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시대 18>-애국동지대표회를 덴버에서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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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애국동지대표회를 덴버에서 열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오늘날 우리 한국은 세계에 수치당한 나라이오. 오늘날 우리 한인은 세계에 한을 품은 백성이라. 사천년 영광이 땅에 떨어졌으니 이것을 뉘 아니 회복코자 하며 이천만 생명이 하늘을 부르짖으니 이것을 뉘 아니 슬퍼하리오.(중략)
그러나 천백의 사람이 서로 흩어지고 수삼 년에 소식이 서로 격절하여 비록 비상한 사변이 이왕 있어서도 온 사회가 이미 공동한 의논이 없었고 또한 절대한 기회가 앞에 당하여도 매양 동일한 방책이 없었으니 이는 사회의 결점이요 국사의 방해라.
이에 우리 덴버 지방에 있는 무리들의 의향이 이로부터 일어나고 의논이 이로조차 동일하여 어느 날이든지 기회 있는 대로 북미에 있는 우리 한인들이 한번 큰 회를 열고 매사를 의논코자 위선 이곳 동포께 물으매 열심히 상응하고 또한 부근 각처에 통하매 기쁨으로 대답하여 본년 1월 1일 하오 8시에 덴버에서 임시회를 열고 각 동포가 이를 의론할 새 첫째 회명은 '애국동지대표회'로 명하고 둘째 회기는 본년 6월 초 10일로 정한 후 그 동안 약간 일을 정돈하고 이제 비로소 한 글장을 닦아 위선 태평양 연안과 미국 내지 각처와 몇 하와이 군도에 계신 각 동포에게 고하나니, (하략)"
이것은 박용만이 쓴 애국동지대표회 발기취지서다. 망해가는 나라의 국권을 회복시키려면 각 지역 운동단체의 연대는 필수적이었다. 애국동지대표회는 해외에 산재한 운동세력을 한 데 묶어내는 최초의 시도였다.
끝없이 달리는 대륙의 중부 평원은 로키 산맥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그 로키 산맥의 동쪽 산자락에 번성하기 시작한 도시가 콜로라도 주 덴버다. 덴버는 19세기 중반 금을 찾으려고 로키 산맥 쪽으로 몰려든 소위 골드러시 때 생긴 도시다. 인근엔 탄광이며 광산들이 많았다. 게다가 사탕무 농장과 철도회사에서도 일손이 달리는 때였다. 하와이를 떠난 동포들은 샌프란시스코에 내려 다시 기차를 타고 로키 산맥을 넘어 덴버에 몰려들었다.
1905년 2월 19일 사이베리아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내렸던 박용만의 다음 동선(動線)은 이렇다. 한 달 반쯤 있다가 로스앤젤레스로 내려가 먼저 와 있던 옥중동지 신흥우를 만나 장래를 의논했다. 다시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오클랜드로 올라와 동포들과 사귀며 일대의 노동시장을 익혔다.
9월 27일 숙부 박희병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여섯 살짜리 이관수, 일곱 살짜리 유일한, 열한 살짜리 이종희를 데리고 왔다. 이 소년들의 부모들이야말로 근래 한국을 휩쓸고 있는 조기교육의 선구자들이 아닌가.
박희병 (박장현 1871~1907) - 2007년 덴버 한인회에서 세움(덴버 리버사이드시립 묘지)
박희병은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 있는 유니온 퍼시픽 철도회사를 통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한국에 나와 있던 네브래스카 주 출신 선교사들이 추천서를 써주었기 때문이다. 도착 사흘 만에 네브래스카 주의 커니시로 떠나는 숙부와 박용만은 동행했다.
박용만과 박희병은 구직을 위해 커니 시로 오는 한인들에게 철도회사의 일자리를 쉽게 구해줬다. 그리고 고학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 싶은 유학생들에겐 일자리와 입학을 주선해주었다.
네브래스카 주는 캘리포니아 주와 달랐다. 동양 사람이 아직 적어 캘리포니아처럼 인종차별이 심하지 않았다. 기독교 전통을 잘 지키며 외지에서 온 타인종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친절하게 맞이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중고등학교까지는 학비를 받지 않았다. 빈 손들고 미국에 온 젊은 한인들에겐 그야말로 천사의 땅이었다. 그 때문에 한인 유학생들 중 절반 이상인 60여 명이 네브래스카 주로 몰렸다.
다음 해 여름 박용만과 숙부는 덴버로 이주했다. 사람들이 홍수처럼 몰려드는 붐타운이었기 때문이다. 돈을 좀 벌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시내 중심 지역인 아라파회 거리에 방이 여럿 있는 건물을 전세 냈다. 몰려들 한인들을 대비해서 직업소개소 겸 숙박소를 차린 거였다.
덴버시 arapahoe ST. 에 있는 직업소개소 자리의 현재 모습
현지 회사들은 중간에 소개소를 통해 일꾼들을 구했다. 임금도 소개소에 지불했다. 소개소는 임금에서 10%의 커미션을 뗐다. 박용만은 한인들 몇 백 명의 중간 보스가 된 셈이었다. 한 일 년 같이 일하던 숙부는 다음 해 여름 갑자기 위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박용만의 일편단심은 독립운동이었다. 독립운동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고민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는 모래알 같은 단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내는 게 급선무 아닌가. '애국동지대표회'를 구상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1908년 6월 10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뽑는 전당대회가 덴버에서 열릴 참이었다. 전당대회는 미국 각지에서 사오천 명의 대의원들을 불러들인다. 그들에게 한국의 존재를 드러내고 국외에도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면 꿩 잡는 김에 알은 거저 줍는 게 아닌가.
대회는 순조롭게 추진되지 않았다. 우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안창호계의 반응이 미온적이었다. 그래서 실제 참석 인원은 36명 밖에 되지 않았다. 연해주에서는 헤이그에 고종의 밀사로 갔던 이상설과 또 지역연고가 없어 보이는 이승만을 대표로 위임했다.
민주당의 전당대회 기간에 맞추려했지만 이승만이 제때 오지 못하고 그의 일정에 맞추다 보니 한 달이나 연기됐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 두 의사의 법정통역으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판이 연기돼 마침내 7월 9일 이승만이 도착했다.
다음날 임원선거가 있었는데 회장에 이승만, 국문서기에 박용만, 영문서기에 윤병구가 선출됐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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