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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54년 왕정 무너뜨리고 세운 강국 (민족통신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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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556회 작성일 10-09-17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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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이란:54년 왕정 무너뜨리고 세운 강국

호메이니 혁명승리로 이룩한 주체형 강성대국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은 이번에 50번째 <민족통신> 연재글로 "이란"에 대해
고찰하고 "이란은 세계 석유 매장량 2위의 대국일 뿐만 아니라 천연 가스 매장량도 소련 다음으로 단연
지하자원 부국이다. 인구는 7천 2백만명이고 국토는 우리 조국반도의 약7.5배 가량되는 나라로서 중동의
이슬람 대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호메이니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 54년을 청산하고
중동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고 진단했다. 전문을 게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이란:54년 왕정 무너뜨리고 세운 중동의 강국

호메이니 혁명승리로 이룩한 주체형 강성대국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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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유태영 박사
이란은 세계 석유 매장량 2위의 대국일 뿐만 아니라 천연 가스 매장량도 소련 다음으로 단연 지하자원 부국이다. 인구는 7천 2백만명이고 국토는 우리 조국반도의 약7.5배 가량되는 나라로서 중동의 이슬람 대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는 이번에 <민족통신> 50번째 연재글로 이란에 대해 고찰한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란은 호메이니 혁명에 의하여 54년의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리고 그 숱한 외세의 회오리 바람을 물리치고 중동의 땅에 세운 주체형 강성대국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란은 미국이 북조선,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정한 나라로서 미국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러나 이란도 위성운반용 로켓 사피르- 2호를 자체개발하여 우주공간에 “희망” 이란 이름의 인공위성을 성공적으로 쏘아 올린 나라로서 국제사회는 이란을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나라로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 무시하지 못할 나라로 부상한 중동의 군사강국이 되었다.

이렇게 군사강국이 된것은 호메이니 역할이 컸다. 그는 1979년 외세에 기울어진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이란은 2009년 이슬람 공화국 창건 30돌을 맞아 중동의 강대국으로 우뚝서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란 내부는 다소 복잡한 면도 없지 않다. 외세를 배격하면서 자주를 지향하는 <정치노선>과 이 노선을 반대하면서 외세를 끌어 들이려는 이른바 사대주의적 <정치노선>을 주장하는 세력간에 갈등이 존재하고 있다.

이란을 고찰함에 있어서 이 양대 정치노선의 대립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친미 외세의존적 기득권 세력을 <보수주의>라고 하고, 반미반제와 자주자립 정치노선을 <개혁주의>라고 부르는데 이란에서는 이것과 정 반대이다. 즉 친미사대의전적 기득권 세력을 “보수주의”라고 하고, 반미자주자립을 주장하는 세력을 ‘개혁주의”라고 일컫는다.

이란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부터 줄곧 <친미친서방 개혁파>와 <반미반외세 보수파>가 서로 대립하여 치열한 투쟁을 하면서 여러번 승패를 거듭하여 번갈아 집권해 온 나리이다.

1925년에 친미 외세의존 개혁파로 왕위를 계승받아 등장한 팔레비왕은 국명을 <패르시아> 에서 <이란> 이라고 개칭하면서 이른바 <근대화 개혁>을 빠르게 촉진했다. 그러나 팔레비왕의 친서방개혁주의 정책은 시작 초기부터 이란을 대혼란으로 빠트렸다.

이란의 석유채굴권을 모두 다 영국에게 빼았기는 처사로 부터 시작하여 나라의 중요한 결정은 영국, 프랑스, 소련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처지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뒤바뀐 것은 1979년에 호메이니의 반외세 보수주의 혁명운동에 이란민중들이 합세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혁명을 성공한 업적에 기인된다.

1.간추린 이란의 고대 역사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노아 방주의 흔적을 이란에서 새로 발견했다고 하는 새로운 학설을 탐험가이며 지질학자인 밥 코누크 박사가 주장하여 고고학계에 큰 관심사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오래 동안 터키의 아라랏산을 노아방주가 정착한 장소라고 기독교 신학자들이 주장해 왔다. 아뭏든 이란은 고고학적으로도 명승지로 여겨진다.

