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19>'애국동지대표회' 간판스타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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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산맥 쪽에서 기적소리가 들렸다. 들릴락 말락 가냘픈 휘파람소리였다. 기차는 아직도 산속을 빠져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약 이십분쯤이면 기차는 유니언 역에 들어설 것이다. 박용만은 대합실에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벌써 말씀은 드렸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 오시는 이승만씨는 현재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에 재학 중이십니다. 스티븐스 저격사건으로 구속된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의 법정통역 일 때문에 그간 샌프란시스코에 계셨지요. 이번 회의를 위해 잠시 틈을 내 들리시게 된 겁니다. 올해 춘추가 서른셋, 그러니까 저 보다 여섯 살 많은 연상이지요. 조국에서 독립협회 활동을 하시다가 오래 동안 감옥에서 고생하신 분입니다. 제게는 옥중 동지이자 형님뻘이지요. 예를 다해 환영해 드리도록 합시다."
그러고서 한참 서성거리고 있는데 고막을 찢는 기적소리와 함께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박용만을 둘러싼 사람들은 마치 헤쳐모여 구령이라도 받은 듯 즉각 일렬횡대의 대열을 만들었다. 그 중에는 군복을 차려 입은 사람도 몇 있었다. 미국의 대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을 때 입는 교련복과 같은 것이었다.
이승만은 많은 승객들이 내린 다음 나타났다. 개찰구 앞에서 기다리던 박용만이 그를 대열 앞으로 인도해 나왔다. 군복을 입은 장정 한 사람이 구령을 외쳤다.
"이승만 동지를 향해 경례!" 그러자 한 줄로 똑바로 서 있던 20여명의 장정들이 일제히 거수경례를 하면서 "이승만 동지를 환영합니다"라고 대합실이 떠나가게 고함을 질렀다. 이어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졌다.
뜻밖의 환영에 이승만은 상기된 얼굴이었다. 마치 서양 선교사의 한국 말투처럼 "반갑습네다"라고 인사했다. 더듬거리듯 약간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승만은 대열의 맨 왼쪽부터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다. 박용만은 그 옆에서 차례로 소개를 했다. "네브래스카에서 오신 김장호씨입니다." 군복을 입은 그는 구한말 군인 출신.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왔다가 미국 본토로 건너왔다. 네브래스카 주 커니 시에 있는 군사고등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이승만은 두 손으로 김장호의 손을 잡았다. "이분은 캔자스에서 오신 이명섭씨입니다."
차례로 소개가 끝나갈 즈음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또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오우, 미스터 윤이로군요. 나도 정말 반갑습네다." 윤병구였다. 이승만이 1904년 11월 29일 호놀룰루에 내렸을 때 부두에 마중 나온 사람이었다. 또 3년 전 이승만과 함께 당시 미국 대통령 시오도어 루즈벨트를 찾아가 면접한 사람이었다. 미국이 주선한 러일강화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달라는 청원서를 가지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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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과 박수소리는 대합실의 풍경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말 없이 키스를 하거나 조용히 악수를 나누는 게 서양식 풍경 아닌가. 취재를 위해 대합실에 나와 있던 덴버타임즈 기자도 그 시끌벅적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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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상의 강열함 때문이었든지 기자는 그 날자(7월 11일자) 기사에 고강도 제목을 붙였다. 'Korean Patriots Gather in Denver to Prepare for War(한국의 애국자들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덴버에 모이다)'. 이것은 기자의 금기를 범한 너무 선동적인 제목이 아닌가. 그 제목 밑에 박용만의 얼굴을 크게 실었다. 그리고 사진 밑에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정치가인 이승만'이라고 설명을 붙였다. 박용만을 이승만으로 혼동한 엉뚱한 착오를 일으킨 거였다.
덴버타임즈의 이승만에 대한 기사내용이었다. 비록 혼동을 일으켜 이승만 대신 박용만의 사진을 크게 실었지만 어쨌든 이승만은 '애국동지대표회'의 간판스타로 집중조명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간판스타가 문제였다. 마땅히 참석해야 할 유력인사나 단체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스티븐스 저격사건'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1908년 3월 23일 의사 장인환과 의사 전명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한국침략을 옹호하는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저격했다. 장인환은 대동보국회 소속이었고, 전명운은 안창호계의 공립협회 소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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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승만은 통역이나 하는 것은 신사의 체면을 깎는 비천한 짓이고 크리스천 으로서 살인자를 옹호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한 때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서 이승만과 함께 일했던 김현구의 '이승만 약전'에 나오는 얘기다. 이승만에게 학을 뗀 사람이라 좋지 않게 적었을 수도 있다.
청년 이승만의 자서전에도 스티븐스 사살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하얼빈(주(註)-그 이후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저격)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은 이 두 살해사건은 일본의 선전기관들이 한국 사람들을 흉도들이고 최악의 악당들이라고 묘사하는데 대대적으로 이용됐다. 나는 그때 캘리포니아 주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일본의 선전에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한국에서나 교회에서나 한국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자서전의 이 구절을 보면 한국 사람들의 분노와 복수심은 2차적인 것이라는 여운을 남긴다. 외려 그로 인한 나쁜 이미지를 우려하는 인상이다.
그리고 재판이 자주 연기되고 가을학기가 시작되자 이승만은 학교가 있는 동부로 떠나고 말았다. 두 의사는 생명을 던졌지만 이승만은 공부를 던질 수 없었다. 휴학을 해서라도 두 의사의 의거를 뒷바라지할 성의가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대한인국민회의 조직을 꾸려내고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기 위해 박용만은 다니던 대학을 6개월 휴학하지 않았던가.
'스티븐스 저격사건'은 잠자던 한인들을 강타했다. 유능한 변호사 세 사람을 선임하고 미주, 하와이, 조선, 만주 할 것 없이 주머니를 털어 재판비용 $7390을 모금했다. 미국 변호사 중 아일랜드 출신 카그린은 두 의사의 무료변호를 자청했다.
'애국동지대표회'에 공립협회측은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장,전 두 의사의 변호자금 모금위원이었던 새크라멘토 대표 김성권도 참석하지 않았다. 또 윤병구를 대동하고 유럽을 순방한 후 미국으로 돌아와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자세히 들은 이상설도 참석하지 않았다. '애국동지대표회' 간판스타 이승만에게 뭔가 찜찜함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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