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죤, CEO와 노동자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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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작성일 11-07-19 22:31 조회 2,940 댓글 0본문
섬유유연제의 대명사인 피죤은 대한민국 주부들에게 가장 친숙한 브랜드 중 하나다. 1979년 창사 이래 30여 년간 줄곧 업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독보적 위상을 지켜왔다. 전체 임직원이 300명(비정규직 포함)도 안 되는 중견 기업이지만 한눈팔지 않고 한 사업에만 집중하며 재벌 대기업, 다국적기업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우위를 지켜왔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50%에 육박하던 시장점유율이 올 상반기 20%대까지 급락하고, 경쟁사인 LG생활건강에 밀려 2위로 추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피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적자를 흑자로 반전시킨 사장 해임
시장에서는 피죤의 추락 이유로 연초 제품 가격 인상, LG의 티슈형·고농축형 신제품에 대한 대응 미진, 대형마트 할인행사 중단 같은 마케팅 차질 등을 꼽는다. 피죤의 이유연(47) 부회장은 “대형마트 공급 중단에 따른 일시적 매출 감소 때문”이라며 “매출이 회복세를 보이고 곧 신제품 출시도 예정돼 있어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의 실적 부진은 물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피죤의 위기 징후는 이미 몇년 전부터 감지됐다. 매출액은 2008년 1755억원을 기록한 뒤 줄곧 하락세다. 2010년에는 1437억원으로 2009년 대비 15% 감소했다. 당기순이익은 15억원으로 76% 급감했다. 영업이익률도 4%로 전년의 7.2%에서 급락했다. 단기차입금이 284억원으로 60%나 급증하며, 부채비율이 80%에서 104%로 껑충 뛰었다. 기업경영의 3대 요소인 성장성·수익성·재무안정성이 모두 악화 일로다. 주력 제품의 시장점유율도 2009년 이후 내림세다. 수면 밑에 감춰진 피죤 위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피죤은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회사입니다. …우리는 피죤을 더 내실 있는 강한 회사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지난 2월8일 이은욱 신임사장의 취임 메시지다. 국내 생활용품 업계 1위인 유한킴벌리 부사장 출신인 이 사장은 윤리·고객 중심 경영과 혁신경영을 강조했다. 또 인간중심경영으로 유명한 유한킴벌리 출신답게, 회사의 진정한 경쟁력은 경영자와 사원 간의 신뢰에서 나온다며 직장 내 평생학습 체제 구축을 통한 인재 양성과 일하기 좋은 직장 만들기를 약속했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피죤은 이 사장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 빠르게 반전의 모멘텀을 마련했다. 마케팅·영업·생산담당 임원을 새로 영입해 조직을 재정비하고, 지난 4월 초에는 새로운 비전을 담은 ‘굿피죤 선포식’을 치렀다. 월매출도 2월 46억원을 바닥으로 3월 60억원, 5월 90억원으로 빠르게 회복됐다. 월영업이익은 2월 3억원 적자에서 4월에는 18억원 흑자로, 극적으로 반전했다. 하지만 창업자인 이윤재(77) 회장은 지난 6월 초 이 사장을 전격 해임했다. 이 사장이 취임한 지 불과 넉 달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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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장의 해임 이유는 지난 4월 말 사업전략회의를 겸한 직원 워크숍을 개최하며 회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비용을 과다 지출했다는 것이다. 또 1천만원 이상의 자금결제일 때는 회장에게 보고하라는 전결 규정을 어겨 원자재 수입을 승인하고, 회장과 사장이 공동대표를 맡기로 했는데 이 사장 자의로 각자 대표로 등기했다는 것도 덧붙었다. 하지만 회사 임직원들의 설명은 다르다. 한 임원은 “워크숍은 회장에게 사전 보고했고, 이 회장도 행사에 직접 참가했다”며 “행사 비용도 2600만원으로 생산직을 제외한 전 직원이 참석한 것에 비춰보면 많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간부도 “원자재 수입 건은 이 사장이 사전 보고한 것으로 안다”며 “임원 등기는 회사에서 서류 처리를 했기 때문에, 이 사장에게 책임을 묻을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이 회장은 이 사장을 영입할 때, 차입·투자·해외사업 등을 제외한 나머지 일상적 경영은 사장에 전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다. 이 전 사장은 계약기간이 2년인데 부당하게 해임됐다며 손해배상소송을 낼 계획으로 알려졌다.
