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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3)//준비된 기적, 명량해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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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작성일 10-09-28 21:29 조회 2,3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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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몸으로 다시 시작하다

8월 초, 우여곡절 끝에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위기의 순간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았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그는 송희립 등과 더불어 서둘러 전라 좌우수영의 내륙기지와 좌,우수영에 소속된 진과 포

구의 관아를 돌면서 수집할 수 있는 모든 병장기와 화포와 총통, 군량을 끌어 모으기 시

작했다. 당시 이순신의 행적을 보면 실로 아슬아슬하게 왜병이 들이닥치기 직전 호남의

관아와 병장고를 돌면서 필요한 물품을 끌어 모았고 만약 그가 이 작업을 서두르지 않았

다면 조선수군은 재기를 위한 그 어떤 발판도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다. 통제사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이 끝난 지 한 달을 넘긴 8월 18일에서야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빼

돌린 10척의 판옥전선을 인수할 수 있었다. 통제사가 되고도 달포를 넘겨서야 전선을 거

느린 진짜 수군의 지휘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그가 다시 통제사에 올랐다는

소문을 들은 전라도의 백성들과 흩어진 군사들, 그리고 도망친 장수들도 하나 둘 그의

깃발아래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위기가 다가오자, 지난 5년간 자신들을 지켜줬던 백전

백승의 명장 이순신에게 민심이 쏠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많은 것이 너무도 부족했다.

주력전함인 판옥선이 고작 12척인 것도 문제였지만, 그의 휘하에 손발을 맞춰줄 장수가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임진년간 많은 도움을 주었던 정걸과 선거이, 어영담은 그사

이 노환과 신병으로 세상을 떴고, 믿고 함대를 맡길만한 가까웠던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 호는 칠천량에서 전사해버렸다. 자신의 휘하에 있었던 권준, 이순신(입부),

신 호, 김 완, 나대용, 배흥립, 이몽구, 이운룡, 이영남 같은 이들도 이러저러한 이유

로 수군을 떠나 다른 임지에 있었거나 원균과의 불화로 아예 관직을 그만 뒀거나, 지난

칠천량 패전이후 아예 생사조차 불분명했다.

그나마 항상 그의 곁에 있었던 지도 만호 송희립과 임진년 당시 장계를 품고 의주행재소

를 오갔던 녹도 만호 송여종 정도가 남아 있었을 뿐. 새로 부임한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난중일기의 평가에 따르면 '만호자리에나 어울릴 인물'이었고 칠천량에서 미리 발을 뺀

경상우수사 배설은 겁에 질려 그저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일개 병사도 아닌 수군

의 최고위 지휘부에 속하는 수군절도사가 이 모양이었다면 그 아래의 중간 간부들과 병

졸들은 어떠했을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칠천량의 패배와 충격을 딛고 이들이 다시 싸

울 수 있는 군대로 재정비하는 일도 통제사 이순신의 발목을 잡는 커다란 난제였다.

칠천량 패전으로 사실상 수군이 전멸해버리고 단시일내에 수군을 재건하는 일이 무망

하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선조의 조정은 아예 수군을 폐하고 이순신에게 권율의 도원수

부로 합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그러나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이 남아 있

습니다."라는 유명한 장계로 수군폐지론을 일축해버렸다. 사실 이 대목도 그에게는 정

치적으로 거의 자살골에 가까운 언행이었다. 서해로 가는 길목을 놓고 다음 바다 싸움

에서 패한다면 임금의 권유를 거부하고 무리한 전투를 벌였다는 죄를 면키 어려운 자충

수가 될 수도 있었다. 이 선택으로 이순신은 이제 승리 아니면 죽음의 갈림길에 선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분명 수군이 없어지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사안의 본질을 꿰

뚫어본 혜안에서 비롯되었다. 어차피 조선수군이 여기서 무너지면 그 끝은 마찬가지

였다. 이순신에겐 더 이상 잃을 것도 내려갈 바닥도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희망을

걸었던 전라도의 백성들과 조선수군도 같은 운명이었다.

두 번의 전초전과 배 설의 도주

오늘날의 우리는 지리멸렬했던 조선수군이 칠천량 대패 이후 바로 명량해전에 나선

걸로 생각하기 일쑤지만, 두 해전 사이에는 두 달의 시간차가 있고 이 사이 왜 수군은

그야말로 느긋하게 호남일대를 도륙하며 서서히 북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은 분명히 실책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 사이, 조선수군은 빈약하게나마

재기와 회생의 시간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수군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여

유를 부릴만한 근거가 있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해군의 양성 특히 함대의 양성은 하

루 이틀에 되는 일이 아니다. 지상군의 경우, 막말로 일주일만 집중훈련을 시켜서라도

실전 투입이 가능하다지만, 해군은 다르다. 함선을 건조하고 그 함선에 승선한 승무원

들이 제 역할을 할 수준까지 훈련을 하려면 당시 기준으로도 최소한 일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한번 함대를 잃으면 주도권을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특히 칠천

량 수준의 참패를 당한 함대가 불과 1-2개월 사이에 다시 전투력을 회복하는 일은 유사

이래 거의 없었다. 8월 하순이 되자 왜 수군은 천천히 움직임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순

신은 언제나처럼 정찰과 첩보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이번에도 군관 임준영을 비롯한

많은 수하들을 적진의 배후에 두고 있었기에 즉시 이를 감지했고 8월 27일 어란포에

적의 선봉대 8척이 나타나자마자 바로 발선하여 이들을 추적했다. 조선수군이 전멸한줄

알았다가 급작스레 나타나 화력을 과시하자, 왜선들은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왜 수군들은 조선수군의 움직임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꼈을 것이다.

