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비하여 읽어볼만한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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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 간다는 그의 말은 그르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인민들은 이미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왔다. 한국 사회의 주요한 정치적 변화가 대부분 의회 밖에서 이루어진 건 바로 그것이다. 군사독재 출신 수구보수와 민주화운동 출신 개혁보수 정치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인민들은 거리와 광장에서 직접 행동했고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 에너지는 분명히 진보정치의 요구였다. 문제는 그 에너지가 결국 진보정치로 승화하지 못하고 번번이 보수정치 체제로 흡수되어버린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한 근래 유력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진보정당이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계급이나 자본주의 극복 같은 낡은 가치를 고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시류에 영합하는 달콤한 말이지만 과연 그럴까. 만일 그렇다면 10년 전 진보정당이 창당할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계급과 자본주의 극복을 표방했는데 어떻게 10명의 국회의원을 내며 바람을 일으켰을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내가 좀 살아봐서 아는데’라며 내세우는 서유럽의 청소년들이 최근 시위에서 ‘자본주의 반대’ ‘사회주의 혁명’ 피켓을 들고 나오는 건 또 뭔가.
진보라는 걸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사실 복잡할 게 없다. 이건희나 정몽구 같은 소수의 부자가 아닌 대다수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편에 서는 것, 그들이 주인 노릇 하는 세상을 상상하고 그런 세상의 구현을 위해 연대하고 싸우는 게 진보다. 세상을 국가보다 계급으로 보는 태도와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수반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은 진보의 변함없는 뼈대다.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계급과 자본주의 모순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계급과 자본주의 모순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계급과 자본주의 극복을 뺀 진보정치는 민주당·국민참여당 같은 개혁보수 정치와 아무 다를 게 없다.
근래 진보정당의 행보처럼 말이다. 이명박 정권 내내 그들은 ‘이명박 반대’ 구호만 외쳐왔다. 이명박 반대는 진보의 구호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일 뿐이다. 인민들로선 개혁보수든 진보정당이든 어차피 이명박 반대일 뿐이라면 더 크고 집권 가능성도 있는 개혁보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개혁보수와의 차이를 스스로 없앤 진보정당의 귀결은 그 2중대로 동원되다 버려지는 것이다. 지금 국회 로비에 앉아 ‘단 며칠 만에 선거연합 정신을 파기한’ 민주당에 분개하는 민주노동당 의원들처럼 말이다. 그들의 초라한 모습은 시작에 불과하다.
진보정치의 숙제는 ‘디지털 시대엔 계급도 자본주의 모순도 없다’ 거짓말하며 개혁보수 세력에 빌붙는 게 아니라 계급과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진보의 뼈대를 오늘 인민들과 나누는 공감능력, 그리고 급변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진보의 가치를 구현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 다행인 건 그런 공감능력과 상상력을 가진 ‘자생적 좌파’들이 하나둘씩 조용히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그 소식을 알린다. 그들이 진보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사회주의 동호회’니 ‘좌파 컬트집단’이니 조롱하며 가장 세련된 진보인 양 행세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붉힐 것이라는, 그들이 이제 진보의 이름까지 차용하는 자본의 성채에 균열을 내기 시작할 거라는 기쁜 소식을.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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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씨가 『한겨레』에 기고한 〈기쁜 소식〉을 읽었다. 김씨는 이 글에서 ‘진보의 요체는 세상을 국가보다 계급으로 보는 태도와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수반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이런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근래 진보정당이 계급과 자본주의 극복을 뺀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고, 개혁보수와의 차이를 스스로 없앤 진보정당의 귀결은 개혁보수의 2중대로 동원되다 버려지는 것이다. 진보정치의 숙제는 계급과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진보의 뼈대를 오늘 인민들과 나누는 공감능력, 그리고 급변하는 디지털 세상에서 진보의 가치를 구현하는 예술적 상상력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김규항씨가 순정(純情)진보주의자인 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이 글에서도 김씨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솔직하게 밝히면서 한국사회가 직면한 근본모순은 계급 모순이며 이를 지양하기 위한 해법은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임을 천명하고 있다. 계급 모순의 혁파와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을 수반하지 않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개혁이나 개량에 김씨가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 이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김씨가 박정하게 평가하는 까닭, 이 땅의 주인인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노무현과 이명박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해석하는 연유는 그 때문이다.
그런데 김규항씨의 생각처럼 한국사회 구성원 대다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근본원인이 계급모순과 자본주의 체제인지는 의문이다. 김씨가 지향하는 사회는 틀림없이 자본주의가 지양된 사회일 것이고 김씨가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 한 김씨의 신념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김규항씨가 한국사회 안에서 작지 않은 상징권력을 가지고 있고, 김씨의 사회적 발언에 영향 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김씨의 공적 언행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거나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만약 김씨가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목표, 이를 구현하기 위한 경로와 방법 등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김씨의 자장(磁場)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이는 한국사회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한국사회에 대한 김씨의 진단과 처방이 옳은지를 검토해 볼 필요는 그래서 생긴다.
