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13>-"제군이 왜적의 정부와 법률에 복종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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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1928년 북경에서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1912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형질 상의 구한국은 이미 망했으나
"오늘 우리는 나라를 잃었고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줄 정부가 없으며 법률도 없으니 동포 제군은 장차 어찌 하려는고. 제군이 왜적의 정부와 법률에 복종하려는가. 이는 양심이 허락되지 않아서 못할 것이니 우리가 스스로 다스리고 다스림을 받을 기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중략)
우리는 나라가 없으니 아직 국가 자치는 의론할 여지가 없거니와 우리의 단체를 '무형정부'로 인정하고 자치제도를 실시하여 일반 동포가 단체 안에서 자치제도의 실습을 받으면 장래 국가 건설에 공헌이 될 것이다. (하략) "
이것은 북미, 하와이, 만주, 러시아의 연해주 등 지방총회들을 통괄할 중앙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1912년 11월 20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했을 때 박용만이 기초한 결성 선포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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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7월 박용만은 미국 중부에 있는 네브라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다. 전공은 정치학이었다. 일본에 유학 중이었을 때도 경응의숙에서 2년간 정치학을 공부했다.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계속 정치학을 공부함으로서 그는 시대의 변화를 통찰하고 있었다.
한일합방은 정치적 사형선고였다. 끝내 밀어닥친 그 암흑 속에 주저앉기를 거부한 동포들은 나라 밖으로 탈출했다. 광야의 방황이 시작된 것이다. 그 시점 누군가 행선의 전방을 가리키며 행보를 이끌 지도자가 필요했다. 산지사방에 흩어진 모래알들을 한 덩어리로 만들려면 이념의 접착제도 필요했다. 시대는 그 소임을 박용만의 어깨 위에 들씌웠다.
재학 중 국민회 회장의 요청으로 1911년 2월서부터 반년 동안 휴학하고 샌프란시스코로 간 그는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는다. 정치학 학사출신 답게 많은 논설을 써 해외동포들의 정치의식을 일깨웠다.
그가 줄기차게 주장한 게 '무형국가론'이었다. 영토와 주권이 없고 국민(해외동포)만 있기 때문에 진짜 국가를 가질 수는 없지만 국민회와 같은 조직체를 정부에 준한다고 생각하자는 거였다. 회원들 역시 국민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를 다함으로서 독립운동의 동력을 유지하자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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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무형국가론'을 최초로 제기한 건 1910년 10월 5일자 '신한민보'에 게재된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라는 사설에서다. 비록 무기명으로 발표된 사설이지만 논리전개나 표현방법이 영락없는 그의 필치다.
"오날(오늘) 우리난(우리는) 나라이 업난(없는) 동시에 정부도 업스며 법률도 업스며 일톄(일체) 생명재산을 보호할 긔관(기관)이 업스니 우리 동포난 즐겨 뎍국(적국)의 법률을 복죵하야 원슈(원수)의 쇼(소)와 말이 되고져 하나뇨. 금일 이십셰기난 그 정톄(헌법공화)의 엇더한(어떠한) 것을 물론하고 자티졔도(자치제도)가 졍티(정치)상에 주안(主眼)되난 문뎨(문제)라 그 백셩의 자티할 능력이 있는 쟈 결단코 남의 긔반을 밧지 안이하나니 오날에 나라이 업셔진 것도 우리의 자티졔도가 완젼치 못하얏든 연고며 래일에 국가를 회복함도 우리의 자티졔도가 완젼한 연후의 일이라. 그런고로 우리의 급급히 할 바는 일반국민의 자티력(자치력)을 배양하며 자티졔도를 실행하는대 있도다.(중략)
내가 생각하건대 오날에 대한인된 쟈는 뜻이 안이 갓흐려고(같으려고) 할 지라도 안이 갓할(같을) 슈(수)가 업난 사셰(사세)라. 그런고로 시셰의 변쳔함을 따라 일반 샤회의 방침이 또한 한 번 크게 변쳔하난 현상이 발현되얏나니 미쥬에 잇난(있는) 동포는 국가에 대한 셰랍(세납)의 의무를 대신하야 샤회에 공헌하기로 의론이 일티(일치)하며 하와이에 잇난 동포는 국민회의 듕앙긔관(중앙기관)을 쇽히 셜립하기로 뎨의_제의)가 되야 유지졔공의 의견이 일티하니 이로써 보건대 대한인 국민회난 국가인민을 대표하난 총긔관이 확연히 되얏도다.
이졔 형질 샹(상)의 구한국은 임의(이미) 망하얏스나 졍신샹의 신한국은 방야흐로(바야흐로) 울흥하기 시작하니 엇지 희망이 깁지(깊지) 안이 할이오. 고로 본긔자는 이에 대하야 두어 가지 의견을 졔공(제공)에게 뎨챵(제창)하야 연구하는 재료를 삼게 하노라.
첫째 듕앙총회난(중앙총회는) 대한민국을 총히 대표하야 공법샹에 허한 바 가졍부의 자격을 의방하야 법립, 행졍, 사법의 3대 긔관을 두어 완젼히 자티제도를 행할 일.
둘째 내외국인이 신앙할만한 명예 잇난 이를 밧드러 총재를 삼아 듕대(중대)사건을 고문케 할 것.
셋째 회원과 안임(아님)을 물론하고 각국 각 디(지)에 잇난 대한국민에게 그 디방(지방) 생활 뎡도(생활정도)를 따라 얼마식 의무금을 뎡(정)하야 전톄(전체) 셰입 셰출을 뎡관(정관) 할 일.
넷째 일톄 회원은 병역의무를 담임할 일(다만 년령을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와 폴란드는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상해 임시정부는 그 두 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1919년 4월13일 임시정부 선포가 이뤄질 때만해도 망명정부의 개념이 그렇게 일반화된 건 아니었다.
어쨌든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기 무려 8년 반 전에 망명정부의 필요성을 제기한 박용만은 선지자의 식견을 잘 드러낸 셈이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박용만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끼친 공로는 재평가돼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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