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8> 무궁한 희망이 창자마다 가득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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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박용만과 그의 시대-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제8회) 무궁한 희망이 창자마다 가득하도다
분열식과 집총시범 등 기운이 펄펄 솟는 야외행사가 끝나자 저녁 8시부터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행사가 벌어졌다. 오페라하우스에는 1500여 명의 동포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밀집했다. 남녀 세 사람이 나와 애국가를 불렀고 여학생과 남학생이 나와 춤사위를 펼친 후 연극공연이 시작됐다.
1막은 봇짐을 메고 간도로 이주하는 본국동포 가족 다섯이 압록강을 건너면서 차마 조국을 이별하기 애석하여 가슴 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입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됐다. 2막에선 본국 학생들이 일본 병정들에 의해 총살을 당하려는 찰나 의병들이 나타나 구출하는 통쾌한 장면이 나온다. 3막은 독립운동을 하는 데 있어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 일본군과 맞서 싸운 의병들. 1907년 경.
연극 막간에는 13명의 부인들이 나와 창가를 했다. 하필 13명인지는 100년 후 사람이 어찌 알겠나. 구한말 조선 땅이 13도였으니 고국을 그리워하는 숨은 뜻이었을까. 어쨌든 고국에서는 얼굴도 들 수 없는 부인들을 무대에 내세운 거 하며 독립운동을 연극으로 꾸미는 거 하며 연출자들의 그 유전자가 오늘날 한류(韓流)에도 건네지지는 않았을까.
무대에는 몇 사람씩 무리를 지어 이런저런 단체들이 자기네 간판을 내걸고 어떤 단체는 교육만 주장하고, 어떤 단체는 산업을 우선 주장하고, 어떤 단체는 예수교만 전파하여야 나라를 찾는다 한다. 또 어떤 단체는 무력을 길러야 나라를 찾는다고 하여 오직 자기네 주장만 옳고 남의 주장은 배척하여 쟁투를 일삼는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그런 연후 한 목사가 등장한다. 각 단체들을 설득하여 어떤 한 가지만 나라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단합하여 우선 하나님께 맹세하고 다 같이 나라를 구하자고 하자, 지난 과오를 버리고 모두가 단결하기로 맹세하는 장면에서 막이 내린다.
행사 때 마다 연극을 올린 것은 특히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북미는 물론 만주의 독립군들도 전투를 하며 옮겨 다니던 산속에서 연극을 꾸몄다. 대중의 카타르시스를 단박 끌어내는 데는 연극이 그만이었다. 나라 잃은 슬픔을 상기시키고 나라를 다시 찾는 통쾌함을 통해 투쟁의식을 고양시키는 데는 연극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북미의 계속 이어지는 연극 활동은 연구과제가 돼 근래 한국에서 학위논문으로까지 제출됐다.
연극이 끝나자 부인들이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노래를 하고 웨슬레홈 여학생들은 무용을 선보였다. 중앙학원 학도들의 군악을 마지막으로 모든 순서가 끝난 것은 밤이 꽤 깊은 시각이었다.
"오늘을 가지고 이전 날의 비참한 회포도 없지 않거니와 또한 오늘을 가지고 장래를 생각하면 무궁한 희망이 창자마다 가득하도다"라고 '국민보' 기자는 감격에 찬 기사를 썼고 "우리의 2월 2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과 다를 바 없다"고 논설에 썼다.
총회장 김종학은 하와이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마다 동포사회를 대표하는 수장으로 우러름을 받았다. 얼마 안 있어 '대조선국민군단'의 막사 준공식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 대조선국민군단의 병영
낮에는 파인애플 농장에서 노동을 하고 저녁에는 군사훈련을 받는 '대조선국민군단'이 박용만에 의해 조직된 것은 1914년 6월 10일. 군대 막사와 그 정문의 낙성식이 8월 29일에 거행됐다. 그날도 총회장 김종학이 지켜보는 앞에서 군단의 사열식이 벌여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 9월 24일짜 '병학교 락셩연'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그 정황을 이렇게 적었다.
"박용만씨가 쥬당(주장)하난 '산넘어병학교'난 하와이 동포의 무육을 배양하난 조직톄인데 그간에 여러 동포의 열심 찬조함으로 그 학교집을 거월에 필역하고 동 29일에 락셩례식을 거행하얏는데 당일에 관광한 빈객이 남녀 병하야 5백여 명에 달하얏고 1백 80명 되난 병학교 학생들은 관병식으로 국민회 하와이 디방 총회댱 김죵학씨를 영접하야 례식을 필한 후에 리박사 승만씨는 밋음(믿음)이라는 문뎨(문제)로 뎐도(전도)하얏다는대 당일에 굉대한 셩황(성황)이 잇셧다더라."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 그 속에 '우성 박용만 약전'이 포함돼 있음.
신한국보, 국민보, 신한민보, 공립신보, 단산시보 등 1백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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