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2개에 때 이른 임기 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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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 여의도를 꼼꼼히 들여다본 관찰자들은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현상만 쭉 보면 분명 정권 말기인데 정작 정권은 2년 넘게 남았단 말이야”라는 말로 분위기를 정리했다. 여당 의원조차 임기 말을 떠올리게 하는 뒤숭숭한 기류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는 권력의 어색한 조합. 겉으로는 ‘대포폰’과 ‘강기정’밖에 들리지 않는 야단법석의 한 주였지만, 더 큰 맥락에서 보면 때 이르게 ‘임기말 증후군’의 징후가 읽혔다.
우선 겉으로 드러난 ‘야단법석’부터 되짚어보자. 11월1일 국회에서는 메가톤급 폭탄 두 개가 동시에 터졌다. 강기정 민주당 의원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의 재임청탁 로비 의혹을 거론하며 “진짜 몸통은 김윤옥”이라고 영부인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시사IN 양한모
정부와 한나라당은 발칵 뒤집혔다. 강 의원이 정작 결정적인 물증을 제시하지 못하자 “면책특권 뒤에 숨지 말라”고 역공을 펼쳐 주도권도 잡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다음 날인 화요일 국무회의에서 이례적으로 강 의원의 국회 발언을 문제 삼았다. 한나라당은 발언이 나온 11월1일부터 금요일인 5일까지 닷새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강기정 의원 사과를 요구하는 논평을 냈다. 방송과 보수 언론은 연일 ‘면책특권 문제없나’ 따위 기사를 헤드라인에 쏟아냈다(24~ 25쪽 기사 참조).
같은 날 대정부질문. 역시 이석현 민주당 의원이 ‘대포폰 스캔들’을 터뜨렸다.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최 아무개 행정관이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실무자에게 대포폰(감청·추적 등이 쉽지 않도록 명의를 도용한 휴대전화)을 건네 업무에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그런 사실이 있다”라고 그 자리에서 시인했다.
폭탄 두 개 동시에 터져 여의도는 ‘시계 제로’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올해 7월 사업가 김종익씨와 남경필·정두언·정태근 의원 등을 불법 사찰한 사실이 밝혀져 파문을 일으킨 바 있으며, ‘이영호(당시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박영준(당시 총리실 차장)·이상득(한나라당 의원, 대통령 형님)’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영포(영일·포항 향우회) 라인’이 움직이는 비선(秘線) 감찰조직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대통령 측근의 권력 사유화 도구 아니냐는 것이었다. 당시 청와대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총리실 산하라며 이들이 청와대의 지시를 받았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이번 대포폰 폭로에 의해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과 공직윤리지원관실 간의 커넥션이 수면 위로 드러난 셈이다.
하루에 폭탄 두 개가 동시에 터지면서 한나라당은 “강기정 사과”를, 민주당은 “대포폰 특검”을 외치며 대치 국면에 들어갔다. 하지만 두 당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민주당은 물적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 ‘강기정’에 ‘대포폰’이 묻힌 것을 아까워하는 기류가 강했다. 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원내 지도부가 타이밍을 조절해줬어야 했다. ‘대포폰’은 정권 차원의 권력 전횡과 증거 인멸 및 수사 방해를 드러낼 수 있는 엄청난 문제인데, 해프닝성인 면책특권 논란에 물타기를 당해버렸다”라고 자평했다.
반면 한나라당에서는 “십 년 감수했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한 수도권 초선 의원은 “기자들이 관성으로 기사를 쓰나? ‘강기정’ 건을 취재하다가도 ‘대포폰’이 터지면 그쪽으로 틀어야 하는 거 아닌가? ‘팩트 밸류’가 비교가 안 되는데?”라고 기자에게 되묻기도 했다. 핵심 당직을 맡고 있는 또 다른 의원도 “‘대포폰’은 컸다. ‘강기정’ 아니었으면 정말 난감할 뻔했다. G20 정상회의까지 빛이 바래면서 쭉 밀릴 수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민주당이 대형 특종을 하고도 스텝이 엉켜 제대로 장사를 못한 모양새로만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청와대의 후반기 국정운영 전략과 이에 맞서는 민주당의 대응 전략이 처음으로 일합을 겨뤘다는 사실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한 주는 집권 후반기의 풍경을 압축해 보여주는 예고편이었다는 얘기다. 무슨 의미일까.
