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11>-예배당 대지를 개인 명의로 해달라고?| > 역사 바로알기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역사 바로알기

<박용만과 그의 시대 11>-예배당 대지를 개인 명의로 해달라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도르테아
댓글 0건 조회 2,618회 작성일 10-09-25 00:08

본문

<박용만과 그의 시대>-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1928년 북경에서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1912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예배당 대지를 개인 명의로 해달라고?

 

 

국민회를 위해 외교 사업을 하고 싶다던 원래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일거리가 없었다. 이승만이 착수한 건 교육 사업이었다. 감리교 교인인 그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했던 감리사 와드만 목사를 만났다. 1913년 8월부터 감리교에서 운영하던 한인여자 기숙사를 맡게 됐고 9월 15일엔 52명의 학생을 모집해서 한인기숙학교를 개학했다.

석 달 만에 학생수가 두 배로 늘어났다. 그의 수완 때문이었다.

 

1269E9114C9D99B46B13EF

 

하와이 이민을 주선한 존스 목사가 세운 인천내리감리교회. 이 감리교회 교인들이 처음 이민선에 많이 올랐다.

 

 

한국에 있을 때도 선교사들의 후원을 받았다. 미국에서도 여러 교회를 돌며 간증을 해서 학비를 얻을 수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교계로부터 어떻게 하면 후원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감리교 교단에 호소해서 1915년 중앙학원 기숙사 신축 보조비로 3천 달러를 배정 받았다. 원래 한인 기숙학교를 마치면 바로 중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다. 그가 교장이 된 후 학생 수를 늘렸다. 교과과정을 개편해서 학원의 졸업증서만 있으면 즉시 중학교 진학이 가능토록 했다.

 

이처럼 주류사회와의 원활한 외교로 눈에 보이는 실리적인 성과를 내놓자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6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한 독립운동가가 아닌가. 미국 일류대학에서 한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따지 않았는가. 또 늘 교회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신앙의 지도자가 아닌가.

 

특히 감리교 교회들의 교인들이나 파인애플 농장의 감독들 그리고 그의 높은 학식을 존경하는 부녀자들이 그의 충실한 지지자들이 됐다. 이 부녀자들은 사진결혼(사진만 보고 결혼을 하는 것을 말함)으로 건너와 심한 경우 아버지 벌 나이의 남편을 둔 사람들이 많았다. 늙은 남편들은 젊은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부녀자들의 주장을 따랐다.

 

 

165F47114C9D99F249C2D6

 

사진결혼으로 하와이에 온 여인들

 

 

이 기숙학교(후에 중앙학원으로 명칭을 바꿈) 졸업식에도 예외는 없다는 듯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 제1막은 대원군이 천주교도를 학살하는 내용을 보여줬다. 2막은 인도와 아프리카에서의 백인의 선교활동 그리고 3막에선 한국 목사 손정도가 중국에서 전도하다 일인에게 잡혀가는 장면이 나왔다. 4막은 본국에서 있었던 105인 사건을 묘사한 것이었다. 애국지사들이 일본 경찰에 끌려가 화롯불에 달군 인두로 고문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자 관중들의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이승만이 국민회와 틀어지기 시작한 건 학생기숙사 대지 문제 때문이었다

국민회는 국민회관을 지을 터와 예배당을 지을 터를 사뒀었다.

회관 대지는 600달러를 선불하고 매달 30 달러 씩 상환, 예배당 대지는 500달러 선불에 매달 120달러씩 상환하는 중이었다.

 

한인기숙학교를 중앙학원으로 발전시킨 이승만은 예배당 대지를 자기에게 줘 교육사업에 쓰게 하라고 청원했다. 국민회는 그 타당성을 인정하고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승만은 그 대지를 자기 명의로 하고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처리하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국민회는 공유재산을 개인 명의로 양도한다는 건 부당한 일이라고 거절했다.

 

그때부터 이승만은 국민회가 쓸데없는 데다 재정을 많이 쓰면서 교육사업에는 지원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태평양잡지'에 국민회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5 www.hanseattle.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