북 언어 동질성 회복을 위한 고은 시인의 관심에 큰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분단 시절 정치군사적 대립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민간차원의 교류를 통해 하나의 국민이라는 믿음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한 점이라 볼 수 있다. 만약 서로 하나의 국민이라는 신뢰가 없다면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주변국과 긴밀한 외교적 협력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급격한 통일이 일어났다. 이 순간 서독의 콜 정부는 동독의 자결권을 선언하고, 주변국의 개입을 막고 동독과 서독이 주도하여 통일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동독 주민들도 즉각적 통일을 원했다.
콜 정부는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승전국으로서 독일의 운명을 결정한 미국, 영국, 소련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했다. 독일이 강대국으로 다시 부상하는 것을 경계하는 서방 국가의 의구심을 누그러뜨리는 외교 전략이 필요했다. 당시 통일에 반대한 영국 대처 총리는 "우리는 두 번 독일과 싸워 이겼다. 그들이 다시 일어나려고 한다"는 표현으로 영국인의 심경을 표현했다. 심지어 "우리는 독일을 너무 사랑하기에 두 개의 독일을 원한다"고 말했다.
동독의 배후에 있는 소련이 더 큰 문제였다. 당시 동독에는 10만 명이 넘는 소련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서독의 콜 총리에게 소련에게 경제원조를 제공하는 계획을 제안했다. 콜 총리는 소련의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과 비밀협상을 통해 통일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 후 1990년 9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이 '대독일 화해조약'에 조인함으로써 독일의 통일이 외교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통일기금과 연대세
독일은 통일 과정에서 막대한 돈을 지출해야만 했다. 통일 직후 아무런 계획도 없었던 콜 정부는 6개월 후에야 화폐통합을 결정했다. 동시에 독일통일기금을 만들었으며 그 후 거의 1조 7000억 유로를 달하는 돈을 지출했다. 독일 국민은 통일 후 20년 동안 '연대세'를 납부했다. 다른 한편 통일 이전부터 서독 정부가 동독을 지원하는 상당수의 차관을 제공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에 대해 당시 서독 내부의 강한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통일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차관 제공이 통일 과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를 내린다.
반면에 통일 이후 독일 정부의 정책결정에는 심각한 문제도 발생했다. 화폐 통합은 독일 경제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동독 화폐를 1대 1로 절상하는 정책으로 동독 지역의 인건비가 급상승하면서 산업이 거의 몰락했다. 동독 지역의 신탁관리청은 8500개의 국영기업, 국영 도소매 서비스 산업, 정부와 통일사회주의당(SED)이 소유한 부동산, 인민협동농장(LPG)를 사유화하는 결정을 내렸다. 국영부문이 고용한 노동자는 410만 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45%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대다수가 직업을 잃었다. 동독 지역의 실업률이 20%를 넘어서면서 극우파 네오나치가 등장하는 등 사회불안이 매우 심각해졌다.
독일의 통일기금의 대부분이 경제재건에 투자되는 대신 사회보장 예산으로 지출했다. 통일 당시 협정에서 서독의 사회보장을 동독에 적용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거의 절반 액수가 연금 등 사회보장비용으로 지출된 반면, 사회기반시설을 위한 투자와 기업보조금은 매우 적었다. 동독의 생산성은 서독의 20% 수준이었으며, 공장 설비는 너무 노후해 형편없었다. 당시 구공산권 진영에서 가장 산업이 발전한 국가라는 평가는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그 후 동독 지역의 경제재건에는 많은 예산과 시간이 필요했다. 1990년대 동독 지역의 실업율은 서독 지역보다 높았으며 경제격차는 상당히 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독 지역의 임금 수준은 예전에 비해 빠르게 향상되었고 생활수준의 격차도 줄어들었다.
구동독 지역은 부활하는가?