먼저 지난주 두 개의 폭탄이 터지기 전까지 정치권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사정(司正) 정국’이었다. 한화·태광·C& 그룹을 거쳐 청원경찰친목협의회(청목회) 의혹까지 검찰이 그야말로 칼춤을 출 기세였다. 정치권에서는 “눈엣가시인 박지원 손보기에 들어갔다” “정권 핵심 실세인 C씨도 위험하다” “박근혜 의원의 한나라당 대표 시절을 뒤지고 다닌다” 등등 루머도 무성했다. 청와대 차원의 ‘기획’인지 검찰의 독자 행보인지는 의견이 갈렸지만, 사정 정국 진입 자체를 부인하는 관측은 찾기 힘들었다.
‘청와대 구상’과 ‘민주당 구상’ 첫 정면충돌
사정 정국은 특히 여당 정치인에게 ‘충성 맹세’와 ‘독자 생존’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효과가 있다. 내부 결속력이 높아지지만 권력 기반의 일정 부분이 적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부작용을 무시할 수 없다. 한때 권력 블록의 일원이었다가 사정 칼날에 베인 이들은 거꾸로 야당에 가장 유력한 ‘정보원’이 되고, 이로 인해 다시 레임덕이 가속되기도 한다. 역대 정권에서도 다른 방식으로는 충성을 확보할 카드가 없는 집권 막바지에 가서야 본격 사정 정국이 열리곤 했던 이유다. 지금 시점은 이명박 정부가 ‘지지율 50%’를 내세우고 있는 터라 확실히 이른 감이 있다.
사정 정국으로 ‘군기’를 잡은 뒤에는 ‘성과’를 통해 2012년 총선과 대선에 대비한다는 게 여권의 노림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전형적인 MB 스타일이다. MB가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과 버스노선 개편을 밀어붙여 끝내 여론을 반전시켰던 기억도 달콤하다. 가깝게는 G20 정상회의를 성공시켜 동력을 얻고, 멀게는 2012년 3월 완공을 목표로 하는 4대강 사업에 기대를 건다는 시나리오다. 4대강 사업의 환경영향은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지만, 당장 조경사업이 주는 시각적 효과는 한 달 뒤 있을 총선에 손해일 것이 없다는 속내가 읽힌다.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은 10월30일 자신의 트위터에 “4대강 사업이 강 살리기인지 대운하인지, 정치인들은 정치생명을 걸라” 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 당장 총선에서 4대강 사업이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기 힘든 얘기다.
ⓒ청와대 제공
강기정 의원이 김윤옥 여사(왼쪽 세 번째)를 겨냥했다. 여당은 난리가 났지만 “덕분에 살았다”라는 의외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에 맞서는 민주당의 대응 전략은 길목 지키기다.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박지원 원내대표와 가까운 박선숙 의원은 그 시스템을 이렇게 설명했다. “4대강 사업 건설자금 문제는 건설업계를 잘 아는 백재현 의원과 동지상고 공사 독점 문제를 제기한 이석현 의원이 달라붙었다. 돈의 흐름을 봐야 하는 곳이다. 민간인 사찰 문제는 신건 의원과 이석현 의원이 전문가다. 신 의원은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이 의원은 영포회 문제를 계속 팠다. 의혹의 핵심 고리인 이영호 전 비서관은 정무위 의원들이 팀플레이로 추적 중이다. 대우조선해양 문제는 원래 이재오 장관 측근 문제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강기정·우제창·조영택 의원이 연초부터 따라붙었다.”
요약하면 돈과 인사권이라는 권력의 양대 축에서 의심스러운 대목이 있으면 아예 ‘전담 마크’를 하는 시스템이 민주당에 구축됐다는 얘기다. 과녁을 명중시켰든 빗나갔든, 이번 대정부질문에서 나온 이석현 의원의 ‘대포폰 폭로’와 강기정 의원의 ‘김윤옥 몸통설 제기’ 모두 각자가 지키던 길목에서 들고 나온 결과물인 셈이다. 박 의원은 “이제 시작이다. 내년 상반기까지 청와대의 사정 드라이브와 야당의 권력형 비리 고발이 계속해서 맞붙는 구도가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이번 주만 본다면 최대 전선은 ‘강기정 이슈’ 대 ‘대포폰 이슈’였지만, 심층의 전선은 ‘사정 정국’ 대 ‘권력형 비리 고발 정국’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었다. 사정 드라이브에 맞서 민주당이 설치한 두 지뢰 중 하나가 불발이 되는 바람에 그림이 꼬였을 뿐이라는 얘기다. 월요일에 ‘김윤옥 몸통설’을 제기한 강기정 의원이 금요일에 청목회 로비 연루 의혹으로 사무실을 압수 수색당했다는 사실은 퍽 상징적이다. 이런 전선은 전형적인 ‘임기 말 전선’이다.
