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갈등 관리 시스템이 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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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 사업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MB 정부에 ‘갈등 관리 전략’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취재 결과, 참여 정부가 만든 갈등 관리 시스템이 현 정부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의 갈등 관리 시스템이 파산했다. 국책 사업을 벌일 때마다 지역 간 갈등이 들끓고, 정부는 갈등을 관리하기는커녕 기름을 붓는 형국이 이어졌다.
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 선정은 올해 2월1일 이명박 대통령이 출연한 ‘대통령과의 대화’ 이후 갑자기 뜨거운 감자가 됐다. 이날 이 대통령은 “과학벨트 관련 공약집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해 원점 재검토를 시사했다. 이후 석 달 넘게 끌어온 입지 논란은 지역 갈등만 증폭시키다가 결국 충청권에 ‘몸통’을 보내고, 호남과 TK에 ‘성의 표시’를 하는 어정쩡한 모양새로 결론이 났다. 전체 사업 규모 5조2000억원 중 대전권에 2조3000억원, TK에 1조5000억원, 광주에 6000억원 등의 예산이 투입된다.
3월30일에는 부산과 대구가 입지를 두고 극단 대립을 펼쳤던 동남권 신공항 건설을 정부가 백지화했다. 2009년 12월 국토연구원은 ‘부산과 (대구가 원했던) 밀양 모두 경제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는데, 정부는 16개월이 지나서야 이를 거의 그대로 인용했다. 1년 넘도록 시간을 끌면서 지역 간 갈등만 키웠다.
옛 주택공사와 토지공사가 합병해 탄생한 LH공사의 지방 이전을 두고도 경남 진주와 전북 전주가 맞붙었다. 참여정부 때 나온 공공기관 지방이전 계획에 따라 주택공사는 진주로, 토지공사는 전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 두 기관이 통합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2009년 4월 국회에 출석한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LH공사를 진주와 전주로 분산 배치하겠다”라고 약속했고, 이후 수차례 이 원칙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국토해양부는 5월13일 LH공사를 진주에 일괄 이전하겠다고 발표했다. 분산 배치는 주공·토공 통합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댔다. 그 말대로라면 결국 주무 부처 장관이 2년 동안 거짓말을 해 갈등을 키운 꼴이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초대형 국책 사업 세 개의 진로가 결정됐다. 지역별 안배, 전면 백지화, 한쪽 손 들어주기 등등 정부가 내놓은 해법은 제각각이었지만, 지역 갈등을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는 점만은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다. 이명박 정부에 ‘갈등 관리 전략’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시사IN> 취재 결과, 전임 정부에서 만들어놓은 갈등 관리 시스템이 이번 국책 사업 갈등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갈등 유발이 예상되는 사안에 그때그때 대응하지 않고, 사회 갈등을 관리하는 통합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관심사였다. 2003년 8월12일 국무회의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지속위)에 ‘각종 갈등의 거국적 조정 및 합리적 해결’을 위한 기능을 만들라고 말했다. ‘시스템 마니아’인 노 전 대통령이, 갈등 관리라는 영역에서도 통합적 시스템을 고안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후 지속위 산하에 ‘갈등 관리 정책 전문위원회’가 생겨 2004년 2월 <갈등관리 시스템 구축방안 연구보고서>를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보고서는 정부 부처별로 ‘갈등관리위원회’를 설치해, 정부 부처·지방자치단체·시민단체·주민 대표 등 각종 이해 당사자가 여기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이를테면 과학벨트나 지방 이전 공기업처럼 여러 지역이 선호하는 시설의 입지를 선정할 때, 추진 단계에서부터 입지 선정의 ‘룰’을 이해 당사자가 함께 합의해 결과에 승복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또 갈등 유발이 우려되는 국책 사업은 추진 단계부터 ‘갈등 영향 분석’을 도입해 갈등을 최소화하도록 했다. 환경 파괴가 우려되는 국책 사업을 추진할 때 환경영향평가를 하도록 한 것과 유사하다. 이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보고서는 ‘갈등관리기본법’ 제정을 제안했다.