이란의 역사를 크게 시대별로 구분하면 첫째 고대 페르시아시대, 둘째 이슬람의 페르시아 정복과 그 이후의 이슬람시대, 셋째 근대 이란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첫째 고대 페르시아 시대와 둘째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슬람시대에 대 하여는 주요한 골자만을 간략하게 다루고 셋째 <근대 이란시대> 에 대하여는 이란의 국내정치문제와 외세문제 그리고 외세침략으로 인한 복잡한 중동문제들이 얽혀 있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고대 페르시아 시대 (BC 2,800 – AD 650): 이 시대는 (1)아리아족의 이주와 메디아 왕국, (2) 파르티아 제국, (3) 고대 페르시아 제국시대로 이어지고 둘째, 이슬람의 페르시아정복 이후시대 (650 -1794):는 (1)헬레니즘시대, (2) 투르크 셀주크 제국시대, (3) 몽골제국점령시대, (4) 샤파비 욍조시대, (5) 이슬람 시아파 왕조시대, 그리고 (6) 아프샤르 왕조와 잔드 왕조시대를 끝으로 이슬람 시대는 모두 다 끝난다.

2. 카자르 왕조 등장과 근대적 이란시대 전개


근대 이란역사의 시작은 1795년 카자르 왕조 시기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카자르 왕은 이란의 수도를 지금의 테헤란으로 옮겼으며 근대화의 문호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카자르 왕은 극악무도한 성격과 사치로 인하여 자기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그 후 1848년에 집권을 시작한 낫세르 샤 왕은 러시아와 싸워서 두번이나 패하고 국토 일부를 빼앗겼고, 영국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칸 아미르 재상이 쓸어져 가는 이란을 살리기 위하여 대외 강경책을 들고 나와 부국강병책을 써 보려고 하였으나 이것도 낫세르 샤왕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고 해임당하자 곧 샤왕에 의해 죽고 말았다. 이 아미르 재상은 아직도 이란 민중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이란은 1800년대를 마감하고 1900년대에 들어선 시기에 또 다시 외세들의 침략행위로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1906년 영국과 러시아의 이란 양분정책에 의해 이들의 수탈 대상이 되었다. 이들 영국과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가서 비로서 이란의 독립을 승인했다. 그렇지만 서방의 강대국들은 말 뿐이고 여전히 이란을 지배하려고 모두 서로 노리고 있었다.

그럴 때 영국은 러시아가 1917 볼세비키 혁명으로 내정에 몰두하고 있는 틈을 타서 1919년 이란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비밀협정을 강요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러시아는 영국의 비밀협정을 국제사회에 고발하였고, 미국은 러시아에 동조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 이유는 미국도 이란의 석유에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독점을 달가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도래하자 이란 민중들은 영국의 식민지화를 반대하며 반영국 봉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란 민중들의 반영국 봉기를 오히려 좋은 기회로 삼아 민중봉기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영국의 배경을 등에 업고 등장한 세력이 바로 <레자 샤 팔레비 왕조, 1926년>였다. 레자 샤 팔레비 왕은 이슬람 학자들에게 서구식 근대적 국민의식을 이란 국민들에게 주입시키도록 강요하고 명령했다. 그는 서구식 근대화 개혁주의가 이슬람주의와 서로 대치하도록 유인하고 경제적으로 중산층의 형성을 장려했다.

레자 샤 팔레비왕은 이슬람 종교를 하나의 사회문화 정치체제로 격하시키고 이란의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고치고 특히 여성 차도르를 없애는 등 많은 서구식 개혁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운동을 민중의 합의에 의하여 진행하려고 계획하지 아니하고 오직 외세의 강요와 팔레비 왕권의 확립만을 목적하여 일방적으로 강경하게 진행하는 바람에 팔레비 왕은 이슬람교와 민중들의 규탄 대상이 되고 말았다.

레자 샤 팔레비왕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영국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독일편에 서서 경제관계와 정치적 유대를 가짐으로써 팔레비 왕은 독일의 나치파가 되었다. 이란은 제2차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또 다시 영국과 러시아의 침략을 받고 이들에 의하여 이란 남부와 북부가 이들 강대국들에 의해 점령당하는 비운을 만난다.

