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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17>-다시 터진 이승만파 회계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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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도르테아
댓글 0건 조회 2,367회 작성일 10-10-1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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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박용만은 샌프란시스코에 두 달 머물다가 8월 11일 맷소니아호를 타고 하와이를 향한다. 그리고 그 해가 끝나가는 12월, 이승만과 함께 '국민보'의 공동논설자가 된다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김종학 자살 미수 사건 때문에 찢긴 그의 마음은 아직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단결이 없는 독립운동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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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국민보를 찍어내던 인쇄기 

1916년 6월 국민회의 이승만파 임원들은 박용만을 주필로 재임용한다고 장문의 사설을 실었다. 좀 길기는 하지만 참고 읽자. 당시 관련자들 나아가서는 하와이 동포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본월 12일에 현임 당국쟈(당국자)들과 각 구역 참의원 제씨와 학사 박용만씨와 리승만 박사 졔(제) 인도쟈들이 국민춍회관 내에 합동츌셕하야 국민 공동의 사업증진 방침을 란샹(난상) 협의한 결과로 우리의 귀하고 친경친애하는 박용만군이 다시 국민보샤로 들어와셔 자기의 국민으로 더브러(더불어) 생사존망을 갓치(같이) 하기로 쾌히 허락하엿다 하니 이는 진실로 본샤의 영광이오 본보애독 졔군의 다행할 뿐만 안이라 재외한인 단테(단체)의 대복이며 다시 2천만 본국 동포를 위하야 큰 행복이니 이 쇼식을 듯난(듣는) 우리 국민들은 응당 북을 치며 라발(나팔)을 불고 깃버(기뻐) 뛰며 춤추고 노래함을 마지 못하리로다. (중략)(주(註)-'2천만 본국 동포를 위하야 큰 행복이니...' 운운하는 것은 과대포장이 너무 지나치다.)

 

왕년 졍변(정변)에 일반 국민이 박용만군에 대하야 얼마즘(얼마쯤) 셥셥히(섭섭히) 생각한 것은 아모 달은(다른) 리유가 없고 다만 사뎨지간(사제지간)에 밋음(믿음)과 사랑이 넘어(너무) 깁헛던(깊었던) 세 달 뿐이니 당초에 박용만군이 우리와 인연을 맷고 하와이에 자최를 붓친지(붙인지) 거금 3, 4 셩샹(성상)에 불샹하고 가련한 5쳔 국민을 위하야 내티(내치)와 외교에 츙셩을 다하엿슴으로쎠 그 공덕이 재외 한인을 화하고 다시 텬디(천지)에 빗난지라 그런고로 일반 동포는 뎌(저)를 완젼무결하고 광명졍대한 참 인도쟈로 단단히 밋고(믿고) 죽던 살던 박군의 명령을 복종하며 범사에 지도를 밧하(받아) 행하기로 결심하얏다가 시운이 불행하고 우리 국민의 덕이 박함인지 몃낫 불량한 동포들이 우리를 속히고(속이고) 불샹하고 가련한 동족의 고열을 망라하야 뎌희들의 등을 덥게하난 쟝젹(장적)이 탈로되난 때에 오히려 국론을 압박하며 공회를 뎐복(전복)코져하난 심슐노(심술로) 젼후 못된 풍랑을 닐야키던(일으키던) 동시에 박군이 이랄(이를) 도라보지 안이하고 우리를 떠나 홀연히 대륙으로 건너가난지라.(주(註)-일반 동포는 저를 완전무결하고 광명정대한 참 인도자로 단단히 믿고 죽던 살던 박군의 명령을 복종하며...' 운운하는 것을 볼 때 하와이 동포들의 신망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2년 후 다시 파란이 일어나자 박용만은 이승만파에 의해 타도의 대상이 됐다.)   

그윽히 생각하니 슬푸도다 우리가 모셔 갓치(같이) 밋고 바라든 박용만이 분분한 이때를 당하야 자긔의 동족을 생각지 안이하고 뎌러틋(저렇듯) 무졍하게 떠나갓스니 5천 명 우리 무리난 이졔 밋을 사람도 업고 또한 의지할 곳이 업시 되엿스니 인도쟈 인도쟈도 다 쓸대 업스니 우리끼리 셔로 인도하며 보호함이 올토다 하난 텬연한(천연한) 감샹이 발하난 때에 자연뎍으로 박군을 얼마즘 셥셥하게 생각하엿던 것뿐이오 아무 달은(다른) 원이는 업셧스니 연고로 우리 국민이 박군을 다시 생각하고 박군이 우리를 다시 도라보기를 결단하엿스니 이로 좃차 사뎨(사제)간의 애졍친의가 젼 보다 더욱 깁허질 터이오 또한 친형친뎨와 갓한(같은) 동족간에 여간 불평한 뎜(점)이 감졍이 일졀 쇼멸되고 고의를 회복하야 5천 명 부모 형뎨 자매 즁에 한아도(하나도) 루락되지 말고 죽어도 갓치 죽고 살아도 갓치 살기를 결심한 후 우리의 원수를 갑고 본국동포를 구원하난 일에 동심협력하면 우리들은 졔군이 션봉이 되여 방향을 차자 나아가기를 긔약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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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하와이에 이승만이 도착했을 때 박용만은 정중히 맞아들였는데...

허심탄회한 우정이 완전 복원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승만과 박용만의 관계는 다음 해 말까지 평온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1917년 10월 29일에서 31일까지 뉴욕 맥컬린 호텔에서 약소국동맹회의가 열렸는데 박용만이 참가하도록 이승만은 경비를 주선해줬다.

그러나 다음 해 화약고가 폭발했다.
1918년 1월 15일 제10차 대의원회에서였다.
3년 전에 터졌던 사태와 똑같이 이번에는 이승만파의 회계비리가 드러난 것이었다.
이로 인한 분규와 고소 사태는 두 사람을 영원히 갈라놓는 돌아오지 않는 강이 되고 만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출처 : 다시 터진 이승만파의 회계비리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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