노무현 갈등 관리 시스템, MB 정부서 파산
이 법은 2005년 국회에 제출됐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참여정부는 입법이 좌절되자, 2007년 2월 ‘공공기관의 갈등 예방과 해결에 관한 규정’을 대통령령으로 만들어 우회한다. 참여정부 당시 갈등 관리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경주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부지 선정, 경북도청 이전지 선정 등 참여정부의 갈등 관리는 이런 철학 아래 진행했다. 다만 갈등관리기본법이 국회 통과에 실패해 실제 시스템이 갖춰진 것은 대통령령이 제정된 정권 막바지였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갈등 관리 시스템은 외견상 유지된 것처럼 보인다. 올해 3월 국무총리실 사회통합정책실은 ‘2011년도 중앙행정기관 갈등관리업무 추진 지침’을 각 부서에 내려보냈다. 총리실은 이 지침에서 ‘최근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동남권 신공항 등 대형 지역 갈등 현안이 이슈화되어 경제·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고 썼다. 갈등관리위원회 활동과 갈등 영향 분석 또한 어김없이 강조됐다.
이런 시스템은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작동했을까. 과학벨트는 주무 부처가 교육과학기술부, 동남권 신공항과 LH공사는 국토해양부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실(교육과학기술위원회)을 통해 교과부에 갈등관리위원회 현황과 갈등 영향 분석 결과 두 자료를 요청해봤다. 하지만 교과부는 갈등 영향 분석은 실시한 바가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갈등관리위원회라도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까. 교과부는 2011년 4월에 작성한 ‘공공 갈등 관리 추진 계획안’이라는 문서를 보내왔다. 갈등 현안 관리 목표와 추진 과제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가 총동원된 문서다. 하지만 정작 갈등관리위원회가 실제로 어떤 회의를 해서,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내놓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다. 회의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교과부가 보낸 자료에 첨부된 위원회 민간위원 여섯 명 중 두 명에게 전화를 걸어 회의 개최 여부를 확인해봤다. 김두식 교수(연세대·생화학과)는 “제가 그런 위원회 위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정영수 교수(충북대·교육학과)는 “인하대에 저와 동명이인 교수가 있습니다. 착각하신 모양이네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과부 자료에 오른 위원은 충북대 정 교수가 맞다. 회의 개최는 고사하고, 본인이 위원인지도 모르는 인사들을 임의로 명단에 올려 위원회 활동이 있는 것처럼 서류를 꾸민 것이다.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지역 갈등이 뻔히 예측되는 가운데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일까. 교과부 과학벨트기획단 관계자는 “갈등관리위원회가 가동되지는 않았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나름 최선을 다했다는 논리를 폈다. “과학벨트위원회 위원을 선정할 때 지역 안배를 했다. 그렇게 해서 각 지역 의견을 반영하도록 했다.” 하지만 교과부가 말하는 ‘위원회 위원’은 물리·화학·생명·수학·핵공학 등을 전공한 순수 과학자가 대부분이고 도시개발 전공자가 한 명 끼어 있을 뿐이다. 이들이 자신의 출신지를 대표할 수 있는 갈등 관리의 적임자라고 교과부 관계자는 주장한 셈이다. 대표성 있는 각종 이해 당사자를 최대한 참석시켜 충분한 시간을 들여 ‘게임의 규칙’부터 스스로 만들게 한다는, 갈등 관리의 기본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과부 관계자는 또, 과학벨트위 회의 중 갈등 관리를 논의한 회의록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없다. 다만 지역 갈등이 예상되는 사항이므로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절차를 거친다는 원칙을 세웠다.” 교과부 취재에서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갈등 관리 전략’은 ‘속전속결’이었다.