레자 샤 팔레비왕은 영국과 러시아의 점령으로 정권의 위기감을 느끼다가 결국 1941 년에 그의 아들 모하마드 팔레비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레자 샤 팔레비왕은 영국에 의하여 체포되였고 결국 방랑객이 되여 중동에서 전전하다 1944년에 남아공화국의 요한네스버그에서 비극적으로 객사하고 만다.

왕위를 이어 받은 아들 모하마드 팔레비 왕은 여전히 친서방 노선을 계승했지만 이란 민중들의 반영국과 반미국 감정에 의한 반제 물결이 파도처럼 거세게 일자 난처한 상황에 봉착한다. 그는 결국 대세에 밀려 자의반 타의반으로 반영반미 운동권의 조직체인 <국민전선>의 지도자 모사테크를 1951년에 국무총리로 임명 했고, 약체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비상대책으로 이슬람 민족주의자를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왕과 국무총리는 정견이 서로 다른 거리가 먼 상대이면서도 국정을 함께 운영해야 만 했다.

총리에 취임한 모사테크는 취임과 동시에 첫째로 영국으로 부터 석유의 채굴권을 되찾아 국유화 했다. 이란 민중들의 열열한 지지는 자연히 소수 특권 지배층과의 충돌을 야기시켰다. 다시 말하면 총리와 왕권 사이에 갈등이 심화됨으로 인하여 모하마드 팔레비 왕은 할 수 없이 로마로 망명을 떠난다.

국정을 총괄하게 된 모사테크 총리의 강력한 정치노선이 점점 이란의 사회주의적인 투데당과 협력관계의 움직임이 깊어지게 되자 영국은 이란의 자금줄을 차단하는 강경책을 들고 나왔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방금 새로 발족시킨 미국중앙정보국(CIA)의 비밀공작을 이란에서 실행 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군부를 움직인 끝에 친미 쿠테타를 일으키도록 공작했다.

1953년에 CIA 음모하에서 쿠테타를 일으킨 이란 군부는 국정을 총괄하고 있는 모사테크 총리를 반역자로 체포하여 3년동안 투옥했다. 감옥에서 풀여난 모사테크는 가택연금으로 부자유하게 지내다가 1967년에 비참하게 사망하고 만다.

로마에 망명중에 있던 모하마드 팔레비 왕은 군부의 쿠테타가 성공한 후에 곧 다시 테헤란으로 복귀하여 왕권을 회복했다. 그후 미국의 절대적 보호하에서 팔레비 왕은 26년 동안 집권을 한다. 모하마드 팔레비 왕정은 이란의 석유권을 미국 에게 40%, 영국에게 40%를 나누어 주었으며 이란자체엔 고작 20%만을 배분하는 굴욕적인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모사테크를 축출하고 미국의 보호하에 있는 모하마드 팔레바 왕정은 친미친영 노선을 노골화하며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이슬람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반역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 당시 소련의 중동진출을 막기 위하여 1955년에 <바그다드 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회원국이 아니지만 좌지우지했다. 1958년에 미국은 또 다시 중동지역의 패권을 갖기 위해 소련에 맞서기 위한 조직으로 <중앙조직기구,CENTO>를 신설하고 중동지역에서 반공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모하마드 팔레비왕은 1959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맺고 미국군이 이란에 주 둔하는 것을 법적으로 허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1963년에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작하여 토지개혁, 선거법, 이윤분배, 문맹퇴치 그리고 여성의 선거권 등 다양한 사회변혁 정책을 발표했다. 이것은 이란 사회의 서구화를 촉진 시키려는 속셈이 숨어 있었다. 그는 외세에 의존하여 왕권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모하바드 팔레비 왕은 미국을 배경으로하여 자신감을 얻고 이란을 중동의 경찰국 역할을 할 꿈을 꾸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군비강화에 나서 미국산 무기를 사들이기 시작 했다. 하지만 과시성 예산 낭비와 왕정의 과다한 국고낭비와 빈부견차 등으로 인하여 이란의 경제는 날이 갈구록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이에 대해 이슬람 성직자들은 팔레비 왕 세력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였다. 이란 민중들은 팔리비 왕의 굴욕적 친미 노선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고 민족의 자주성을 상실하는 무분별한 서구화정책에 정면으로 맞서 투쟁의 기치를 들었다. 이 바람에 모사테크의 자주자립노선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반미반외세를 지향하는 민중운동의 중심에 바로 호메이니가 있었다. <모사테크 국민전서>, <이란 자유운동>, <테다인 민병대>, <테다인민병대>, <무자헤딘 이슬람전사>, <호메이니의 운동> 등 모든 애국단체들이 호메이니 혁명 운동의 원동력이 되어 “팔레비 왕정타도 운동”으로 발전했다.

