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3)//준비된 기적, 명량해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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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3)
-준비된 기적, 명량해전-
제3대 삼도수군통제사
1597년 음력 8월(이하 날짜 모두 음력임) 3일,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선전관으로부터
임금의 교지를 받게 된다. 사약이라도 내릴 줄 알았던 선조의 교지에는 그를 전라 좌수사
겸 삼도 수군통제사에 다시 봉한다는 내용이었다. 7월 22일에 결정된 교지가 그제서야
이순신에게 당도한 것이다. 이미 도원수 권율로부터 지난 7월 15일 칠천량 바다에서 통제
사 원균이 이끌던 삼도 수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자신을 따르던 군관 송희립을
비롯한 몇몇 측근과 서둘러 남해안 일대를 돌아보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거제현령 안위
와 영등포만호 조계종등을 7월 21일 노량에서 만나 칠천량의 상황을 전해 듣고 난지 며
칠 되지 않아서였다. 이렇게 해서 이순신은 생애 두 번째 백의종군 백 수십여일 만에 다
시 제3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전장에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그의 손에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전선 한척 없는 조선수군 최고
사령관이 된 것이다. 180여척이 넘는 탄탄한 판옥전선과 7-8척의 거북선, 무엇으로도
돌파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 한산도 통제영을 거느리고 있었던 삼도수군 통제사의
지휘권을 기군망상의 죄로 이순신에게서 박탈했던 조선의 조정과 임금 선조는 칠천량의
비보를 듣고서야 7월 22일 염치없게도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라고 명했다.
선조의 교지는 지금 읽어봐도 한심함과 염치없음이 넘쳐난다. '내가 이제 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요'만을 되뇌고 있던 어리석은 임금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무섭게 다가오는
왜적의 칼날아래 비명을 지르고 있을 조선의 수많은 백성들과 살아온 터전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일어서야 했던 상황. 가혹한 고문으로 짓이겨진 몸을 추스를 틈도 없이
옥중의 아들을 만나러 오다 길에서 세상을 떠난 노모의 상을 치르지도 못한 채 신임 수군
통제사는 길을 나서야만 했다.
칠천량
명량해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7년 조일전쟁에서 조선수군의 유일한 패배
이자 사상 최악의 참패였던 칠천량 해전을 살펴봐야 하고 그 이전에 왜 조선수군이
부산포를 쉽게 공격하지 못했는지까지도 따져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점을 임
진년 이순신 함대의 4차 출격인 부산포 해전으로 잠시 돌아가자. 1592년 9월 1일, 한산
도 대승을 통해 남해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수군 연합함대는 왜 수군의 본영이
자 집결지인 부산포를 향해 진군했다. 470척이 넘는 대규모 선단이 부산포에 정박해
있었지만, 이미 수차례의 해전에서 조선수군에게 톡톡히 호된 맛을 본 그들은 아무도
감히 바다에 나서 조선수군의 판옥선과 일전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조선수군은 일제
히 장사진을 펼치며 연이어 함포를 발사하여 백 여척을 격파하고 개선했지만, 아쉽게
도 여기까지가 조선수군이 할 수 있는 한계였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금지
령과 더불어 조선수군이 부산포로 접근해오는 길목마다 특유의 왜성을 쌓아버려 아예
조선수군의 진격을 봉쇄해버렸다. 당시의 수군들은 연안을 따라 항진하다 밥 때가 되면
뭍에 올라 밥을 해먹어야 했고 야간에는 적당한 포구를 골라 잠을 청해야 했다. 며칠
씩 바다에 떠 있는다는 것은 노를 젓는 격군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지우는 일이었기에
아예 불가능했고 반드시 숙영을 할 수 있는 연안거점이 필요했는데, 거제도와 가덕도
일대에서부터 부산포에 이르는 주요 길목마다 튼튼하고 관측이 용이한 왜성이 설치되자,
이후 조선수군은 부산포로 접근할 수 있는 방도가 전혀 없어져버렸다. 그 때문에 임진
년 4차 출동이후 거의 5년간 남해안에는 몇 차례의 소규모 국지전 외엔 큰 싸움이 벌
어질 수 없었다. 왜군은 아예 해전 자체를 기피해버렸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왜군이 전라도로 넘어올 수 없도록 그때까지 사람이 살지
않던 한산도에 통제사 본영을 설치하고 전라, 경상, 충청 삼도 수군의 판옥선 주력을
배치해 견내량의 좁은 물목(한산도 해전에서 조선수군에게 크게 혼쭐이 난 왜 수군
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직하는 동안 한 번도 견내량 너머로 진출하려는 시
도조차 하지 않았다)을 단단히 틀어막아 버렸고 이렇게 해서 양측은 5년의 지리한
평화협상이 지속되는 동안 호각지세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지상전에서 우
세한 일본군과 해전에서 앞서는 조선군은 당장 서로를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러한 묘한 힘의 균형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해전을 전혀 몰랐던 조정과 선조는 왜 이순신이 저토록 막강한 병력을 가지고도 부산
포로 진격해 전란을 끝내지 않는지를 질타하기 시작했고 협상이 결렬되고 다시 가토 기
요마사등이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되돌아온다는 소문이 들리자 더욱더 몸이 달아 통제
사 이순신을 다그쳤다. 심지어는 임진년간에 올린 그의 장계가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아
니냐는 소리가 나왔으니, 이미 선조의 신뢰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임진년 이후 5년간
원리원칙에 입각해 임금에게도 쉽게 굽히지 않던 그의 강직함이 괘씸함으로 누적된 상태
에서 그가 그저 한산도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무능함으로 인식되던 차.