10년 이상 6%, 2년 미만 임직원 절반
이 회장은 워크숍 건과 관련해 마케팅·연구개발 담당인 김아무개 상무도 지난 6월 중순 해임했다. 김 상무는 3월 중순에 입사했다. 재직 기간은 석 달 남짓이다. 또 마케팅 부서 직원 8명 중 5명을 다른 부서로 인사 발령했다. 특히 마케팅팀장인 김아무개씨는 지난 6월 말 지방 지점의 말단 영업사원으로 징계성 전배를 당했다. 입사 1년 만에 사실상 회사를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받은 셈이다. 김 전 상무는 “전 직장에서 24년간 근무하다 지난 3월 초 이 사장의 권유로 피죤을 좋은 회사로 만들자는 일념으로 합류했는데, 마땅히 할 일인 직원 워크숍 개최를 이유로 해고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김 전 상무도 해임무효소송을 추진하고 있다. 김 전 팀장은 지난 7월1일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전보·전근 취소 및 원상회복 신청을 냈다. 이주연 부회장은 이에 관해 “개별 인사 문제는 말하기 곤란하다”고 답변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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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죤의 생산직 노동자 운영도 비정상적이다. 피죤은 충북 진천과 경기도 부평 2곳에 공장이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130여 명(생산량에 따라 가변적)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사내하청 노동자다. 한 간부는 “2007년 영업사원들 중심으로 노조를 설립하자, 이 회장이 노조를 없애려고 직원들을 대거 쫓아냈고, 이후 노조 설립 가능성이 높은 생산직은 사내하청으로 모두 전환했다”고 귀띔한다.
“이회장, 임직원 폭행과 폭언 예사”
고용불안은 직원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고, 회사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암적 요인이다. 이는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 종업원이고, 경영자와 종업원 간에 신뢰가 없으면 회사가 발전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돼 사람중심·가족친화경영에 힘쓰는 다른 기업들의 추세와 정면 배치된다. 한 팀장은 “직원들의 가장 큰 소원은 해고불안 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라며 “피죤의 고용불안은 인권 측면에서 다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올해 입사한 한 임원은 “처음 부서를 맡고 보니 직원 대부분이 입사 1년 미만으로 제대로 업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며 “극심한 고용불안으로 조직이 붕괴되고, 혁신이 불가능한 것이 실적 악화의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경쟁사의 한 간부는 “직원이 1년에 절반 이상씩 바뀌는 회사가 지금까지 어떻게 유지돼왔는지 같은 업계에서도 미스터리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주연 부회장은 이에 대해 “다른 대기업들도 인원 교체가 적지 않지만 규모가 크다 보니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며 “경쟁사들이 피죤에 대해 안 좋은 말을 지어내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피죤의 최고경영진은 창업자 일가가 장악하고 있다. 이주연 부회장은 창업자인 이 회장의 딸이고, 안금산(74) 감사는 아내다. 고용불안의 뿌리에는 창업자 일가의 독단경영이 자리하고 있다. 올해 초 대형마트들에 대한 할인상품 공급 중단과 진천공장 생산 중단 조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회장은 지난 1월 중순 진천공장을 갑작스레 방문해 수익성이 낮은 대형마트에 대한 할인상품 공급을 중단하라며 직접 공장 가동 스위치를 끄는 돌발행동을 했다. 한 간부는 “공장에서는 이 회장의 방문 계획을 사전에 전혀 몰랐다”며 “공장 가동 중단으로 대형마트들과 맺은 물품 공급이 이뤄지지 않아 6천만원 가까운 배상금까지 물었다”고 털어놨다.
창업자 일가의 임직원을 대하는 시각도 전근대적이다. 한 임원은 “이 회장이 직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내가 먹여 살려주는 노비’라는 식의 표현을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직원들을 회사의 귀중한 자산이 아니라 일회용품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한 간부는 “임직원들에 대한 폭언·욕설·폭행도 예사여서, 지난해 말 남아무개 인사팀장이 폭행을 당했고, 2009년에도 손아무개 팀장이 직원들 앞에서 슬리퍼로 수십 차례나 얼굴을 맞았다”며 “이들은 모두 회사를 떠났다”고 말했다. 흔히 대기업 총수를 황제에 비유하지만, 피죤의 이 회장은 ‘인권유린을 서슴지 않는 독재자’라는 비판이 나온다.