3.호메이니 이슬람 혁명과 이란 마지막 왕조의 붕괴


모하마드 팔레비 왕은 마지막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1963년 호메이니는 팔레비 왕정의 <백색 혁명>을 심도 있게 비판하여 민심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또 팔레비 왕의 행위는 이슬람 전통과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시키는 악행이라고 규정하고 맹렬히 비판하는 한편 팔레비 왕정 종식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해 팔레비 왕은 호메이니를 체포하여 8개월간 옥고를 치루게 했다. 그러나 1964년 감옥에서 나온 호메이니는 미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때 팔레비 왕은 호메이니를 터키로 강제 추방했다가 1965년에는 이라크로 보냈다. 팔레비 왕은 이것도 성이차지 않아 이라크에 압력을 가해 그를 프랑스로 또다시 추방했다.

프랑스 비밀경찰은 호메이니 암살을 팔라비 왕에게 제언 했지만 팔라비 왕은 이 제언을 거절 했다고 한다. 그의 거절의 이유는 만일 호메이니가 암살을 당한다면 호메이니는 역사에 남는 <순교자 성인>이 될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팔레비 왕은 그것만은 원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팔레비 왕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적 여론은 들끓었다. 그 당시 미국의 지미 커터 대통령 까지도 팔레비 왕의 과도한 인권탄압과 호메이니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우려하는 표시를 하기도 했다.

호메이니는 망명중에 있으면서 “이슬람 법학”저서를 출판하면서 여기에 “이란에는 절대로 왕조가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이란의 최고 통치자는 왕이 아니라 이슬람성직자의 최고 의회가 선출한 <파기>라고 주장했다. 호메이니의 주장은 왕권을 대행할 수 있는 성직자 최고의회를 강조했다. 그때 호메이니가 망명 중에 집필한 정치제도인 <성직자 최고회의> 제도는 지금도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에서 튼튼히 자리잡고 있다.

이란은 1970년 하반기 접어 들면서 국내외에서 팔레비 왕을 규탄하는 한편 호메이니 추방을 반대하는 국민적 항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1978년에 그 항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성직자와 신학생들이 거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의 폭력진압에 400여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란 민중들의 항쟁은 점차 거세졌다. 경찰들의 무차별 총격사건도 일어나면서 이란 정국을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팔레비 왕은 결국 민중항쟁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팔레비 왕은 1978년 12월에 왕이 신임하는 온건파의 지도자 비크타아르에게 이란 통치권을 위임하고 1979년 1월 16일 퇴임하고 피신하고 말았다. 그가 퇴임하고 피신한 곳은 미국이 보호하는 장소로 밝혀졌다. 팔레비 왕가는 이것으로 1925년에 등장하여 서구외세를 등에 업고 기득권을 누리다가 결국 54년만에 퇴진했다.

이란은 민중항쟁으로 혁명을 승리한 새봄을 맞이했다. 왕정이 퇴임한지 2주일 후인 1979년 2월 1일에 호메이니는 15년 간의 프 스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이란으로 돌아왔다. 600만 이란 민중들이 떨쳐나와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 했다. 호메이니는 2월 11일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총리로 바자르간을 임명하고, 3월 31일에 16세이상의 모든 이란 국민이 참가하는 국민푸표를 실시했다.

