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3)//준비된 기적, 명량해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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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이후의 조선수군
기적처럼 승리를 거둔 이순신은 이후 관할 지역의 방어태세를 정비하고 수군을 재
정비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예의 그 엄격함으로 명량해전에 참가하지 않고 도
망을 쳤던 무안현감(남언상)․목포만호(방수경)․다경포만호(윤승남)등을 잡아들여
의금부로 압송했다. 특히 무안현감 남언상은 수군이었음에도 산으로 도망을 갔다가
명량해전 승첩이후에야 모습을 드러내 통제사 이순신의 노여움을 샀다. 왜군에게 부역
하고 부녀자들을 왜군에게 넘기고 강간했던 윤해,김언경,김득남,정은부,김애남의 목을
베어 효시했고 전선과 군기물의 관리가 허술함이 드러난 지역의 관장과 아전과 색리들
에게도 법에 따라 가차 없이 곤장을 쳐가면서 군기를 잡고 삼도수군의 기강을 세웠다.
그는 이러한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철두철미함을 보였다. 명량해전이후 그의 일기에는
일주일을 멀다하고 죄인들을 붙잡아다 곤장을 치고 목을 벤 기록이 등장하곤 한다.
특히 명량의 승첩이후 그의 행보는 수군의 재정비와 결전 때문에 바로 처벌을 하지 못
하고 가슴속에 치부해뒀던 자들을 모조리 벌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또한 결전을 앞두고 탈영을 해, 이미 전국에 지명수배령이 내려진 배설에 대해서 집요
하게 그 추적과 압송을 권율 도원수부에 요구했고 수시로 이를 확인하고 재차 요청하며
배설의 목을 통제영에 걸기를 고대했다. 그에 대한 이순신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미뤄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치욕적인 참패를 안긴 이순신에게는 왜군은 참으로 아픈 보복을 가했다.
바로 아산의 이순신 본가를 습격해 그의 아들 면을 전투 끝에 참살해버린 것. 10월 14일
통곡이라고 적힌 겉봉을 받자마자 아들의 죽음을 직감한 이순신은 이후 장졸들이 보는
앞에서는 차마 울지 못해 아들 생각이 나면 종 강막지의 집에 가서 남몰래 울고 올만큼
상심이 컸다. 큰 개인적인 상처를 안고도 통제사 이순신은 그 해 가을과 겨울 내내 무너
진 진과 군영을 다시 세우고 목수들을 동원해 부족한 판옥전선을 새로 건조했으며 호남
민중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서 병장기를 새로 만들고 군사들을 조련했다. 특히 그가 명
량에서 승전을 거두고 난 후에는 지역의 유지들과 사족들이 다투어 그에게 곡식과 물품을
헌납했다는 사실로 미뤄 이미 전라도 일대에서 이순신에 대한 신뢰는 가히 짐작이 간다.
하지만 최후의 노량해전에 동원된 조선 함대의 판옥선 수는 약 80척, 칠천량에서 잃어
버린 조선함대의 숫자를 생각하면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함대는 최전성기의 위력
을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되찾지 못했다. 또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였음에
도 불구하고 실제로 전라 좌수영의 5관5포 지역은 내내 왜군의 수중에 들어 있었고 정유
와 그 다음해 내내 그는 전라 우수영을 기반으로 수군을 운영했다. 칠천량의 상처는 이순
신이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오래도록 남은 셈이고 이는 후일 순천의 고니시가 무사히 돌아
가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하긴 애초부터 이순신이 파직되지 않았다면 감히 왜군
이 견내량을 넘어 올수나 있었을까. 선조는 그토록 왜 선봉장 가토와 고니시의 목을 원했
었지만, 정작 스스로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절호의 기회를 날렸다.
다행히 명량해전이 끝난 후, 이순신의 곁에는 예전의 유능한 장수들이 제자리를 찾
아서 돌아왔다. 권준이 충청수사로, 도성의 수비대장으로 있던 입부 이순신은 경상우수
사가 되었고, 거제현령 안위는 명량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통정대부가 되었고 무능했던
김억추의 후임으로 전라우수사가 된다. 부상에서 회복한 조방장 배흥립(전후 경상우수
사와 전라좌수사 역임)과 간신히 돌아왔던 순천부사 우치적(제10대 삼도 수군통제사
역임), 젊고 유능한 가리포 첨사 이영남(노량에서 전사), 사사로이 이순신에게 처종
형이 되는 사도첨사 황세득(예교전투에서 전사), 일처리가 깔끔했던 해남현감 유형(제5
대 삼도 수군통제사 역임) 등 믿을 수 있는 장수들과 함께 삼도 수군은 더 탄탄한 전
력을 다질 수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전사도첨사 김 완도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와 일본
내의 사정을 전해주었고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이언적의 손자 이의온 같은 젊고 유능한
문사들과 최희량, 김수철 등이 종사관으로 배치되어 해로통행첩(바다를 통행하는 선박
들에게서 받은 일종의 통행세였으나 안전한 조선함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 당시 민중
들은 다투어 곡식을 바치고 생업에 이 통행첩을 이용했다고 한다)을 발행, 열흘도 채
되지 않아 만 섬(파직시 이순신이 원균에게 인계했던 군량이 9천섬)이나 되는 군량을
모았고 시급한 군선의 건조와 군수물자 수집 등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그를 보좌해줬다.