창업자 일가의 회사공금 횡령 의혹
회사 안팎에서는 창업자 일가와 관련된 각종 비리 의혹도 제기된다. 대표적인 것이 회사공금 횡령 의혹이다. 한 간부는 “오너 일가는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가면서도 시장조사 명목으로 관련 경비를 모두 회삿돈으로 충당한다”고 말했다. 비행기삯과 별도로 회장은 하루에 활동비와 숙박비 조로 2천달러, 부회장은 1050달러씩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활동비를 따로 받는데도 해외 현지에서의 지출은 모두 회사비용으로 이중 부담시킨다. 다른 간부는 “올해 들어 6월 초까지 회사의 총 해외출장비 지출은 1억8천만원에 달하는데, 직원들의 해외출장은 단 한 건으로 비용이 300만원도 안 된다”고 털어놨다. 올해 들어 이 회장 부부는 거의 매달 중국을 방문했다. 이 부회장은 미국 2차례, 영국 1차례, 중국 4차례씩 다녀왔다. 또 이 회장은 수시로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가든파티를 열면서, 비용을 회삿돈으로 충당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한 간부는 “지난 6월 중에만 2차례의 가든파티 비용으로 2천만원 이상 지출했다”고 귀띔했다. 비상근감사인 이 회장의 아내에게는 1억5천만원의 연봉과 차량 지원 외에도 운전기사 봉급과 차량관리비로 연간 4400만원을 지출한다.
비자금 조성과 분식회계 의혹도 제기된다. 한 임원은 “이 회장은 정식 결제 라인을 통하지 않고 수시로 자금부서에 거액의 인출을 지시한다”며 “영수증 없이 이뤄지는 불법 지출로 인해 담당부서는 분식회계를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털어놨다. 한 간부는 “올해 들어 설날 상여금과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지급한 적이 없는데, 장부상으로는 지급된 것으로 돼 있다”고 의혹을 뒷받침했다. 그 밖에도 공장 리모델링비 허위 계상, 중국 톈진의 현지 법인 편법·불법 지원과 비자금 조성 의혹 등도 함께 제기된다. 이런 숱한 의혹에도 이 회장은 2009년 성실납세 공로로 국세청장상을 받아, 3년간 세무조사 면제 혜택을 받고 있다.
이 회장이 임직원을 자주 교체하는 실제 이유를 내부 비리와 연관시키는 이가 많다. 한 임원은 “회장의 직원들에 대한 의심은 거의 병적”이라며 “자신이 의심받을 짓을 많이 하다 보니 남을 자꾸 의심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은욱 전 사장이 이 회장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창업자 일가의 전횡을 지적한 것이 발단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간부는 “이 사장이 이 회장에게 잦은 직원 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고용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구체적인 비리 증거도 없는데 무조건 임직원을 해고하라는 회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전 사장은 중국 법인에 대한 막대한 인건비 지원과 관련해서도 시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간부는 “직원 20여 명이 중국 법인에 파견근무를 하고 있는데, 연간 12억원의 인건비를 모두 피죤에서 부담한다”고 말했다. 중국 법인은 지난해 106억원의 매출에, 65억원의 적자를 낼 정도로 부실의 늪이다. 한 임원은 “오너 일가는 직원들이 오래 근무하면 자기 비리를 알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이 회장은 “직원들이 오래되면 아이디어가 고갈되기 때문에 자주 교체해야 한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장수냐 소멸이냐, 갈림길의 피존
피죤의 한 전직 사장은 “재벌은 비리가 심하다지만 그래도 사회적 감시를 받는데, 피죤 같은 비상장 중견 대기업은 사회적 감시가 소홀해 내부 비리와 전횡이 오히려 더 심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피죤의 인간경시경영과 수많은 비리 의혹은 이윤재 회장이 평소 강조하는 윤리·투명경영에도 정면 배치된다. 피죤의 사훈은 ‘화합’과 ‘창의’다.
국내 거래소 상장기업의 평균수명은 33년이다. 일반 기업의 경우 보통 30년을 넘기기가 힘들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는 미국의 GE, 엑손모빌, 존슨앤드존슨처럼 탁월한 성과를 지속적으로 내는 장수 기업들도 있다. 고용안정과 노사협력은 장수 기업의 공통 유전인자(DNA)로 꼽힌다.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수석연구원은 “글로벌 장수 기업들은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노사상생의 문화를 일관되게 구축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국내 장수 기업들도 가족문화에 기반을 둔 강한 일체감, 인위적인 고용조정 자제, 직원 교육투자 중시, 노사 동반자 문화 등이 공통점”이라고 말했다. 피죤은 공교롭게 올해가 창립 32돌이다. 평범한 기업이라면 자연수명이 다돼가는 셈이다. 장수 기업이 되려면 그에 맞는 DNA를 갖춰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그런데 피죤의 이윤재 회장 일가는 기자가 회사를 방문해 인터뷰를 하던 지난 7월13일 당일에도 경영지원담당인 이아무개 상무를 전격 해임했다. 이 상무는 해임 사유도 제대로 통보받지 못했다고 한다. 피죤의 회장 일가는 정말 자신들의 운명을 모른단 말인가?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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