또 다른 징후도 있다. 당의 ‘충성심’이 예전 같지 않다. 11월4일 한나라당 의원 45명은 부자 감세 철회를 논의하는 의원총회를 열자는 의총 소집요구서에 서명했다. 청와대와 정부가 발벗고 나서 감세기조 유지를 천명한 직후에 나온 일종의 ‘항명’이었다.
ⓒ뉴시스
박지원 원내대표(위 왼쪽)와 대응책을 논의하는 강기정 민주당 의원(위 오른쪽).
임기 초반 같으면 당이 청와대의 의중을 파악한 즉시 불씨가 사그라들곤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핵심 당직을 맡은 한 의원은 “45명이 서명은 했지만 감세 철회가 힘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 이 사람들이 어디 감세 문제에 관심이나 있었나”라며 서명한 의원 몇몇의 이름을 냉소적으로 읊었다. 하지만 바로 그 ‘감세 문제에 관심도 없던’ 의원들이 청와대의 시그널마저 외면한 채 의총 소집요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야말로 의미심장하다. 강기정 의원이 김윤옥 여사를 정면으로 겨눈 대정부질문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이 몸으로는 고사하고 말로도 발언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정치권에서 화제가 됐다.
한나라당 ‘충성심’ 예전 같지 않다?
검찰의 행보를 두고도 “임기 말 스텝을 벌써 밟는다”라는 말이 정치권에서 심심찮게 나온다. ‘검찰은 우리 편’이라고만 믿고 보기에는 꺼림칙하다는 말도 한나라당 안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권력의 힘이 빠진다 싶으면 조직 보위를 위해 여야를 막론하고 ‘파일’을 만들곤 하는 검찰 특유의 생리에 벌써 시동이 걸린 것 아니냐는 얘기다. 실제로 11월5일 검찰은 강기정 의원을 포함해 청목회 로비 의혹을 받는 여야 의원 11명의 지역 사무실을 압수 수색했다. 1주일간 숨을 골랐던 사정 정국의 흐름이 수면 위로 올라왔는데,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정국 경색이 반가울 리 없는 여권 또한 반응이 탐탁지 않다. 김무성 원내대표와 박희태 국회의장 모두 떨떠름한 논평을 냈다.
청와대의 국정 운영이 그렇고, 여권에 원심력이 작용하는 모습이 그렇고, 검찰의 ‘수상한’ 스텝이 또한 그렇다. 어디를 보나 집권 말기의 풍경이 꽤나 때 이르게 머리를 내민 모습이다. 왜 그럴까. 박선숙 의원은 “MB 정부 임기는 2012년 12월이 아니라 8개월 이른 4월에 끝난다. 그 사실을 한나라당도 검찰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대선이 아니라 4월 총선을 기준으로 대통령 임기를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다. 총선 결과에 따라 사실상 차기 구도가 본격화되는 데다가, 현역 국회의원의 시간표 또한 12월보다는 4월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레임덕이 본격화되는 시점 또한 총선 경쟁에 불이 붙는 내년 하반기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 지난 지방선거 참패에서 확인된 민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권에 주어진 시간은 의외로 많지 않다. 특히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이 느끼는 초조함은 상상 이상이다. 하루에 두 번 이상 지역구를 찾지 않는 의원은 ‘간이 크다’는 말을 듣는 분위기다. ‘감세에 별 관심도 없는’ 의원들까지 감세 철회 의총을 요구하고 나선 것도 그래서다.
근본적으로 민심을 되돌릴 수 있는 국정 기조 전환이 없다면 이명박 정부는 이전 정부보다 ‘임기가 8개월 짧은 정부’의 숙명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지 모른다. 당장 레임덕이 시작됐다고 말하는 것은 한참 이르지만, 역대 정권의 임기 막바지에 익숙하게 보아오던 풍경들이 다소 난데없이 눈에 뜨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출처: 시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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