1979년 11월 4일에 이란 미국대사관 인질사건이 돌발했다. 호메이니 추종자 열성 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을 급습하여 미국인 63명을 인질로 잡고 미국이 보호하고 있는 팔레비 왕을 부정부패 재판을 위해 넘겨달라고 요구 했다. 학생들은 미국 대사관을 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파이 소굴이라고 이름 붙이고 비밀문건 50권을 공개하기도 했다. 미국인 인질 50여명은 444일 동안 붙잡혀 있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질들의 조기석방에 실패했기 대문에 대통령 재선에서 레이건에게 패배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란 혁명위원회는 1979년 12월 이슬람 공화국을 표방한 이란 헌법을 채택하고, 1980년 2월 4일에 헌법에 의한 초대 대통령으로 바니 사드르가 선출했고, 호메이니는 <혁명의 지도자>로 종신 최고지도자로 추대했다. 호메이니는 이란 민중들의 가슴속에 <혁명의 아버지>로 영원히 심어 놓고 1989년에 사망했다.

4.승자도 없는 미국의 대리전 이란-이라크전 8년


호메이니 이슬람 혁명의 승리로 인하여 반민족 팔레비 왕정은 붕괴되고 말았다. 팔레비 왕국의 붕괴를 그 누구보다도 염려한 나라는 바로 미국이였다. 왜냐하면 팔레비 왕정은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친미정권으로서 미국이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정책의 거점으로 활용해 왔었기 때문이다.

팔레비왕정의 붕괴는 곧 미국의 영향력이 중동에서 축소된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호메이니 이슬람 혁명의 승리로 인하여 중동에서 이란의 정치적 영향과 이슬람 원리주의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미국의 중동정책은 큰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민에 봉착한 미국은 그 공백을 메우는 방법으로 이란과 이라크 사이를 갈등구조로 만들기 위해 공작했다. 그 후유증으로 일어 난 것이 바로 1980년 9월 22일에 발생한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이란 혁명정부는 1980년 2월 4일에 비로서 처음으로 헌법을 채택하고 새 대통령을 새로 선출해 놓은 불안전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시기였고, 그리고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으로 인하여 미국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초비상 상황 속에서 석유수출의 중단은 물론 모든 수입이 봉쇄를 당하고 있는 매우 긴박한 시기였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은 이란과 이라크 사이가 이슬람 종교의 오래된 분파로 이란은 시아파 강국이고, 이라크는 수니파의 본거지로 되어 있어 상호간의 갈등이 오랜 동안 상존해 왔다. 그 외에도 국경 문제로 두 나라는 중동의 주도권을 놓고 팽팽히 맞서 있는 처지에 있었다.

그 때 미국은 오히려 이런 긴박한 상태를 최적의 기회로 활용하여 이라크를 부추겨 이라크가 선제공격을 시작하도록 하여 8년간 전쟁에 불을 붙였다. 이 전쟁이 8년동안 계속한 후에 미국은 또 다시 미국의 중재에 의하여 승자가 없는 전쟁을 종전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미국은 이라크에 접근하여 사담 후세인 정권에게 막대한 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해주기 시작했고, 미국편에 서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초기부터 이라크에 대량의 무기를 판매했으며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에게 극진한 호의를 베풀어 줌으로써 후세인이 화학무기를 포함하여 이들에게 사들인 무기를 가지고 무고한 양민들을 살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발생된 이란-이라크 8년전쟁은 제 2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제3세계 전쟁중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이라크의 사상자가 30만명이고, 이란의 사상자가 70만명으로 집계될 정도로 참혹한 전쟁이었고, 그 전쟁비용도 무려 3천억 달러가 소요 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사실상 미국이 강요한 전쟁이었다. 유엔이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한 것을 비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 나자 미국은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조치를 총동원하여 그런 움직임을 봉쇄해 주었다. 또한 미국은 이라크를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여 미국의 무기가 이라크로 운반되는것을 승인하도록 했다.

