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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조국 방문기 62. 인민군대와 한 홉의 미숫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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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15-06-13 11:46 조회 10,375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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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62.

인민군대와 한 홉의 미숫가루


이번에 정기풍 교수가 우리가 머무는 평양호텔을 찾은 것은 내가 알고싶어한 북부조국의 농촌에 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 위한 것과 아울러 노길남 박사님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인민군대에 관하여 대답을 주기 위해서였다.  원래 우리의 원산행 여행에 정기풍 교수는 함께 하면서 여행하는 동안에 대화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가 계획이 변경되어 이렇게 호텔에서 만나게 되었다.  인민군대에 관해서는 어느 누구나 크게 관심을 갖는 분야다.  방문기 지난회에서 쓴대로 농촌에 관하여 대화한 것에 이어 오늘은 북부조국의 인민군대에 대하여 정기풍 교수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여기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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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풍 교수


정기풍 교수는 ‘인민군 군대의 정신과 도덕 풍모’에 대하여 설명하게 된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 지구상의 나라들마다 각자 군대가 있지만 조선인민군대처럼 높은 정신과 도덕을 갖춘 모습의 군대는 없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군대는 직업적인 군인들로 이뤄졌거나 징병제를 통하여 강제로 군대에 입대하여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는 곳이지만 북의 인민군대는 그 뿌리부터 다르다.  인민군대는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만들어진 항일유격대의 높은 사상과 뜻으로 뭉쳐진 혁명적인 동지애와 애국일념이 바로 그 뿌리다.


김일성 주석이 1932년 4월 25일 함께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반일인민유격대 (항일유격대)를 창건한 것이 조선인민군의 뿌리이고 시작이다.  항일유격대는 1934년 3월에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되었고, 광복후 1948년 2월 8일에 조선인민군으로 개편되는데 조선인민군은 빨치산 시절의 ‘한 홉의 미숫가루’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는 군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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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풍 교수는 ‘한 홉의 미숫가루’ 정신에 대하여 병사와 지휘관 사이의 눈물겹도록 짙은 사랑에 대하여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 부분은 내가 예전에 책에서 ‘고난의 행군’에 관하여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하였다.  조선인민군의 정신이 바로 ‘한 홉의 미숫가루’ 정신이라면 인민군을 알기 위해서 바로 그 정신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알아야겠기에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통하여 다음의 잘 요약한 글을 찾았는데 여기서 함께 나눌까한다.  저자는 by 스토리로 되어 있어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한 홉의 미숫가루’ 정신에 대하여 아주 잘 표현하였기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하며 여기 옮겨본다.


항일전쟁사 스토리 – 한 홉의 미숫가루

by 스토리 posted Aug 13, 2010


(전략)  민족의 식민지과거사,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는 김일성 장군의 항일전쟁사가 가장 대표적 자리를 차지한다.  일제와의 전민항쟁, 전면전쟁을 선포하고 가장 격렬한 유격전쟁을 가장 오랜 기간 가장 큰 규모로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줄기차게 이끌어 일제를 격멸한 민족의 전설적 영웅이 바로 김일성 장군이었다.


형용할 수 없이 어려웠던 항일전쟁과정을 보여주는 김일성 장군의 항일 일화가운데 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 중의 하나가 ‘한 홉의 미숫가루’이야기다.


김일성 장군이 직접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항일유격대) 주력부대가 1938년12월 초 중국 몽강을 떠나 장백지구로 향한 시기였다고 한다.  이 때를 일명 ‘고난의 행군’이라고도 부르는데 15년간의 항일유격전 전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100여 일간의 전투강행군시기였다고 한다.


한달 가까이 끊임없는 적의 추격을 받으며 행군을 하다 나니 휴대하였던 식량이 떨어지면서 며칠 동안이나 통 알 옥수수 몇 알과 시래기로 끼니를 이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날을 굶으면서 행군해 온 것만큼 대원들은 허기증이 나서 너머지면서도 눈을 움켜먹고는 다시 일어나 걷군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적들의 지상 토벌대, 항공대와 연속적인 격전을 하면서 계속 조선국경가까이로 행군하였다고 한다.


식량해결을 위해 일제의 7도구목재소를 습격하고 말 10여필을 노획하였으나 그 말고기를 구워 먹을 사이도 없어 눈 속을 행군하면서 날것으로 먹었고 소금도 다 떨어 지고 없었다고 한다.  말고기마저 떨어지자 사령부 전령병들은 김정숙여사가 이전에 헤어지면서 자신들에게 김일성 장군을 위해 비상용으로 넣어주었던 한 홉의 미숫가루를 며칠 동안 아끼고 아끼다 행군도중 어느 날 아침 김일성 장군께 권하였다고 한다.