선조는 부산포의 방화사건(이 사건은 부산포의 왜영에 이원익의 수하가 불을 질러 큰
피해를 주었는데 그만 같은 시기 부산에 있던 이순신의 수하가 자신의 공인양 이를 보고
하여 이순신은 잘못된 장계를 올리고 말았다)에 대한 이순신의 보고 착오를 빌미로 부산
포로 오는 가토를 사전에 요격하지 못했다는 죄까지 더해 관직을 삭탈하고 한양으로 압송
해버린다. 그리고 후임에는 이순신과 다툼이 잦았으나 용맹하다는 원균을 임명했다.
그러나 원균이라고 해서 쉽사리 가덕을 넘어 부산포로 진격하지는 못했다. 수군을 처음
지휘하는 장수도 아닌 원균이 경상도 해안 일대에 도사리고 있는 무수한 왜성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고, 그 역시도 이순신처럼 무리하게 부산으로 출격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조정의 성마른 질책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서 계속 통제사 원균을 닦달했고 급기
야는 환갑이 가까운 57세의 노장 원균을 치욕스럽게 곤장을 쳐가면서까지 출동을 강권
하게 된다. 도원수 권율의 원균 매질은 분명 도가 지나친 처사였다. 통제사 이순신도
절친했던 이억기가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자 그의 군관을 잡아다 대신 볼기를 쳤던 사례
에서 알 수 있듯이 수하나 종에게 대신 매를 치는 경우는 있었어도 죄인도 아닌 현직
종2품의 당상관인 삼도 수군통제사를 직접 매로 다스렸다는 것은 사실상 원균에게
당장 나가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인 치욕적인 처사였다.
삼도수군을 거느린 수군의 총수가 도원수 군영에서 곤장까지 맞으며 체면과 위신을 모
두 잃어버린 원균은 폭음으로 분을 다스리다 결국 어쩔 수 없이 7월 6일 삼도 수군을
이끌고 가덕으로 향한다. 거개가 이순신의 사람이었던 휘하 장수들과도 사이가 서먹해
많은 장수들이 교체된 상황에서 무리한 출동은 더욱더 조선수군의 전열을 약화시켰다.
원균은 경상도 연안의 왜성을 의식해 계속 노를 저어 가덕과 부산으로 향해 갔으나
결국 무리한 출정 일정과 쉬는 곳이 없는 난코스로 인해 원균은 이 해역에서 20척이
넘는 판옥선을 잃어버렸고 노를 젓는 격군은 역류를 헤치고 나가느라 극심한 체력소모
와 식량과 식수의 부족까지 겹쳐 함대 전체가 무척 피곤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면
서도 전과는 거의 없었다. 일본 수군은 약삭빠르게 조선수군의 외곽을 치고 빠지면서 좀
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지상군과 수군이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던 중이었다.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아키 등
그간 옥포와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혼쭐이 났던 수군 장수들이 설욕을 벼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1597년 7월 15일 오전 거제도 동북단 영등포에 취사와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상
륙했다가 왜선 50여척의 기습을 받고 많은 병사를 잃은 채 다시 온라도 근처에서 정박했다.
그날 저녁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 왜선 3-4척이 조선 수군의 전선에 불을 지르는 것을
시작으로 매복해 있던 500여척의 왜 수군은 겹겹이 포위해오며 조선수군을 습격해왔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일본의 근접포위 공격은 단병접전에 약한 조선수군에 치명
적인 타격을 가했다. 수많은 장수들이 아예 상대를 해볼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고 달아났
는가 하면,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 호 같은 주요사령관들이 직접 전투에 나서다
가 전사했고, 조방장 김 완은 육지로 상륙했다 포로가 되어버릴 정도로 조선수군은 사실
상 칠천량 앞바다에서 전멸해버렸다. 만 명이 넘는 정예 조선수군의 어이없는 최후였다.