명량해전이 끝난 후 불과 1년 몇 개월만에 삼도 수군은 최전성기만큼은 아니었지만 토요
토미의 사망이후 무사귀국을 애걸하는 고니시와 가토를 끝까지 간담이 서늘하게 만들만
큼의 전력을 보유할 수 있었고 조선땅에 맘대로 들어왔던 것과는 달리 나갈 때에는 노량
해전에서 무려 500여척에 달하는 막대한 선박이 격침되고 거의 4만 명에 달하는 왜병이
바다에서 떼죽음을 당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철쇄 과연 있었을까
한동안 명량해전을 둘러싸고 논란이 되었던 것이 바로 철쇄의 존재 여부인데,
명량해전 당시 좁은 울돌목의 좌우에 미리 철쇄를 설치하여 배 밑바닥이 깊은 침저형
선체를 가진 왜 수군의 주력함 세키부네의 전진을 막았고 이 때문에 전진하던 배들이
나가지 못하고 서로 충돌하는 큰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일제히 공격해 승리할 수 있었
다는 주장. 이러한 주장은 일본학자 아오야기 스나타로와 1751년에 간행된 이중환의
택리지, 1799년에 나온 호남절의록등에서 일부 제기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김억추의
후손들이 20세기 들어와 펴낸 현무실기에도 나와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먼저 이 주장의 근거 문헌들
이 하나 같이 당대에 쓰여졌다기 보다는 거의 200년후에 나온 문서들이라는 점이다.
부하의 공이라면 설사 그가 평소 맘에 들지 않더라도 꼼꼼히 그리고 상세히 기록하
기로 정평이 난 이순신의 그 어느 기록에도 현무실기나 일본학자가 주장하고 있는
철쇄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다. 게다가 김억추라는 인물 자체가 명량해전 내내
뒷꽁무니만 빼다가 별다른 공도 세우지 못한 채 이후 교체되었다. 과연 통제사 이순
신이 불리했을 전황을 결정적으로 뒤바꿀 수도 있을 결정적인 작전의 핵심을 스스로
만호자리에나 어울릴 인사라고 혹평을 해댄 김억추에게 지시했을 리도 만무하려니와,
설사 그랬다면 노비의 전공까지도 기록에 올렸던, 자신의 휘하장수가 잘한 일에 대
해서는 언제나 꼼꼼한 기록과 근거를 덧붙여 조정으로부터 상찬을 받고 진급시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통제사 이순신이 이를 끝내 정식기록에 올리지 않았을 리가 없
다. 이순신은 좌수사 부임 직후 좌수영 본영에 이와 다른 목적이지만 비슷한 철쇄를
설치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공사는 무려 3개월이 넘게 걸렸다. 이순신 함대는 울
돌목 근처에서 고작 16일을 머물렀을 뿐이다. 당시 전력을 재정비하고 장졸들을 다
독이는데에도 시간이 부족했을 이순신과 조선수군에게 3개월이나 걸릴 대역사를 벌일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있었을지 심히 의문이다.
다만, 임진년간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좌수영을 방문한 우수사 이억기가 좌수영
본영에 설치된 수채(수중 장애물)을 보고 큰 관심을 표해, 이순신이 이에 대해서 자
세히 알려줬다는 기록이 있다. 좌수영은 왜선의 기습을 의식해 본영 근처에 배밑바닥
이 깊은 왜선은 들어올 수 없고 대신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 판옥선만 출입이 가능
하도록 수중 장애물을 설치해 두었는데, 임진년 이후 5년의 소강상태 기간 중 우수사
이억기도 비슷한 시설물을 우수영 본영에 설치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만약 명량
해전에서 바닥이 깊은 침저선형의 왜 수군 함선들이 뭔가 장애물에 걸려서 자기들
끼리 부딪히고 깨지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현무실기가 주장하는 철쇄보다는 그
전임자이자 가장 오래 삼도수군의 절도사를 역임했던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재직시절
만들어놓은 수채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면 그 공은 김억추가 아니라 당연히 이
억기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나 조상의 공을 날조하려는
문집들이 많았다. 현무실기 자체가 너무도 난삽하고 내용이 조잡하며 여기저기에서
베낀 것은 물론 거의 황당무계한 공상적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료
로 쓸 수 있는 텍스트적 가치가 전무하다. 현무실기에는 심지어 이런 글귀까지 있다.