이런식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에 직접 침략하기도 했지만 두 나라 사이를 이간하고 불협화음을 조장하여 싸움을 붙이면서 그 사이에서 미국 제국주의 세력의 이익을 챙겨 온 행위들을 서슴치 않았다. 미국이 진정으로 이라크를 지원했으며 이라크의 친구나라인가를 묻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국은 또 1991년 2월 28일 이른바 “걸프 전” 을 일으켜 43일만에 이라크를 완패시켰다. 그리고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를 소유하고 있다는 구실을 대내외에 선전하고, 사담 후세인의 23년 철권정권을 질타하면서 인권을 들먹이고, 민주주의를 거론하면서 뚜렷한 정당성 없이 유엔의 회원국인 이라크를 하루 아침에 침략하여 허수아비 정권을 세우고 남의 나라 대통령과 그의 관리들을 처형시키는 만행을 자행했다. 따지고 보면 이라크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한때 친미사대주의로 미국과 손잡았던 하수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를 침략한 기간 중인 2006년 12월 30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미국의 손에 의하여 체포하고 하수인들로 하여금 그를 처형시켰다.

미국은 그렇게 해 놓고 2010년 8월 31일에 이락침공 7년 5개월 만에 이락에서 미군의 전투임무가 완료되었다고 발표했다. 미군의 사망자는 4417 명으로 집계되었지만 이라크 양민들이 사망한 숫자는 10만여명이라고 보도되었으나 실제로는 어린이, 부녀자들을 포함하여 모두 1백만명이 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전 종전을 선언한지 불과 닷새만에도 미군이 여전히 이라크전에 계속 개입하여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AP 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종전을 선언하면서도 이라크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었다. 미 당국자들은 그 동안 최대 17만명에 이르렀던 미군이 5만명으로 감소되고 이제 곧 미군들을 모두 철수한다고 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이라크 내정에 간여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양심적인 평론가들은 “그 누가 미국이 이라크에서 손을 뗄 것이라고 믿겠는가?”라고 묻고 있다.

5. 오늘의 이란 정치상황


미국이 8월 31일에 이라크 정전을 발표한 것이 마치 중동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은 중국의 중동진출을 봉쇄하기 위하여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라크를 침공한것 처럼 이란에 대하여서도 예방전쟁의 방아쇠를 당길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은 중동에서 미국의 지배체제가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란을 봉쇄하고 터키 와 사우디 아라비아를 끌어 들이고 있다. 세계 군사전문가들은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고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진행하고 있는것 처럼 오바마 대통령도 이란에 대하여<오바마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예상하고 있다.

죠지 더불유 부시가 2002년 연두 국정연설에서 이란을 “악의 축”이라고 지칭했다. 그런데 놀라 운 것은 이란인들은 벌써 30년전에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 미국을 <커다란 악마> 라고 불러 왔다. 하지만 오늘의 이란인들은 복합적 측면에서 두가지 형태의 대미 외교관을가지고 있다. 첫째는 역사적으로 미국의 악행에 대한 뿌리 깊은 <적개심>이다. 둘째는 이란인들의 강한 반미 감정과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실리와 경제 회복을 갈망하여 미국과 <외교관계 복원>을 바라며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워싱톤 정가에서도 두가지 측면에서 복합적인 치열한 물밑 싸움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부시 대통령이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강경책을 그대로 전통적인 압박 구도로 끝까지 끌고 가자고 주장하
는 강경파가 있는가 하면, 둘째는 오바마 대통령이 후보자 일때 이란과 무조건적인 대화를 주장했던 것처럼 미국이 이란정책의 방향을 새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협상파도 있다.

요즘 유대인-네오콘들의 이란침공론이 기세를 부리고 있지만 그 반면에 강경론을 반대 하여 “평화의 언어”로 이란을 대해야 한다는 평화의 길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정책의 변화를 원하는 세력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란 내부 사정도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혼선이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도 없지 않다. 호메이니 혁명 이후에 30여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 30세 이하의 연년층은 미국을 등에 업고 온갖 더러운 정치를 했던 친미적 팔레비 왕정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젊은 새세대들이 있는가 하면 혁명세대에 속하는 중년층 이상의 노년 세대도 있어 이들과 젊은 새 세대 사이에 세대간 시각 차이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이란 상황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이란의 정치 사회의 복잡한 양상들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도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다.