신공항과 LH공사 문제의 주무 부서인 국토해양부도 마찬가지였다. 김진애 민주당 의원실(국토해양위원회)을 통해 국토부에 확인한 결과, 두 건 모두 갈등 영향 분석을 실시하지 않았고, 갈등관리위원회 회의 기록은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았다. 온 나라를 뒤흔든 대형 국책 사업 추진 과정에서, 전임 정부가 고안해둔 갈등 관리 시스템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여당에서도 “청와대, 표 깨는 데 천재적”
참여정부에서 지속위 산하 갈등관리특위 간사로 일하며 갈등 관리 시스템 고안을 주도했던 신창현 환경분쟁연구소 소장은 “갈등 관리에는 다섯 가지 전략이 있다”라고 말했다. “첫째, 회피 전략. 동남권 신공항 갈등에서 MB는 전형적인 회피 전략을 썼다. 둘째, 강행 전략. 4대강 사업이 대표적이다. 셋째, 양보 전략. 넷째, 타협 전략. 과학벨트 나눠먹기는 회피 전략으로 출발해 결국 양보·타협 전략으로 어설프게 귀결됐다. 손실은 손실대로 발생하고 불만은 불만대로 커졌다. 다섯째, 공동 해결 전략. 게임의 규칙을 만들 때부터 이해 당사자를 전부 참여시켜 결과에 승복하게 만드는 것으로, 참여정부 갈등 관리 전략의 핵심이다.”
신 소장이 보기에 MB 정부가 처한 딜레마는 ‘민주화한 사회와 권위주의적인 갈등 관리 전략의 모순’으로 집약된다. “MB 정부가 쓰는 회피 전략과 강행 전략은 전형적인 군사정권 방식이다. 바뀐 세상에 맞게 시스템을 만들어두었지만, 최고 결정권자가 통 관심을 두지 않으니 현장에서도 제대로 운용할 이유가 없다.”
사회 갈등은 눈을 감는다거나 강행 돌파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잠복한 갈등은 선거라는 계기를 만나면 어김없이 폭발한다. 회피·강행 전략으로도 얼렁뚱땅 갈등 관리가 가능했던 권위주의 정권과의 결정적 차이도 이 지점이다. 총선을 불과 1년 앞둔 한나라당 의원들로서는 펄쩍 뛸 노릇이다. 과학벨트 입지 선정 결과가 발표된 5월16일,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은 “지역 분열시키고, 표 깨는 데 청와대는 천재적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출처: 시사인
국가의 갈등 관리 시스템이 파산했다. 국책 사업을 벌일 때마다 지역 간 갈등이 들끓고, 정부는 갈등을 관리하기는커녕 기름을 붓는 형국이 이어졌다.
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 선정은 올해 2월1일 이명박 대통령이 출연한 ‘대통령과의 대화’ 이후 갑자기 뜨거운 감자가 됐다. 이날 이 대통령은 “과학벨트 관련 공약집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해 원점 재검토를 시사했다. 이후 석 달 넘게 끌어온 입지 논란은 지역 갈등만 증폭시키다가 결국 충청권에 ‘몸통’을 보내고, 호남과 TK에 ‘성의 표시’를 하는 어정쩡한 모양새로 결론이 났다. 전체 사업 규모 5조2000억원 중 대전권에 2조3000억원, TK에 1조5000억원, 광주에 6000억원 등의 예산이 투입된다.
ⓒ뉴시스 동남권 신공항과 LH공사에 이어 과학벨트가 또다시 지역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과학벨트 대구·경북 유치 결의대회(위)가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렸다. |
3월30일에는 부산과 대구가 입지를 두고 극단 대립을 펼쳤던 동남권 신공항 건설을 정부가 백지화했다. 2009년 12월 국토연구원은 ‘부산과 (대구가 원했던) 밀양 모두 경제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는데, 정부는 16개월이 지나서야 이를 거의 그대로 인용했다. 1년 넘도록 시간을 끌면서 지역 간 갈등만 키웠다.