'공(여기서는 김억추를 가르킴)이 검풍을 날리자 왜선 수백척이 가라앉았다' 무협지
수준의 잡문을 역사적 사료로 봐야할 이유는 없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 해봐도 김
억추에 대해서 무능하고 탐학스러우니, 체차(해임)하라는 대간의 주청이 대부분이다.
그가 종2품까지 올라간 것은 사실이지만 가문의 배경 때문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고
명량에서 보여준 실력을 봐서 철쇄는 허구일 가능성이 거의 100%에 가깝다.
신장(神將)과 전설(傳說)
임진년의 연이은 승전과 특히 한산도의 대첩으로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조선최초의
해군 통합지휘관인 삼도수군 통제사에 올랐고 그 명성은 적국인 일본은 물론 명나라에
까지 전해질 만큼 유명해졌지만, 파직된 이후 돌아와 거둔 명량의 기적 같은 승리로
인해 가히 살아있는 전설로까지 위상이 올라갔다. 가히 하늘이 내린 장수, 신장이라는
평가를 가능케 했던 것 역시도 명량해전이 이순신에게 준 역사의 선물이다. 하지만 중
원에까지 명성이 자자하게 된 명량해전에 대해서 조선의 조정과 군주 선조가 내린 것은
겨우 은전 20냥과 면사첩이 전부였다. 선조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순신에게 매달렸지
만 막상 그가 명량에서 예상외로 승리해 더욱 더 명성이 높아지자, 다시 소인배가 되어
그의 전공과 명성과 백성으로부터 받는 신뢰를 더욱더 불안하게 보고 있었다. 아마 이순
신은 그에게 면사첩이 내려지던 무렵을 전후하여 자신의 미래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의병
장 김덕령과 비슷해지리라는 예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 무렵 그의 일기에는 스무냥을
받았다는 기록과 면사첩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있지만 그 행간을 다 짐작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직의 멸망을 구해준, 그것도 자신의 실수로 아무런 여건도 만들어주지 못하고
사실상 그냥 죽어달라고 내몬 전쟁에서 기적같이 승리한 장수에게 내리는 상급치고는
참으로 용렬하고 저열한 수준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 은전 스무냥이라니... 휘
하 장수들에게는 모두 품계승차를 해주면서 정작 주장(主將)에게는 던져준 은전 20냥은
차라리 모욕에 가까웠다. "너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상황이 시급하여 기용하고 있는 것
일 뿐이며, 다만 자비(?)를 베풀어 죽이지만은 않겠다." 라는 암시였는지도 모른다.
이후 조선수군을 되살려내고 나라를 다시 멸망에서 구한 지극한 공에도 불구하고 선
조는 이순신의 공을 치하하거나 품계를 올려주지 않았다. 이순신이 정일품의 품계와 일
등공신의 칭호를 받았던 것도 모두 그의 사후의 일이었다. 어이없게도 그와 똑같이 일
등공신의 칭호를 칠천량의 패장 원균도 받았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노릇.
그러나 뭘 기대하랴. 도망치느라 바빴던 선조를 따라다닌 걸로도 호종공신이 되는
부조리한 조정에는 정작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선무공신은 그 절반도 되지 않
았다. 용렬한 군주는 자신을 따라다닌 걸로도 내관과 측신들에게는 공신의 작호를
남발한 반면 머나먼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었던 이들의 공헌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못
해 야박스러울 정도로 상훈을 아꼈다. 특히 호남과 영남을 비롯해 전국에서 떨쳐 일어
난 창의의병들에 대해서는 더욱 심했다. 오늘 날 우리가 기억하는 임진왜란의 명장들
과 의병장들이 받은 서훈은 거개가 선조 당대가 아닌 100년 심하면 200년 후에서야
후대가 이를 추서한 것이다.
이래서 역사의 평가는 무섭고도 냉정하다. 선조의 그 협량함은 수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세간의 지탄과 비웃음을 사고 있다. 권력자는 그래서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
하고 겸허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기되는 이순신의 자설설, 은둔설은 바로
어리석은 권력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예우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객관적인 시선과 인식이 결여된 당시 조선조정이 왜 7년 전란을 초래했는지를 간접
적으로 짐작케 한다. 그리고 소중한 자산인 인재를 어이없이 홀대한 창피한 역사로
남았다.
