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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9> 자기를 물어뜯을 호랑이인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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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도르테아
댓글 0건 조회 2,465회 작성일 10-09-20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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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1928년 북경에서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1912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이승만을 하와이로 불러들인 박용만.

 

       

1910년 6월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도착한 지 6년도 안 돼 초고속으로 학사, 석사, 박사를 해치운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한성감옥 덕이었다. 항아리 속에 촛불을 켜놓고 6년 동안 감옥에서 죽어라고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성취가 가능했을까.

 

이승만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 주로 박용만을 찾아갔다. 그가 교장으로 있는 소년병학교를 방문한 것이다. 9월 초 귀국한 그는 YMCA에서 1년쯤 교사로 활동했다.

 

미국 미니어폴리스에서열린 국제감리교회대회에 조선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조선을 떠난 건 1912년 3월 26일. 대회가 끝나고 귀국을 망설이고 있을 때 '워싱턴포스트'지가 그를 인터뷰했다.  

 

'수도에 온 방문객 잡담'이라는 칼럼에 소개된 것이었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의 은둔국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병합 후) 3년 미만에 조선은 전통이 판을 치던 느릿느릿한 나라에서 생기 넘치고 번잡한 산업중심지로 변했습니다. 철로는 국내를 종횡으로 가로질렀고 도시는 전기화됐고 공장, 제작소, 백화점이 매일같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서울은 단지 그 주민들의 피부색깔이 다를 뿐 신시내티 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조선의 변화는 상상을 넘는 점이 있습니다."

 

이 발언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으나 귀국할 경우 일제의 탄압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이런 언동이나 그 이후의 친일적 행동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 비해 월등한 데 대한 평소의 인식이 작용한 결과로도 보인다. 군사대국인 일본을 상대로 단발성 무력항쟁을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을 환영나온 박용만(앞줄 좌측) 1913년 2월 3일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으로 돌아가 봐야 암담할 뿐이어서 계속 미국에 머물다가 그해 12월 이승만은 박용만에게 편지를 쓴다. 자기도 하와이에 가서 외교와 출판 사업을 하고 싶으니 길을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박용만은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국보' 주필로 갓 부임해간 터였다.   

 

그는 '신한국보'에 이승만 박사를 찬란하게 소개했다. 그리고 다음 해 2월 그를 하와이로 불러들인다. 자기를 물어뜯을 호랑이를 불러들인다는 것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명색이 결의형제의 동생인 박용만 밑에 들어가서 일하기를 이승만은 원치 않았다. 대신 감리교 목사인 와이드먼과 연결이 돼 감리교에서 운영하던 한인기숙학교 교장의 직임을 맡게 됐다.

 

외교와 출판을 하고 싶다던 이승만은 곧 '태평양잡지' 발간에 착수했다. 그 창간호가 9월 1일 나왔다.         

 


하와이데 도착한 이승만과 마중나온 박용만 (1913.2.3)





박용만은 그가 주필로 있는 '국민보'(1913년 8월 13일부터 '신한국보'를 '국민보'로 개제)에 '태평양잡지'의 기사광고를 꾸준히 실었다.

 

"여러 해 동안을 경영하고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이박사 승만씨가 '태평양잡지'를 발간한다 함은 이미 본보에 여러 번 말한 바이어니와 9월 1일에 비로소 제1호를 발행하는데 책의 술은 비록 크지 못하나 대개 전일 상항에서 발간하던 '대도'와 근사하며 그 안에 게재한 문제는 정치, 종교, 과학, 잡조 등을 기록하여 잡지 성질의 온전한 제도를 보였으며 또 거죽에는 사진조각을 넣어 아름다운 색체를 한 층 더하였더라. 잡지 값은 매권에 25전씩 작정."

이것은 1913년 9월 3일자 '국민보'에 잡지를 소개한 글이다.   


이승만은 언론이야말로 투쟁의 무기라는 걸 일찍이 터득한 사람이었다. 

이미 15년 전 고국에서 '협성회회보'의 주필을 맡아 논설을 썼는데 한성의 일본 거류민도 놀랄 정도였다.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에도 혁신적인 논설을 써 이름을 날렸다.

 

이승만보다 3개월 먼저 하와이에 도착한 박용만은 이태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틀을 탄탄히 다져 놓았다. 도착 6개월 만에 국민회 지방총회를 사단법인으로 등록시켰고, 하와이 정부에 특별경찰권을 청원하여 허가를 받았다. 1914년 국민회에 납부된 회원들의 의무금은 자그만치 1만 달러를 넘었고 회관 건축비로 5천불이나 모금됐다. 1만 달러는 요즘 가치로 대략 1백만 달러나 되는 거액이다

 

한두 푼이 아닌 국민회의 막대한 재정은 이승만을 조급하게 했다. 돈이 곧 힘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동포들의 헌금은 국민회에 집중되고 있었다. 국민회를 장악하지 않으면 세력이 될 수 없음을 이승만은 간파했다. 

 

그는 교육사업에 재정지원이 미흡하다고 국민회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그 불만을 '태평양잡지'에 토해내기 시작했다.

 

"대저 국민회관 건축이 우리에게 학식을 주겠는가 재정을 주겠는가 일반동포가 이해득실을 판단해야 할 것이며 국민회에 돈을 주어서 시루에 물 붓듯이 없애는 것보다 이승만에게 주어서 사업하는 것이 한인 전체의 유익이 될 것이다."

 

이승만은 국민회에 도전하는 선전포고를 '태평양잡지' 제2권 6호에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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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이 교장이 된 한인기숙학교 앞에서. 왼쪽에서 2번째가 박용만, 4번째가 이승만.1913년 4월 13일.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캐나다로 이민했으며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한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 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 그 속에 '우성 박용만 약전'이 포함돼 있음.
신한국보, 국민보, 신한민보, 공립신보, 단산시보 등 1백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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