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7> - 이 때만은 하와이가 남의 땅인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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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7> -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 1914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창립기념
이 때만은 하와이가 남의 땅인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국민회 창립기념 및 지방총회장 취임식에 참가하는 단체들은 출연복장이 다채로웠다. 하와이는 여러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섬마다 출연 복장을 특이하게 한 거였다. 카할루 섬의 해군대는 완전 해군복으로 통일해 그 산뜻함과 엄숙함이 방금 군함에서 내린 듯 했다.
와히아와 섬에서 참가한 구한말 군인 출신 장정들은 구한말 군복인 검은 옷에 붉은 동을 달았다. 모자는 나폴레옹이 쓰던 모자를 비슷하게 흉내 냈다. 에와 섬에서 온 참가자들은 흰 모자를 쓰고 회색 상의와 노란색 바지의 신식 군복으로 차려 입었다.
호놀룰루에서 참가한 장정들은 열대지방에 걸맞은 육군사관의 흰 군복들을 착용했다. 광무 군인들 외에 중앙학원 학도대와 누아누 섬의 신민학교 학도대는 흰 모자와 흰 옷에 붉은 전대를 휘둘렀다.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 가운데는 광무황제(고종) 시절의 대한제국군인 출신들이 적지 않았다. 망국의 한을 이기지 못한 그들은 이런 날이라도 예전의 군복을 차려 입고 광무시대 한국군인의 당당한 모습을 동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박용만은 이처럼 '대조선국민군단'을 꾸리기가 용이했던 것이다.
총회장의 연설이 끝나자 연단 앞에 도열했던 광무군인들과 학도대는 대대장의 구령으로 일제히 '받들어 총'을 했다. 그 순간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경례를 하는 사람이나 경례를 받는 사람이나 그리고 구경하는 사람이나 돌덩이처럼 무거운 것이 일순 그들의 가슴을 메웠다.
그날 행사의 분위기와 감격을 '국민보' 기자는 2월 7일자 신문에 이렇게 적었다.
"아침 예식을 이렇게 마치매 때는 곧 정오가 되어 태양이 중천에 임한지라 총회장(김종학)과 부회장(박원걸)은 연단에서 내리고 관광자들은 헤어지기를 시작하는 곳에 나팔소리가 군인의 귀를 놀래며 밥 먹으라는 명령이 떨어지매 각 소대는 당번을 뽑아 밥을 나누기를 시작하니 (중략) 광무군인들은 원래 바람에 밥 먹고 이슬에 잠자기를 평생의 낙으로 지내던 사람들인 고로 비록 어떤 군인들이 음식의 부족한 예비를 말하는 자가 있어도 서로 위로하며 서로 경계하여 융융한 화기를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밥 먹기를 마친 후에 각 중대는 신지에 취립하고 대대장은 대대를 정돈한 후에 "우향 우!", "앞으로 가!" 소대 중대 측면종대로 빈여드를 향하여 행진하니 독립의 기는 펄펄 날리고 자유의 북은 쾅쾅 울리는 가운데, 250 명 건장한 아이들은 나팔을 응하여 발을 움직여 펀취볼을 지나 빈여드에 나가니, 길은 사람의 바다요 사람은 춘풍에 취한 나비이라, 행하고 다시 행하여 마침내 빈여드 운동장에 다다르매 남녀 동포 수천 명은 벌써 먼저 도달하여 자리들을 정하여 앉았다가 공원 문이 열리는 곳에 태극기가 날리는 것을 보고 젊은이 늙은이 없이 모두 일어나 대조선 만세를 소리하매 이때를 당하여는 하와이가 곧 남의 땅인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 한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분열식 행진을 하고 있는 대조선국민군단
일대대의 사졸이 운동장에 들어가 대대횡대로 대차를 정한 후에 부관은 대대를 정돈하여 대대장에게 바치매 대대장은 친히 장졸을 점고하고 "어깨총!", "받들어 총!"을 두어 번 시험하는데 이때에 참의원, 대의원과 일반 임원들은 총, 부회장을 인도하여 관병자 위치에 도달한지라 대대장은 곧 "받들어 총!"으로 경례호를 취주하고 다시 "분열 앞으로!", "향도 우로!", "앞으로 가!" 구령으로 분열식을 행하여 각 중대가 차례로 총, 부회장 앞으로 지나가고 대대의 첫 머리가 신다에이고에 당한 후에는 대대장은 구보를 부르며 나팔수는 구보호를 질주하니 이는 당일 관병 예식의 마지막이라. 산 같이 모여 앉은 우리 동포들은 때때로 소리를 지르며 흥기를 발표하니 이는 오히려 전일 대한제국 육군관병식에 다만 엄숙한 것이 주상할 때보다 십분 나은 줄을 깨닫겠더라. ..."
각 군대의 분열식과 집총시범은 오후 4시경 끝내기로 예정돼 있었다. 이어서 일반인의 운동경기가 계획돼 있었다. 여학도 남학도의 달리기는 물론 부인들의 감자줍기 경기와 남학도들의 2마일 자전거 경주도 순서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각 군대들의 훈련시범이 너무 시간을 끌어 일반인의 경기들은 진행되지 못했다.
어느덧 짧은 겨울의 어스름이 스며들었다. 군인들을 사랑하는 나머지 소다를 사고 과실을 구해 훈련에 참가했던 대원들의 목을 적시게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부지기수였다. 총부회장은 각 부대들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 일곱 개의 기를 준비했는데 1등기는 중앙학원 학도대에, 2등기는 카할루 해군에게 수여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 신한국보, 국민보, 신한민보, 공립신보, 단산시보 등 1백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http://cafe.daum.net/woosung18810702/9a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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