김일성 장군은 아무 말없이 전령병들을 둘러 보다가 그 중 나이 어린 전령병에게 그 미숫가루를 쥐어 주며 자신의 염려는 말고 어서 먹으라고 하고는 꼬마전령병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그러나 전령병은 그 미숫가루를 먹지 않고 다른 전령병에게 주었고 그도 먹지 않고 다시 배낭 속에 간수하였다고 한다.


수천 명의 적들이 앞뒤로 달려 드는 속에 부대는 하루 종일 행군하고 저녁때가 되었으나 식량이 없어 모두 눈을 끓여 마셨다고 한다.  전령병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사령관께만은 미숫가루를 대접하려고 그 한 홉마저 적당히 갈라 다음 끼니 분을 보관하고 나머지를 김일성 장군 앞에 내놓았다고 한다.


장군은 침묵한 채 전령병들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들에게 몇 끼를 굶었는가 고 물었다고 한다.

자기들은 먼저 먹었고 여분이 더는 없다는 전령병들의 대답에 장군은 그들의 배낭들을 모두 가져오게 하여 검사하였고 전령병들은 어쩔 수 없이 배낭 속 깊이 싸두었던 나머지 미숫가루를 내놓고야 말았다고 한다.


김일성 장군은 신문지에 미숫가루를 쏟게 하고는 이것을 한말쯤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먹으면 배가 부를 거라며 종이숟가락을 만들어 전령병들에게 그것을 모두 나누어 주었고 전령병들은 다시 사령관에게 모두 덜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김일성 장군은 또다시 그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었고 결국 자신은 제일 적게 차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전령병들이 그 미숫가루를 물에 타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도 미숫가루를 물에 탔다고 한다.


수천 수만 말의 식량인들 김일성 장군의 대원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대신할 수 없었고 착취자들의 산해진미를 긁어 모은 호화로운 진수성찬도 그때의 한 홉의 미숫가루 맛보다 나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고 한다.


그 한 홉의 미숫가루는 항일전의 고귀한 양식이었고 그것에는 김일성 장군의 조국을 위한 자기 희생적 복무 정신과 대원들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그들을 키워주는 혁명적 자양이 깃들어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장군은 그날 밤으로 장백현 13도구부락의 적들을 소탕하고 수많은 식량을 노획하였으며 그 식량을 산하 각 부대들에도 보내주었다고 한다.  항일 전에서 발휘된 유격대원들의 불굴의 정신은 이같이 김일성 장군의 영도 하에 형성되고 일치단결된 정치사상적, 도덕의리적 통일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상 스토리 님의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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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민혁명군 (자료사진)


정기풍 교수는 ‘한 홉의 미숫가루’ 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인민군대는 관병일치, 군민일치의 군대이며,  ‘병사를 위해 지휘관이 있다’ ‘최고사령관이 바로 동지요 전우다’라는 구호를 알려주면서 지휘관과 병사가 총탄이 쏟아지는 전투 가운데 서로가 서로의  몸으로 보호해줄 만큼의 깊은 신뢰와 동지애로 인민군대는 이뤄져있다고 말해준다.


한 예로 훈련 도중에 철조망 바로 아래에서 어떤 병사의 수류탄 안전고리가 빠졌는데 그것을 본 지휘관이 ‘엎드려’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날려 그 수류탄을 덮쳤고 자신이 희생하면서 병사들을 살렸다고 한다.  그 지휘관이 김광철 영웅인데 그는 90년도의 첫 공화국영웅으로 전쟁때가 아닌 평화적인 시기의 첫 공화국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번에 방문하였을 시기는 남부조국에서 연달아 병사들이 자살을 하였거나 동료 병사들로부터 심한 폭행을 당한 것이 사회적인 이슈가 된 시점이었다.  이런 일은 갑자기 생기겨난 일이 아니라 이미 해방직후의 남부조국 군대가 태어날 때부터 주욱 있어왔던 일이다.  그래 노길남 박사님도 조선인민군대는 어떤 상황인가에 대하여 취재하려고 했고, 나 또한 그 문제에 관심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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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호텔 접견실에서 정기풍 교수와 필자


정기풍 교수는 조선인민군대에는 영창제도가 없다고 말해준다.  이미 1950년대에 영창제도는 사라졌는데 원래부터 규정에만 조례로 있었고 실제로는 영창제도 자체가 없었는데 그 규정마저 1950년대에 없앴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군대가 있을 수 있는가?  아무리 인민군대는 지원제이고 스스로가 원하여 입대한다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입대하기 전에 이미 인민군인이 될 젊은이들은 인민군대의 정신에 대하여 배우고 깨닫고 있다해도 모두가 군대에서 잘 적응해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군대에 영창제도가 없다는 것은 일반사회에서 경찰이나 교도소가 없다는 것과 같은데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일까?  