나는 구동독 지역의 드레스덴에서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리일 회사라는 화장품을 생산하는 기업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독일 제국 시대에 창업한 리일은 분단 이후 동독 정부가 관리했다가 다시 민간기업이 되는 풍상을 겪었다. 서독인 출신 사장은 "통일 이후 신탁청을 통해 기업을 매입한 서독 투자자가 리일의 전통을 고려해 과거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대다수 구동독 주민들도 서독 제품을 선호하던 시기이어서 동독 기업의 이미지로 사업에 성공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점차 기술개발과 시장확대를 통해 기업은 회생했으며 동독 출신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아직도 독일 대기업 이사회에 동독 출신 기업인이 적지만, 많은 동독 사람들이 시장경제에 적응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상당수의 독일 학자들은 북한에 투자한 한국 기업이 입주한 개성공단과 같은 전무유무한 실험을 매우 주목하고 있다.
동독 경제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드레스덴은 과학도시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교육과 연구개발을 위한 많은 기술대학과 연구소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신속하게 폭스바겐 뿐 아니라 첨단산업 유치에 나섰다. 독일 정부도 동독 지역 재건의 상징적 의미를 고려해 드레스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드레스덴에서 만난 한 공무원을 만났는데, 그는 해외기업의 투자유치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드레스덴은 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다시 복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말했다. 통일 직후 우수한 인력이 빠져나가고 자본이 부족했지만, 작센주의 수도이자 통일 이전부터 반도체 산업의 중심지였던 역사적 전통은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은 좋은 것인가?
독일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통일 이후 많은 고통과 혼란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사람이 똑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다. 드레스덴 시청에서 일하는 한 젊은 공무원은 "세대에 따라 평가가 다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인 세대는 자신의 과거가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중년 세대는 새로운 기회를 많이 얻었다"고 평가한다. 한편 젊은 세대는 통일 이전의 시대를 전혀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동독 시절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다. 실제로 베를린자유대학 이은정 교수는 "오랫동안 동독 지역에서 젊은 대학생을 만났지만 아무도 동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제 동독인과 서독인이라는 정체성 대신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이 젊은이들 사이에 커지고 있다. 이제 동독인은 더 이상 영화 '굿바이 레닌'(2003)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을 숨기려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통일은 인정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 있다.
다른 한편 통일 직후 동독 공산주의 시절의 건물과 시설이 철거되고 서독인의 '승자 심리'가 동독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동베를린의 교통신호기의 상징인 '암펠만'이 서베를린에도 등장했다. 동독인들의 사라져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 시민운동을 벌인 결과이다. 심지어 DDR(독일민주공화국) 박물관도 등장했다. 이를 동독인의 노스탈쟈(오스탈쟈)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과거 동독 시절의 삶이야말로 자신들의 과거의 이야기(서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독과 서독의 통일은 단순히 영토의 통합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에 살고 있다는 의식과 가치의 통합 역시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통일은 단순히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내부 식민지화'에 불과할지 모른다. 독일 메르켈 총리 역시 "통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연하게도 진정한 사회통합이 없다면 '내부 통일'이 이루어지는 대신 '또 다른 분단'이 지속될 것이다.
어떤 통일을 준비하는가?
2011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은 베를린자유대학을 방문하면서 "통일 준비를 잘 해야"한다고 말했다. 정말 통일을 준비하다면 무엇보다도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국민이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념과 체제의 경쟁이 아니라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실질적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둘째,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남북간 대화를 재개하는 한편, 주변국들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냉전시절에도 동서진영은 지속적으로 군축과 평화 회담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통일을 위한 재정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하지만, 통일 비용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안 된다. 분단 비용이 통일 비용보다 훨씬 큰 것은 말할 나위없다. 독일의 통일은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이루어졌지만, 사실상 통일을 위한 노력은 그 이전부터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통일은 단지 완수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아주 오랜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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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카게산다님의 댓글
차카게산다 작성일
좋은 자료 올려주어 감사합니다.
한국의 경우 현정권은 통일을 매우 두려워하는 세력이므로
기대할 것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운 마음에 통일보다는 오히려
분단의 벽을 더욱 높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내보이게 되는 행태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정치세력을
꼭 키우고 뽑아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