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치기로 뚫린 '쥐구멍'이 '개구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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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이명박) 정권이라는 저수지에 쥐구멍이 뚫렸다. 권력이 무너지는 물꼬가 터진 것이다. 한 번 뚫렸으니 아마 구멍이 더 커질 것이다."
지난해 연말 예산안 날치기의 후폭풍이 거세지자 한나라당이 고흥길 정책위의장의 사퇴로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을 때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한 말이다. 박 원내대표는 당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고 의장의 사퇴가 이른바 '형님 예산'은 듬뿍 안겨주고 정작 민생 및 공약 관련 예산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데 따른 민심 이반을 잠재우기 위한 미봉책임을 강조하면서 '쥐구멍론'을 펼쳤다.
권력 누수의 '쥐구멍'이 내년(2011년)에는 '개구멍'처럼 커질 것이라는 근거는 세 가지였다.
첫째, 국민들이 내년이 되면 예산안 날치기의 악영향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근거였다. 그는 "지금까지 받던 것을 동결해도 불만이 나오는데 아예 못 받게 되면 누가 좋아하겠나"라고 반문하면서 "더 큰 국민적 저항이 일 테고 내년에 절정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근거는 임기 말 '언론 환경의 변화'였다. 그는 "(내년에는) 종편(종합편성 채널) 사업자에 선정된 언론도 정권의 혜택을 부정해야 하고, 또 '미래권력'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면서 "(종편 선정에서) 탈락한 언론사는 그 반발로 이명박 정권과 각을 세우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세 번째 근거는 총선·대선을 앞둔 야당의 조직적 활동이다. 그는 "내년부터 선거를 의식한 지역 조직들이 가동된다"면서 "우리당 당원들이 국민들 속으로, 현장으로 뛰어든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와 달리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여건은 돼 있다"면서 "예산 깎인 현장을 하나하나 찾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민과 함께 현장 속에서 선전선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때만 해도 이런 주장은 실감 나지 않는 정치 공세로 보였다. 그럴 수밖에. 날치기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에 대한 국정운영 지지율은 별 변화가 없었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지지율을 올릴 만큼 '싹수 있는 정치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객관적 현실이 결여된 박 대표 개인의 '희망사항'이나 기대치가 너무 높게 반영된 '낙관적 전망'쯤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전국을 발굽이 두 개인 우제류(偶蹄類) 동물의 공동묘지로 만든 구제역(口蹄疫)의 장기화를 계기로 '레임덕'(lame duck)의 선행지표로 볼 수 있는 조짐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런 전조 현상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전국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른 침출수 검사결과를 공개한 21일에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대통령의 강력한 가격 인상 억제 발언에도 내려갈 줄 모르는 '묘한 기름값'과, 대통령 직속기관의 '절도미수' 행각이 <조선일보>를 통해 터진 것이 바로 그 전조다.
MB 비웃는 '묘한 기름값'은 레임덕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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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은 지난 1월 13일 국민경제대책회의에서 "여러 물가에 영향을 주는 기름값의 경우 유가와 환율 간 변동관계를 면밀히 살펴 적정한 수준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고 "주유소 등의 행태가 묘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대통령이 특정 상품 가격을 '묘하다'고 언급한 것은 그 '묘한 가격의 고삐를 어떻게든 잡으라'는 지시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대통령의 '묘한 발언' 이후에도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경제 부처 장관들의 '기업 팔 비틀기'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기업 '팔 비틀기'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부분은 정부도 인식하고 있다. 시장구조가 왜곡되고 정보가 제대로 안 흐르는 부분에 타기팅해서 접근하고 있다. 악역이 하나쯤 있어야 질서가 바로잡히지 않겠나."(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 2월 9일 기자간담회)
"내가 회계사 아니냐. 오랜만에 (회계사무소를) 단기 개업한다는 마음으로 직접 원가계산을 해보려 한다."(최중경 지식경제부장관, 2월 10일 기자간담회)
윤 장관의 '타기팅 접근'과 '악역' 발언은 미국이 북한 핵시설에 대해 '정밀 타격'(surgical strike)을 가할 것이라던 위협을 떠올리게 한다. 에너지 관련 장관이 직접 기름값의 원가계산을 하겠다는 것은 시장에 대한 노골적인 협박이다. 이런 '팔 비틀기' 방식의 가격통제는 30~40년 전 개발독재 시대에나 봤던 풍경이다.