옛 주택공사와 토지공사가 합병해 탄생한 LH공사의 지방 이전을 두고도 경남 진주와 전북 전주가 맞붙었다. 참여정부 때 나온 공공기관 지방이전 계획에 따라 주택공사는 진주로, 토지공사는 전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 두 기관이 통합하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2009년 4월 국회에 출석한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LH공사를 진주와 전주로 분산 배치하겠다”라고 약속했고, 이후 수차례 이 원칙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국토해양부는 5월13일 LH공사를 진주에 일괄 이전하겠다고 발표했다. 분산 배치는 주공·토공 통합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댔다. 그 말대로라면 결국 주무 부처 장관이 2년 동안 거짓말을 해 갈등을 키운 꼴이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초대형 국책 사업 세 개의 진로가 결정됐다. 지역별 안배, 전면 백지화, 한쪽 손 들어주기 등등 정부가 내놓은 해법은 제각각이었지만, 지역 갈등을 극단으로 치닫게 했다는 점만은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다. 이명박 정부에 ‘갈등 관리 전략’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시사IN> 취재 결과, 전임 정부에서 만들어놓은 갈등 관리 시스템이 이번 국책 사업 갈등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뉴시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선정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보고서는 정부 부처별로 ‘갈등관리위원회’를 설치해, 정부 부처·지방자치단체·시민단체·주민 대표 등 각종 이해 당사자가 여기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이를테면 과학벨트나 지방 이전 공기업처럼 여러 지역이 선호하는 시설의 입지를 선정할 때, 추진 단계에서부터 입지 선정의 ‘룰’을 이해 당사자가 함께 합의해 결과에 승복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또 갈등 유발이 우려되는 국책 사업은 추진 단계부터 ‘갈등 영향 분석’을 도입해 갈등을 최소화하도록 했다. 환경 파괴가 우려되는 국책 사업을 추진할 때 환경영향평가를 하도록 한 것과 유사하다. 이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보고서는 ‘갈등관리기본법’ 제정을 제안했다.
노무현 갈등 관리 시스템, MB 정부서 파산
이 법은 2005년 국회에 제출됐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참여정부는 입법이 좌절되자, 2007년 2월 ‘공공기관의 갈등 예방과 해결에 관한 규정’을 대통령령으로 만들어 우회한다. 참여정부 당시 갈등 관리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경주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부지 선정, 경북도청 이전지 선정 등 참여정부의 갈등 관리는 이런 철학 아래 진행했다. 다만 갈등관리기본법이 국회 통과에 실패해 실제 시스템이 갖춰진 것은 대통령령이 제정된 정권 막바지였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갈등 관리 시스템은 외견상 유지된 것처럼 보인다. 올해 3월 국무총리실 사회통합정책실은 ‘2011년도 중앙행정기관 갈등관리업무 추진 지침’을 각 부서에 내려보냈다. 총리실은 이 지침에서 ‘최근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동남권 신공항 등 대형 지역 갈등 현안이 이슈화되어 경제·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고 썼다. 갈등관리위원회 활동과 갈등 영향 분석 또한 어김없이 강조됐다.
이런 시스템은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작동했을까. 과학벨트는 주무 부처가 교육과학기술부, 동남권 신공항과 LH공사는 국토해양부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실(교육과학기술위원회)을 통해 교과부에 갈등관리위원회 현황과 갈등 영향 분석 결과 두 자료를 요청해봤다. 하지만 교과부는 갈등 영향 분석은 실시한 바가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갈등관리위원회라도 제대로 돌아가고 있을까. 교과부는 2011년 4월에 작성한 ‘공공 갈등 관리 추진 계획안’이라는 문서를 보내왔다. 갈등 현안 관리 목표와 추진 과제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가 총동원된 문서다. 하지만 정작 갈등관리위원회가 실제로 어떤 회의를 해서,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내놓지 못했다.
당연한 결과다. 회의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교과부가 보낸 자료에 첨부된 위원회 민간위원 여섯 명 중 두 명에게 전화를 걸어 회의 개최 여부를 확인해봤다. 김두식 교수(연세대·생화학과)는 “제가 그런 위원회 위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정영수 교수(충북대·교육학과)는 “인하대에 저와 동명이인 교수가 있습니다. 착각하신 모양이네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과부 자료에 오른 위원은 충북대 정 교수가 맞다. 회의 개최는 고사하고, 본인이 위원인지도 모르는 인사들을 임의로 명단에 올려 위원회 활동이 있는 것처럼 서류를 꾸민 것이다.