명 제독 진린이 이순신을 추모하는 제문에서도 인용했듯이 이순신이 말년에 입버릇
처럼 말했다는 '나라를 욕되게 한 죄인이 오직 한번 죽을 일만 남았다'라는 대목은
설사 그가 노량에서 살아 돌아왔더라도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을지를 잘 알았기에
나왔던 말일 것이다. 그래서 갑옷을 입지 않고 최후전장에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노량 해전 직전,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정치적인 대부였던 영의정 서애 류
성룡이 실각했다. 당시 서인들이 지배하는 조정은 이순신을 또 다시 죄인으로 만들
개연성이 충분히 있었고 정여립 사건과 김덕령의 옥사를 통해서 보여준 선조의 정신
질환적 적자 콤플렉스와 협량함이 권력 유지에 대한 불안감으로 기화되었다면 이순신
을 다시 역적으로 만드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쥐려고 하면 할수록 더 불안해
지고 놓으면 놓을수록 더 탄탄해지는 권력의 생리를 그때나 지금이나 모른다. 당최.
필자는 여전히 이순신이 영웅이나 전설시 되는 것은 반대한다. 하지만, 그가 명량해전
의 순간에서만큼은 전설이라고 불러도 틀림이 없는 대활약을 펼쳤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
렵다. 아울러 자존심 강한 영국의 전사학자들마저도 세계최고의 해군제독은 이순신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가 바로 명량해전이라고 생각한다. 넬슨은 열세
라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33척의 함대로 고작 40척이 약간 넘는 프랑스 스페인 함대와 싸
워 승리했을 뿐이다. 서구 세계를 구했다는 그리스의 살라미스 해전도 열세의 그리스함대
380척으로 페르시아 함대 750척과 싸워 이긴 승리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니미츠는
주력 항모가 고작 한척이 부족한 3척으로 일본항모 4척과 맞서 싸웠다. 그 어떤 해전에서
도 이순신처럼 불리한 여건에서 싸워 승리한 해군제독은 없다. 명량해전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전설에 가깝다. 하지만 그 전설은 분명히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고 이 역시도 이
순신 혼자 이룬 것만은 아니다. 요컨대 역사의 그 어떤 영웅이라고 일컫는 자들도 혼자서
뭔가를 해낸 경우는 전혀 없다. 그리고 이순신의 경우 그 주변에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그를 도왔던 이름 없는 수많은 민중 역시 그의 가장 큰 후원자들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명량이 가능했고 이순신은 역사에 그 이름을 빛낼 수 있었음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순신도 자신을 있게 한 사람들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다.
"이순신의 두 얼굴"을 쓴 작가 김태훈은 "이순신은 평범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비범으로
다가간 실존적 존재"라고 평했다. 특히나 명량해전 연간의 그의 모습은, 감당 할 수 없
는 전쟁과 생존의 갈림길에서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을 느끼며 반응하는 평범한 인간의
저항과 고뇌가 곳곳에서 배어나온다. 그 역시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원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폄하했었으나 정유년 4월 혹독한 고초를 겪고 난 이후에는 원균에 대해서도
말을 하는 것을 삼갔을 정도로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다시 수군의 총수가 된 후에
는 예의 신랄하고 신경질에 가까운 깐깐함으로 돌아가 맡은 바 임무에 전력을 다했다.
사람을 직설적으로 평가하는 예리함은 평생 그의 성품이었고 이 때문에 알게 모르게
적을 만든 경우도 숱하게 많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강직했었던 이순신도
자신이 원인이 된,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소심하고 정 많은 아버지로 돌아가 통곡하고
절규했다. 원래 약했던 몸도 이즈음에 들어 날씨만 나빠져도 자리보전을 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못했을 정도로 쇠약해지고 있었다. 이 모두가 기적이라고까지 칭송되는 명량의
승리를 이끈 한 인간의 내면풍경이자 외면의 배경들이다. 그리고 진정 두려움과 어려움
을 알았기에 더 문제의 핵심에 파고들어 난관을 극복하고 새 길을 열 수 있었다.
과연 이순신의 진면이 그저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뭔가가 다른
위대한 영웅이라고만 섣불리 단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이순신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 조선사회와 7년 조일전쟁의 의미를 좀 더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위기의 순간일수록 원칙을 지키려고 애썼고 고된 실존적 노력
을 통해서 전설에 가까운 업적을 이뤘다. 준비된 기적 명량해전의 가치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더구나 이순신의 승리는 국가라는 스폰서가 아닌 호남의 민중이
스폰서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도대체 이순신처럼 국가의 아무런 지원도 받
지 않고 이토록 연전연승 무패의 신화를 남긴 해군제독이 또 있었던가.
명량해전 같은 전투는 다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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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동이님의 댓글
길동이 작성일
아! 이순신 당신은 위대합니다.
이토록 감동적인 글을 올려주신 나그네님 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