일찌감치 내뺀 경상 우수사 배설의 전선 12척을 제외하면 130여척이 넘은 최강의 판옥선
과 거북선이 모조리 불타버렸고 간신히 통제영으로 몸을 피한 배설은 한산도 통제영에 불
을 지르고 달아나, 이로써 견내량을 통한 호남의 관문을 활짝 일본군에게 열어준 것이다.
통제사 원균의 최후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선전관 김식의 장계에 따르면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지친 몸을 쉬던 차에 급작스런 왜병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고 했으나, 또 실
제로 그의 죽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살아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기록도 있다.
어찌 되었건 원균은 이순신이 키워놓은 최정예 조선수군을 데리고 단 한번도 제대로 써
먹지 못한 채 한순간에 제해권을 일본에게 넘겨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패배는 기실 선조와 조정이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손자는 장수에게
보검(여기서는 군 지휘권을 상징한다)을 맡겼으면 군주가 이후에는 이래라 저래라 간여
를 하지 말아야 하며 이를 어기고 자꾸 군주가 작전에 간여를 시작하면 해가 될 수 있다
고 적고 있다. 전쟁을 막지 못해 온 강토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던 무능한 군주와 조정은
전장에서는 군주의 말보다 지휘관인 장수의 말이 우선한다는 오랜 병가의 격언마저 무시
하고 전투지휘를 하려다가 도리어 국망의 위기를 스스로 불러들이고 만 것이다.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임진년의 조선침략시 왜군 선봉장 고니시는 한양으로 급속전진을 해 한달만에 도성을
장악하고 평양까지 진군했지만, 배후의 전라도를 가볍게 생각했다가 조선수군에게
뱃길 보급이 막혀 결국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전라도의 배후를 쳐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진주성싸움과 웅치, 이치 전투 내내 번번히 격퇴를 당했고 이후 전황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두 번째 침공에서 왜군은 칠천량에서 눈엣가시였던 조선수군을
걷어내자 전라도의 뱃길을 장악했다고 생각했고 이번에는 배후를 남겨두지 않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일제히 전라도로 병력을 집중했다. 7년 조일전쟁 기간 내내 전쟁수
행의 중추를 담당했던 조선의 곡창지대이자 수군의 근거지였던 호남지역은 이순신의 삼
도 수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임진년간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정유년의 재침시에는
왜군의 주요한 목표가 되었고 삼도 수군이 전멸하자 걷잡을 수 없는 도륙의 대상이 되고
만다. 칠천량 패전이후 겨우 한달만인 8월 한가위 무렵에는 조명연합군이 버티던 남원성
이 떨어졌다. 임진년간 이순신의 제장이었던 전낙안군수 신호가 별장으로 분전하다 전사
했던 것도 이시기의 일이다. 남원이 떨어지자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 역시 순식간에 함락
되고 말았다. 전라도가 왜군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하자, 조정은 발만 동동 굴렀을 뿐이다.
하삼도에 내려와 있던 도체찰사(요즘으로 치면 전시계엄사령관)이원익은 하삼도의 모든
백성에게 청야령을 내린다. 왜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불사르거나 없애버리고 인
근 산성으로 대피하라고. 왜군은 거침없이 호남일대를 휩쓸며 구례를 점령하고 거기서 섬
진강을 이용해 착실히 보급을 받으면서 북진을 계속했다. 익산, 부여, 한산, 서천과 공주
가 공격을 받았고 직산에서도 왜군과 명군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쯤에서 왜군의 지상군 주력은 수군이 전라도의 바다를 돌아 서해로 북상해주기를 기
대했다. 준비해온 군량과 군수물자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당시만 해도
이들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여태까지 눈엣가시 같던 조선수군이 전멸한 이상 누구도 서
해바다로의 뱃길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왜군이 서해바다로 들어오는 순간 도성을 비롯해
의주까지 모든 뱃길은 막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조선의 행정시스템은 그날로 끝장이 난다. 또한 육로로 진격해오는 가토와 고니시의 부대에게 막대한 양의 군량과 물자 그리고 보충
병력이 서해를 통해서 바로 도성 한양과 서해안 전체에 쏟아져 들어온다면 빈약한 군세의
조선이 버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이시기 명나라의 조정은 오랫동안 파직되어 있던
진린을 다시 등용해 산동성의 수군을 조선으로 보낼 것을 결정하는데, 그만큼 당시 조선의
상황이 절체절명이었음을 반증한다. 조선함대가 없어진 상태에서 왜군을 방치하면 자신들
의 본토인 산동반도까지 다가오는 것 역시도 시간문제였다. 순망치한의 냉엄한 국제정치
역학이 여지없이 작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호남이 완전히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면 조선
은 망국이외엔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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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나그네님의 명량해전은 다시 읽어도 제대로 된 사실의 묘사와 박진감과 재미를 함께 느끼게 되는군요. 귀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