‘계급’으로 세상을 보고,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을 지향하라?
김씨는 맑시스트(폄하의 뜻이 전혀 없다)답게 한국사회를 계급이라는 관점으로 보고 자본주의 체제의 지양을 목표로 한다. 김씨는 계급이라는 관점과 기준으로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한국사회가 지닌 문제점과 모순을 정확히 이해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에 계급을 강조하는 것일 게다. 모르긴 몰라도 김씨가 말하는 계급은 생산수단이나 자산의 소유여부, 경제적 부의 획득 및 처분 권한 등을 기준으로 구획되는 인간집단을 의미할 것이다. 인간이 하는 사회활동 가운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중요한 활동이 생산 활동 및 생산 활동으로 창출된 부의 분배라는 점을 감안할 때 (경제적)계급이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제적)계급이라는 안경을 쓰고 사물을 바라보고, 사회현상과 정치를 해석하며, 진보를 지향할 때 수반하는 위험성은 매우 크다. 먼저 계급을 사회의 기본모순으로 상정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계급이 폐절되거나 소멸될 사회를 추구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태도는 혁명적 대기론이나 근본주의적 기획으로 수렴될 확률이 농후하다. 또한 (경제적)계급을 기준으로 사회적 균열과 모순을 파악하면 경제환원주의의 덫에 빠져 다른 원인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균열을 간과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마련이다.
요컨대 (경제적)계급이라는 관점으로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사회를 해석하는 유효한 방법 중 하나일 뿐 유일한 독법(讀法)이거나 가장 우월한 해석방법은 아니다. 한국사회만 하더라도 (경제적)계급으로 포착되거나 해석되지 않는 사회적 균열과 모순이 허다하다. (경제적 계급)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특권과 반칙의 온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결손, 기승을 부리는 학벌주의와 패거리주의의 폐해, 대중들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반북반공이데올로기․영남패권주의․성장주의 같은 허위의식의 존재 같은 것들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발생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이 진보의 본령(本領)이라는 김씨의 주장도 수긍하기가 어렵다. 김씨는 자본주의 체제를 ‘악마의 맷돌’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효율성과 성장성 측면에서 비할 데 없는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적 속성 가운데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발생시키는 요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사 자본주의 체제 안에 그런 속성이 있다 해서 그것이 교정 혹은 치유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북유럽이나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도 얼마든지 효율과 형평,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추구하고 실현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건강하게 만들고, 시장이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시장 보다 국가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할 때 그 기능을 훌륭히 수행하는 강하고 정의롭고 유능한 국가가 존재하는 한 말이다.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 노동자, 사경에 놓인 영세자영업자, 재벌에 수탈당하는 중소기업 등과 같은 사례가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발생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의 실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위와 같은 문제들은 국가가 특권과 반칙을 근절시키고 지대추구행위를 엄금하는 등 시장생태계를 복원하고, 유연안정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법치주의를 철저히 지키는 한 대부분 해결될 문제들이다.
김씨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시장’의 ‘계획’으로의 대체, 사적 소유의 폐절, 주요한 생산수단의 국유화 같은 것들을 하자는 의미인지, 노동자의 경영참여나 이를 한층 발전시킨 ‘노동자 자주관리’같은 것들을 하자는 의미인지 분명치 않다. 만약 전자라면 사멸한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답습하겠다는 뜻일 테고, 후자라면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을 운운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진보의 미래에 무익한 상상력
김규항씨는 진보의 본질을 계급적 태도의 견지와 자본주의 체제의 지양으로 본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진보에게 요구하는 것은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모순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현실정치에서 이를 구현하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한국사회의 진보세력이 해야 할 일들이 자명해진다.
시장생태계를 복원하는 일,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일, 특권과 반칙을 철폐하는 일, 정교하고 현실적합성이 높은 복지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 이런 철학과 정책들을 실현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정당 및 사회세력을 조직하는 일, 선거연합을 통해 정권을 탈환하는 일, 진보적 가치와 이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을 흔들림 없이 지지하고 지원할 수 있는 시민들을 계몽하고 조직하는 일 등이 지금 한국사회의 진보세력이 해야 할 일들이 아닌가 싶다.
김씨는 한국사회의 진보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지향을 그릇된 전제 위에서 사유하고 있다. 만약 한국사회의 진보세력이 김씨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진보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김씨의 정치적 상상력은 진리운동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각광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을 새롭게 디자인하려는 진보 정치세력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태경·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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