그런데 묘하다. 대통령과 장관들의 '기름값 잡기 총력전'에도 불구하고 이를 비웃기라도 한 듯, 국내 휘발유 가격은 1826원(1월 3주)에서 1850원(2월 3주)으로 5주간 연속 오름세다(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 서비스). 대통령이 나서서 '기름값이 묘하다'고 했는데도 기름값이 안 잡히는 이런 '묘한 상황'은 레임덕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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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묘한 상황에서 대한석유협회는 21일 '결정적 한방'을 날렸다. 오강현 대한석유협회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정부에서 국내 휘발유 가격이 OECD국가에 비해 높다고 하지만 결코 높은 수준이 아니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석유협회는 통계자료를 직접 제시하며 "2010년 평균으로 우리나라는 OECD국가에 비해 세전가격으로 리터당 28.4원이 낮고 관세와 부담금 및 품질 차이를 감안하면 54.4원이 낮다"고 반격했다.
대통령의 '눈과 귀', 국정원의 '절도미수' 사건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레임덕의 전조 현상으로 비춰지는 또 다른 묘한 사건이 불거졌다.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가정보원의 '절도미수' 사건이 <조선일보>의 특종보도로 세간에 알려진 것이다(<한겨레>도 이날 단독보도를 했지만 범행의 주체를 국정원으로 특정하지는 않았다). 대통령의 '눈과 귀'가 절도 행각을 벌이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지난 16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에 잠입했던 국정원 직원들은 제3차장 산하 산업보안단 소속 실행팀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이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않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입장을 취하고, 인도네시아 정부도 사건 확대를 원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이로 인한 무능과 국격(國格) 훼손의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듯하다.
정보기관이 정보를 빼내기 위해 외국 대통령 특사단의 방을 터는 것은 도의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 대통령은 유도유노 인도네시아 대통령과의 '특별한 관계'를 여러 번 강조해왔다. 이번에도 청와대는 "특사단에 대통령 전용기까지 제공했다"며 이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를 강조했다. 그러나 특사단을 청와대로 초청한 바로 그 시각에 대통령의 '눈과 귀'는 특사단의 방을 터는 절도 행각을 벌였다. '뒤통수 치기'의 진수를 보여준 셈이다.
그나마 '미수'였다. 이번 사건에서 국정원은 첨단 IT 강국과는 거리가 먼 원시적 방법과 첩보의 ABC도 지키지 않은 수집활동으로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다. 첩보영화에서 흔히 보는, 들켰을 때에 대비한 청소부 '변복'이나 웨이터 '변장'도 없었다. 황당하게도 이들은 절도행각을 들키자 '지문'이 묻어 있는 노트북을 친절하게 돌려줬다. 첩보의 세계에선 성공했을 때 정부의 보호를 받는 스파이지 들키면 한낱 좀도둑일 뿐이다. '단순절도'로 처리해 국가를 보호하는 게 첩보의 세계다.
더 심각한 것은 아마추어 같은 '사후 처리' 방식이다. 사건 발생 이후 경찰이 "롯데호텔에 설치된 CCTV 화면이 흐릿해 괴한들의 신원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해온 것을 보면 국정원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경찰 신고와 수사를 막지 못했으며, 특히 '정부 고위 관계자'는 "국정원 직원들이 국익 차원에서 인도네시아 특사단의 협상 전략 등을 파악하려 했던 것"이라고 언론에 확인까지 해주었다.
'절도미수' 샌 것은 '형님 라인' 내친 원세훈에 대한 영포-TK의 반격?