부산이 원했던 가덕도 신공항(왼쪽)과 대구가 원했던 밀양 신공항(오른쪽) 조감도. 둘 다 백지화 결론이 났다. |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지역 갈등이 뻔히 예측되는 가운데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일까. 교과부 과학벨트기획단 관계자는 “갈등관리위원회가 가동되지는 않았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나름 최선을 다했다는 논리를 폈다. “과학벨트위원회 위원을 선정할 때 지역 안배를 했다. 그렇게 해서 각 지역 의견을 반영하도록 했다.” 하지만 교과부가 말하는 ‘위원회 위원’은 물리·화학·생명·수학·핵공학 등을 전공한 순수 과학자가 대부분이고 도시개발 전공자가 한 명 끼어 있을 뿐이다. 이들이 자신의 출신지를 대표할 수 있는 갈등 관리의 적임자라고 교과부 관계자는 주장한 셈이다. 대표성 있는 각종 이해 당사자를 최대한 참석시켜 충분한 시간을 들여 ‘게임의 규칙’부터 스스로 만들게 한다는, 갈등 관리의 기본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과부 관계자는 또, 과학벨트위 회의 중 갈등 관리를 논의한 회의록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없다. 다만 지역 갈등이 예상되는 사항이므로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절차를 거친다는 원칙을 세웠다.” 교과부 취재에서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갈등 관리 전략’은 ‘속전속결’이었다.
신공항과 LH공사 문제의 주무 부서인 국토해양부도 마찬가지였다. 김진애 민주당 의원실(국토해양위원회)을 통해 국토부에 확인한 결과, 두 건 모두 갈등 영향 분석을 실시하지 않았고, 갈등관리위원회 회의 기록은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았다. 온 나라를 뒤흔든 대형 국책 사업 추진 과정에서, 전임 정부가 고안해둔 갈등 관리 시스템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여당에서도 “청와대, 표 깨는 데 천재적”
참여정부에서 지속위 산하 갈등관리특위 간사로 일하며 갈등 관리 시스템 고안을 주도했던 신창현 환경분쟁연구소 소장은 “갈등 관리에는 다섯 가지 전략이 있다”라고 말했다. “첫째, 회피 전략. 동남권 신공항 갈등에서 MB는 전형적인 회피 전략을 썼다. 둘째, 강행 전략. 4대강 사업이 대표적이다. 셋째, 양보 전략. 넷째, 타협 전략. 과학벨트 나눠먹기는 회피 전략으로 출발해 결국 양보·타협 전략으로 어설프게 귀결됐다. 손실은 손실대로 발생하고 불만은 불만대로 커졌다. 다섯째, 공동 해결 전략. 게임의 규칙을 만들 때부터 이해 당사자를 전부 참여시켜 결과에 승복하게 만드는 것으로, 참여정부 갈등 관리 전략의 핵심이다.”
ⓒ시사IN 백승기 경남 진주와 전북 전주가 유치 경쟁을 펼친 LH공사(위)는 진주로 일괄 이전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
신 소장이 보기에 MB 정부가 처한 딜레마는 ‘민주화한 사회와 권위주의적인 갈등 관리 전략의 모순’으로 집약된다. “MB 정부가 쓰는 회피 전략과 강행 전략은 전형적인 군사정권 방식이다. 바뀐 세상에 맞게 시스템을 만들어두었지만, 최고 결정권자가 통 관심을 두지 않으니 현장에서도 제대로 운용할 이유가 없다.”
사회 갈등은 눈을 감는다거나 강행 돌파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잠복한 갈등은 선거라는 계기를 만나면 어김없이 폭발한다. 회피·강행 전략으로도 얼렁뚱땅 갈등 관리가 가능했던 권위주의 정권과의 결정적 차이도 이 지점이다. 총선을 불과 1년 앞둔 한나라당 의원들로서는 펄쩍 뛸 노릇이다. 과학벨트 입지 선정 결과가 발표된 5월16일,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은 “지역 분열시키고, 표 깨는 데 청와대는 천재적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출처: 시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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