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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6> -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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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도르테아
댓글 0건 조회 2,253회 작성일 10-09-1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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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1928년 북경에서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1912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박용만과 그의 시대 6> -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었으며

하와이 지방총회 총회장 김종학이 제 몸을 겨누고 쏜 권총소리는 동포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쓰러진 그의 곁에서 유서도 발견됐다.

  

"수 월 전에 국민회에셔 나를 향하야 재정 1쳔 5백원을 흠츅하였다 하야 피챡되엿슬 때에 나는 나의 생명을 바리고쟈 하얏스나 일반 동포들이 나를 도젹으로 지목한 즉 더러운 루명을 쓰고 죽기가 억울하야 지금까지 기달엿뎌니 이졔는 법원에서 배심관들이 확실한 증거가 업다하야 나를 무죄로 판결하얏스니 오날은 모든 허물이 다 깨긋하얏도다. 그러나 리승만은 나를 더욱 괴롭게 하기를 말지 안이 하니 나는 셰상에 처하기를 달게 녁이지 안음으로 차라리 죽어 셰상을 닛고져 한다."

 

유서는 뒤늦게 본토로 흘러가 1915년 10월 14일자 '신한민보'에 전문이 실렸다. 하와이 동포사회의 풍파는 샌프란시스코의 동포사회를 강타했다. '신한민보'는 '재외한인의 비운'이라는 장문의 논설을 싣고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개탄했다.

 

왜적에 대항하자면 땅에 흩어진 솔가리 한 잎도 묶어 세워야 할 판에 해삼위건 하와이건 같은 동포끼리 서로 작대기를 휘두르며 쌈질이나 하고 있으니 독립이고 나발이고 물 건너 간 조짐이었다.

 

'외한인의 비운'이라는 논설의 일부를 조금 더 인용한다.

 

"아모케나 리승만은 우리 해외 한인사회를 전복시키며 동족 사이에 악한 감정을 원수 같이 넣어주는 자이니 이를 오래 참을 수 없는 바이나 아직까지 여망을 두고 행여나 동포사회를 유지할까 동족의 악한 일을 세상에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더니 지금 하와이에서 오는 소식을 들은즉 총회장 임무를 맡았다가 재정갈몰이라 하는 일로 축출을 당한 김종학씨의 재정흠축이라 하든 일은 리승만씨의 선동으로 됐던지 재판소에 증거를 내어놓지 못 한고로 김씨는 무죄 해방됐고 김씨는 자기를 모해하려든 일이 귀정된 후에 리승만씨의 행한 일이 원통해 유서를 써놓고...(하략)" 

  

김종학이 육혈포의 총구를 자기 입안에 겨누고 있을 찰나 아이들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알은 목구멍 대신 왼쪽 뺨을 뚫고 나갔다. 그는 병원에서 몇 시간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했다. 이 자살미수가 일어난 건 1915년 9월 15일의 일이었다.        

 

김종학은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인 '국민보'에서 박용만이 사장으로 재직 당시 총무의 직분을 맡았던 사람이다. 성품이 충직하고 순심한 선비로서 치욕과 동포사회의 분란이 너무 억울해서 육혈포의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하와이 국민회는 대한인국민회의 하와이 지방총회가 정식 명칭이고 북미 지방총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여기저기 산재했던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일하기로 뜻을 모와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된 건 1909년 2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서였다.

 

이날의 창립축하식은 하와이에서도 거창하게 벌어졌다. 그날이 월요일인데도 전체 동포들이 휴업하고 한인의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었으며 1천여 동포가 호놀룰루에 모여 경축했다. 각 농장과 관청에선 이날을 한인의 경축일로 인정했고 하와이 주정부의 총독대리와 여러 관리들이 행사에 참석해서 축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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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동포들이 집단거주하던 집들. 1910년 경.

 

국민회 창립 기념일에 새로 선출된 하와이 지방총회장의 취임식이 거행되는 것도 관행이 됐다. 김종학 역시 1914년 2월 2일(월요일) 기념일에 지방총회장으로 취임했다. 연임으로 재선된 박상하가 교회의 목사로 부임키 위해 사퇴하는 바람에 재투표에서 그가 당선된 것이다. 다음 해에도 연임하게 됐는데, 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진 박용만의 후원이 유효했을 것이다.

 

그 즈음 박용만은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국민회 기관지 '신학국보'의 주필로 초빙돼 1912년 12월 하와이로 건너왔다. 그가 호놀룰루에 도착했을 때는 600명의 동포들이 부두에 몰려나와 마치 새로운 두령이라도 맞이하듯 소란스러웠다. 후 박용만은 한손에 펜, 한손에 총을 들고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김종학의 총회장 취임식은 엄숙하고 의연했다. 총회장은 단순히 친목회의 장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뽑은 정부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위엄의 상징이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행사가 이어졌는데 기념식과 취임식은 중앙학원에서, 야외행사는 빈여드 공원에서 그리고 하와이 총독부 건너편 오페라하우스에서 저녁 8시서부터 축하공연이 벌어졌다.

 

2월 1일 저녁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해 밤새 그치지 않았으나 아침이 되자 씻은 듯이 갠 날이었다. 망국의 비운 속에서 자칫 잃기 쉬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 동포들은 정성을 다해 행사를 준비했다.

 

"햇빛을 받는 곳 마다 주 예수 왕이 되시고, 이 세상 끝날 되도록 그 나라 왕성하리라…."

 

아침 열시에 회중들이 찬송가 206장을 합창하면서 취임식이 시작됐다. 총회장 김종학은 회중 앞에서 엄숙히 선서를 한 다음 연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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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독립군단이 취임식이 끝난 후 호놀룰루의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캐나다로 이민했으며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한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 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 그 속에 '우성 박용만 약전'이 포함돼 있음.
신한국보, 국민보, 신한민보, 공립신보, 단산시보 등 1백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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