이 때문에 권력 암투설과 부처 간 알력설이 나온다. 최재성 의원(정보위 민주당 간사)이 21일 극비사안이 정부 고위 관계자 말을 빌려 '리크'되는(새는) 것과 관련 "정부 고위라인에서 알력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난무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권력 암투설은 2009년 2월에 취임한 원세훈 원장이 지난해 9월 이른바 '형님(이상득) 라인'으로 국정원 인사와 예산을 주물러온 김주성 기조실장을 교체하면서 TK(대구·경북) 출신을 대거 지방으로 보냈을 때부터 불거진 해묵은 것이다. 사건 발생 초기에 정치권에서 "TK 세력의 '원세훈 흔들기'가 이번 사건이 외부로 알려진 원인이었던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관련 주목되는 것은 민주당 이석현 의원이 지난해 11월 국회 예결위에서 형님에게 반기를 든 소장파와 친박계 정치인 사찰을 주도한 인물로 지목한 '이창화 사찰팀'이다. 국정원 직원 이씨는 이른바 영포(영덕·포항) 라인으로 청와대와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 파견돼 박영준 당시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 밑에서 정두언·정태근·이성헌 의원 등을 사찰해온 것이 문제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김성호 국정원장-전옥현 1차장 등 국정원 수뇌부까지 사찰해온 것은 상대적으로 별로 주목을 받지 않았다.
이 전 행정관은 김성호 전 국정원장이 물러난 뒤인 2009년 3월 국정원으로 복귀해 인사팀에 있다가, 문제 제기가 계속되자 한직인 국정원 산하 국가정보대학원으로 전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안팎의 소식통에 따르면, 김주성 기조실장 시절에 형님 라인은 원세훈 원장까지 사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지방으로 발령나거나 한직으로 좌천된 TK 세력이 원 원장을 밀어내고 형님의 친구인 최시중 방통위원장을 옹립하려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와 관련 원세훈 원장은 지난해 9월 국회에서 청와대 행정관의 정치인 사찰 의혹을 제기하자 부인하지 않고 "청와대에 파견된 (국정원) 직원으로 청와대가 지휘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국정원이 뭐라고 하기 힘들다"고 했다. 박지원 원내대표가 22일 국회 연설에서 "특정지역 인사들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그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 청와대 일개 행정관에게 야당 대표와 국정원장까지 사찰할 수 있는 초법적 권한을 부여한 사람이 누구냐"고 '형님'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등산 다녀와서 평지에서 뛰어왔다는 MB의 '인지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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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은 20일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북악산 산행을 한 뒤 오찬간담회를 갖는 것으로 취임 3주년 기념 기자회견을 대신했다. 그는 기자들이 "취임 3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과 아쉬웠던 순간"을 묻자 "그 질문은 내가 5년하고 퇴임할 때 물어봐야지, 지금 그런 것을 물어보면 이야기가 안 된다"면서 대통령 임기 말을 하산(下山)길에 비유하는 것을 강하게 부정했다.
"나는 5년 동안 대통령이 산에 올라가서 정상에서 내려온다고 생각하지 않고 평지에서 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르막 올라갔다 내리막 내려오고 하는 개념은 너무나 권력적인 측면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임기 말에) 권력이 빠졌다 어쨌다고 하는데, 나는 처음부터 권력을 써본 일도 없으니까 권력을 놓을 일도 없다."
일개 행정관이 '영포 라인'이라는 이유로 국정원장을 사찰하는 하극상이 벌어지는 데도 대통령은 사람들이 '권력 측면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라 한다. 권력 암투에 '쥐구멍'이 '개구멍' 되고, 대통령의 '눈과 귀'가 멀어 절도미수로 국제적 '개망신'을 당해도 '권력을 써본 일도 놓을 일도 없다'고 딴소리를 한다. 하기는 아무리 동네 뒷산이라고 하지만 등산을 다녀와선 '평지에서 뛰어왔다'고 하면 이는 심각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다.
대통령이 레임덕을 강하게 부정한 바로 그날 '정부 고위관계자'는 <조선일보>에 국정원이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인 T-50 훈련기 협상전략을 빼내려다가 실수를 한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권력 누수의 '쥐구멍'은 권력 내부에서부터 생긴다. 하이에나는 끈질기게 병든 사자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린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인데 대통령만 아니라고 우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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