이 소규모 국지전이 큰 전과를 낸 것은 아니지만, 일단 적의 선봉부대를 놀라게 해 후

퇴시켰다는 데 큰 의의가 있고 조선수군은 일단의 패닉상태에서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

하고 멍든 몸을 푸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란포 전투이전부터 시종일관 몸을 사리던 기색이 역력했던 경상 우수사 배설이 8월

말 병을 칭탁하여 육지에 오르더니, 9월 2일에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요즘으로 치면 해

군소장의 직위에 있던 자가 결전을 앞두고 탈영을 해버린 것이다. 그날 난중일기에는 "새

벽에 배설이 도망갔다" 라고 딱 한 줄만 적혀 있지만, 그 행간에 통제사 이순신이 느꼈을

낭패감과 좌절감은 다 헤아리기 어렵다. 군기를 조율하고 병사들을 다독여 결전에 임해도

승리를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측근에서 자신을 보좌해야 할 경상우수사 배설의

도주는 또 한 번 조선수군의 사기와 전열에 커다란 위기를 던졌을 게 분명하다. 통제사의

바로 아래 장수가 도망을 간 상황이라면 과연 다가올 전투에 희망이 있기는 할 것인가?

배설의 도주 직후, 흐트러진 진영의 군기를 더 닦아 세우고 남은 제장들을 다독이며

장졸들의 동요를 막느라 분주했었을 통제사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9월 7일 진도 벽파진 일대에 왜 수송선단과 전선들이 다시 나타나자 이번에도 13척(

처음 배설에게서 전선을 인수했을 때에는 10척이었던 것이 이후 12척 그리고 명량해전

당시에는 13척으로 늘어나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이순신의 수군은 칠천량 참패로 사방

에 흩어졌었던 버려진 판옥전선을 계속 수거했거나, 대열에서 이탈했던 판옥선들이 하나

둘 그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의 판옥전선을 총동원하여

저녁 내내 총통과 화포를 쏘아대면서 이들을 밀어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복병을 우

려하여 적을 몰아세우되, 일정선 이상은 절대로 추격하지 않도록 휘하함대에 지시했다.

그의 함대운영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칠천량의 원균과 현격한 질적차이를 보였다.

정찰과 경계를 통해서 상대의 기습을 방지하고 적의 움직임을 항상 파악하여 내가 유리

한 상황과 지형에서 싸우도록 하며, 항상 자제하여 적의 매복이나 유인에 말려들지

않는 것. 바로 이 원칙이 그의 함대를 임진년 이래 남해 최고의 수군으로 만들어 왔던

것이며 다시 한번 이를 통해서 통제사 이순신이 돌아왔음을 확실하게 적에게 인식시켰다.

두차례의 소규모 접전이기는 했으나 이순신은 휘하의 장졸들에게 약간이나마 자신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고 더 중요하게는 허장성세일망정, 왜 수군들에게 한때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가 다시 바다에 돌아왔다는 것을 과시했다. 와키자카와 도도, 구키와

가토는 물론 선봉을 맡고 있던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 왜 수군의 지휘관들은 이순신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두차례의 소규모 접전에서 사뭇 달라진 조선함대의 움직임을 통해서

사실임을 확인했을 것이고 미묘한 낭패감과 불안감이 엄습해오고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자신들이 맞이해야 할 상대의 명성과 실력은 이미 자신들의 뼈아픈 패전을 통해

서 다들 충분하게 경험 했었던지라. 이순신의 재등장은 앞으로의 전투는 여태까지처럼 수

월하게 전개되지는 않을 것임을 의미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들의 세력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음을 믿고 그들은 계속 전진해 서해

바다로 넘어가고자 했다.