정기풍 교수는 항일혁명 시기에 잘못을 저지른 병사가 스스로 땅에 금을 긋도록 하여 지휘관이 그 안에 서서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지휘관의 잘못이라면서 스스로 벌을 청한 적이 있는데 잘못을 저지른 병사가 나오시라며 사정을 하였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지금 인민군대에 처벌이나 구류장 자체가 없으며 남부조국에서 말하는 자총 (자살)이란 단어자체도 없다고 말해준다.  


군대가 아닌 사회에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생활 속에서 까마득히 멀리 있어서 대부분의 인민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며, 감옥이란 곳도 영화를 통하여 아는 정도라면서 예를 들어 ‘푸에블로’호 사건을 들며 당시 미군들이 머물던 곳을 영화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감옥으로 경험하는 정도라고 한다.   교화소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 거기에 가는 사람은 아주 드문데 가끔 사고를 낸 운전수가 가는 정도라고 말해주면서, 남한에서 정치범 수용소라는 악명높은 요덕수용소에 대한 질문에 요덕수용소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곳이라고 잘라서 말한다.  요덕수용소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른 기회에 확인하였는데 다시 거론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원산으로 가는  도중에 리영호 운전기사로부터 인민군대는 계급이 없는 군대로 군사호칭이 있을뿐이라며  ‘중대는 나의 집’이라는 노래를 즐겨 부를만큼  조선인민군은 지휘관과 병사, 병사 상호간에 친가족과 같은 분위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이 그냥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  영창제도 자체가 없다는 것은 실제로 인민군대의 생활 자체가 짙은 동지애로 이뤄진 한가족같은 분위기란 것의 증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식구들 가운데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보통 경찰을 부르거나 가정에다 감방 하나를 만들어두어서 그 못된 자를 가두어두지 않는다.  가정에선 사랑과 훈계로서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조선인민군대가 친가족과 같다는 것은 그렇게 가정에서의 혈연으로 맺어진 짙은 가족과 같은 동지로서의 관계라는 것이다.  항일혁명군 시절의  ‘한 홉의 미숫가루’ 정신을 생생하게 이어받은 곳이니 인민군대는 어떻게 보면 그렇게 친가족보다 더욱 높은 차원의 동지들과의 사랑으로 유지되는 곳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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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 대원들 (자료사진)


내가 지난 몇 달동안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hanseattle.com  사이트에 올려 인터넷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 귀한 책을 읽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일을 하면서 나 스스로 매 장마다 정독을 하며 참으로 많은 것을 느낀다.  김 주석의 회고록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책이라는 것을 읽는 사람들마다 모두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세기와 더불어는 바로 조선인민군의 뿌리인 항일혁명군 시절에 김 주석이 일제와 맞서 싸우면서 보고 겪고 느낀 수많은 일화와 함께 김 주석의 인민을 진실로 사랑하는 고귀한 정신과 심오한 사상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  조선인민군 군대는 바로 김 주석의 그 인민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국심을 그대로 이어받은 군대로 바로 이해할 수 있다면 구타나 자살은 커녕 영창제도조차도 없다는 조선인민군대를 이제 모두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사이트에서 ‘세기와 더불어’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seattle.com/main/bbs/board.php?bo_table=century&wr_id=78



위의 링크가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하나’ 페이스북 통일그룹에 올려진 파일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groups/Koreaisone/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7-06 13:53:10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댓글목록 2

갯가용님의 댓글

갯가용 작성일

어디서건 어떤 목적을 위하여 미담이나 영웅담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지식을 적정수준 갖추었다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영웅담에 대하여는 의심과 회의를 가지고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기와 더불어' 같은 회고록이 과연 당시의 진실을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북에서 교묘하게 미화한 일종 허구로 구성된 내용인지의 여부판단은 오직
읽는 사람들의 현명한 인식과 판단에 따르겠지만.. 제대로 정독하면 할수록
그 내용들을 결코 허구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이 책을 금서로 선정하게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언젠가는 그 진위가 명백하게 되는 시기가 오게될 것입니다.

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갯가용 님,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지요.

당연히 북부조국에선 사실이고 진실인 것이 반공세뇌공작으로 알려지지 않은데다 탄압으로 거론하고 보도하여 알려나가는 것이 막혀있는 시절이지만 결코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숨겨져있는 진실을 알지 못하고 알려주는 거짓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참인간답게 진실은 스스로 알아나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스스로 참사람이 되어 우뚝 서는 것은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사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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