당시 전라우수영의 본진 일대에서 진을 펴고 있던 이순신은 사실상 매우 절박한 상황에

있었다. 전라 좌수영 5관 5포 지역을 모두 내준 상황에서 어느 새 왜 수군의 함대는 우수

영의 본영까지 다가들고 있었고 정찰에 따르면 거의 300척에 이른다는 왜 수군과는 아예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고작 13척의 함대. 더구나 그들의 선봉은 한때 해적으로 이름 높았

던 시고쿠 출신의 구루시마 수군. 선봉장은 임진년간 당항포 해전에서 후일 충청수사가

된, 당시 순천부사 권준에게 시살되었던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동생 구루시마 미치후사

(일명 마다시).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억센 상대였다. 여태까지 상대해왔던 왜 수군과

는 달리 선봉 구루시마 수군은 조선의 연안바다와 매우 비슷한 시고쿠와 세도 내해 일대

에서 조류와 급한 물살을 이용해 쏜살같이 상대를 유린하고 다시 물때에 맞춰 바람같이

사라져 버리는 해적 행위로 일본 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흔히 왜 수군이 승부처가 될

명량의 바다에 익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임진년간의 실패와 해전에서의 연전

연패를 왜 수군 역시도 나름대로 반추하며 대책을 세워왔던 것이 분명한 것이 바로 선봉

에 구루시마 함대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도 진도에서 우수영으로 넘어가는 울돌

목, 명량의 험악한 물흐름과 변화무쌍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험한 물살과

급격한 조류변화에 익숙한 구루시마 함대를 선봉에 내세워 이순신의 빈약한 함대를 압박

해왔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

당시 이순신의 명색이 삼도수군인 함대와 병력은 얼마나 되었을까? 우선 13척의 판옥선

을 움직이려면 척당 130명의 인원이 최소한 필요하니, 약 1,700여명 그리고 정찰과 연락

업무를 하는 협선에 타는 인원과 각종 지원 병력을 생각해보면 최소한 2천 명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조선수군의 곁으로 찾아온 무수한 백성들과 이들에게서 나온 의

병지원자들을 포함하면 최대 2천 5백명의 병력은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패전후 두달

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기세를 회복하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봐도 좋다. 특히 그가 통

제사에 복귀했다는 소식이 호남일대에 퍼지면서 그간 왜군의 무자비한 도륙(정유재침시

왜군은 호남을 병탄하면서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과 강간을 일삼았다. 임진년시에는 회유

책을 쓰기도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앞에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많은 호남 백성들과 칠천량에서 달아났던 장수들과 병졸들이 속속들이 그의 곁으로 돌아

왔던 것도 큰 도움(짐이 되기도 했지만)이 되었다. 원균과 이순신의 또 다른 차이였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오랜 벗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젊은 시절 북방에서 함께 근무하

며 백의종군의 고초도 함께 겪었던 제주 목사 이경록(이순신의 조산보 만호 시절 ,직속

상관인 경흥부사였고 7년 전란 내내 제주도를 외로이 지키면서 자주 이순신에게 안부를

전하며 곧잘 군수품도 보급해줬다)으로부터 소 5마리와 각종 물품을 지원받아 9월 9일

중양절에는 푸짐하게 군사들을 먹이며 사기를 복돋았고 이보다 앞선 9월 7일 제장들을

모아 놓고는 그 유명한 연설 "사즉생(死則生) 생즉사(生則死)"의 어젠다를 던지면서

배설의 도주로 어수선해진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만사 부드럽게만 사람을 다루지는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쓴 난중일기

에서조차 확인이 된다. 좌수사시절부터 우후(요즘으로 치면 부관이며 정4품의 고위직)로

자신을 오래 보좌해왔었고, 그 때문에 원균밑에서는 한직으로 밀려나 여수의 좌수영을 지

키는 일을 해야 했던 수진장 이몽구가 다시 통제사를 찾아왔음에도 위로는커녕 여수본영

을 불사르고 군기물을 전혀 챙겨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쳐서 돌려보냈다.

선조의 교서에 아프다는 핑계로 숙배를 하지 않았던 배설의 아전을 불러다 곤장을 친

것을 비롯해 소를 훔치려고 왜적이 온다고 거짓 소문을 낸 자들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병장기를 수집하려고 관할지역의 관아를 돌때에도 부정이 발견되거나, 예하 수령과 아전

향리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시에는 가차 없이 곤장으로 다스렸다. 군율에 해당한다 싶

으면 참수도 서슴지 않았다. 다시 통제사가 된 후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규율을 어긴 자

들에 대한 가차 없는 처벌과 문책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요컨대 채찍과 당근을 모두

썼다.

명량전투 이틀 전, 이순신의 일기에는 길몽을 꾼 이야기도 적혀 있는데, 그는 주역을

보며 점을 치는 데에도 능숙(오늘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워낙 예측 불가한 상

황이 자주 발생하는 해상 상황 때문에 당시 수군의 장수들은 점복이나 해몽에 의존하기

도 했다. 당시 장수들에게 점을 치는 일은 상당히 일상화된 모습이었음을 부언해둔다.

이는 서구에서도 바다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미신이나 징크스에 민감했던

것과 유사하다)했었던 지라, 꿈의 해몽과 징조를 점쳐 보니, 임진년의 대첩 당시와 흡

사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 때문에 다소간 심리적 안정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너무도

현실이 암담했기에 이런 데까지 의미를 부여했었을 수도 있지만, 배설의 도주 말고는

그가 의도한 바대로 전력의 보강과 전열정비는 차분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이순신은 언

제나 그랬던 것처럼 철저하게 준비와 준비를 거듭했고 불과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그의

수군은 다시 한번 국운을 건 결전에 나서게 된다.

이때 그와 조선수군의 모습은 진인사 대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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