ㄱ)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가 제정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정치제도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절대적 제도이다.이 제도에 의하면 (1) 성직자 86명전문가 위원회 (2) 한명 성직자 최고 지도자 (3) 대통령 (4) 성직자 12명 혁명수호위원 (5) 290명 의회 등 5개의 정치권 제도가 있다. 이란의 최고 국가통치권은 대통령이 아니다. 이란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조직은 <성직자 86명 전문가 위원회>와 <12명 혁명 수호위원회>가 최고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 두 조직이 대통령 후보자도 선정한다.

ㄴ) 성직자 국가 통치권 제도는 절대로 반외세 반제국주의와 반미 자주지립주의 정치노선을 수호한다. 민족주의에 튼튼히 기초한 <보수주의 정치노선>이다. 이 정치노선이 이란의 모든 정치활동을 통괄하고 모두 다 일치하고 조금도 이탈과 변형을 용납하지 않는다.

ㄷ) 하지만 이란의 성직자 보수주의 정치노선 안에 두개의 상이한 견해 차이로 인하여 <보수주의 안의 개혁파>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적인 실정이다.

ㄹ) 그러면 <보수주위 안에 개혁파>란 도대체 무엇인가? 혁명후 30년의 세월이 흘러 갔으니 너무 과도하게 이슬람 원리주의를 현대 젊은 세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으로 너무 일방적으로 강요만 하지 말고 다소 완화할 필요가 있다. 이 필요성을 <보수주의 안의 개혁> 이라고 한다.

ㅁ) 여름에 40도가 넘는데 반바지 반팔 옷은 안된다. 여자는 반드시 하잡을 해야 한다. 남녀가 손을 잡고 길을 가면 안되다. 여자가 축구장에 가면 안된다. 이와같이 강요에 의하여 사회생활을 부당한 제한을 부과하는 것은 분명히 젊은 세대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ㅂ) 이란인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미국이 중동과 특히 이란에 저지른 악행에 대하여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정서를 일반적으로 모두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슬람 원리주의를 유지하는 범위내에서 현실적 사회생활에 융통성을 적용할 수 있는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변화를 허용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점진적 생활개혁>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ㅁ) 이란에서 선거 때 마다 대학생들과 젊은 세대들이 길거리에 나와서 데모를 하고 있는것은 바로 이 <점진적 생활개혁>을 요구하는 외침들이다. 이란 정부는 한국 정부처럼 학생들의 데모를 무조건 좌경으로 몰아부치지 않는다.

데모에 참가하고 있는학생들 그 누구와 대화를 해도 그들은 모두다 하나같이 반제 반미주의로 튼튼히 무장돤 젊은 세대들이며 특히 이란의 청년학생들은 이란이 핵보유국으로 전진하는 것을 당연한 국가적 과제로 자랑하고 있다. 이란의 청년학생들의 데모에 대하여 미국 CIA의 뒷공작으로 보는것은 말도안되는 억측 이라고 이란의 학생들은 주장한다.


이글을 끝 맺으며,



나는 간략하게나마 이란의 지난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현재 집권하고 있는 이란 행정부에 대해 한층 더 관심을 갖고 있다. 지금 이란의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이 2009년 6월 12일에 재선에 승리하여 이슬람 혁명 이후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대통령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란의 독특한 정치구조로 대통령의 권한은 제한되여 있고 <성직자 전문위원회>가 최고의 권력 기관으로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핵문제를 통해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국내 내부적인 복잡한 문제들을 유능하게 해결하고 있는 영도력을 관찰해 왔다. 핵 문제로 미국과 대치하고 있는 위기정국에서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국민화합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란에서 논의되고 있는 복잡한 문제는 구제적 관심사로 떠오르는 <보수주의>와 <개혁주의>의 대립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란에서 발생하고 있는 복잡한 문제들은 외세를 반대하는 <보수주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보수파=개혁파>의 권력분쟁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같은 노선에 있는 정치세력 내부의 분파문제라는 점이다.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이 분쟁에서 단연 <보수파>로 등장한 강경한 대통령 후보자였다. 호메이니 이슬람 혁명근본주의 추종세력 <보수주의> 도 30년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내부, 즉 보수주의 진영에 보수파와 개혁파가 나뉘어져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이 분파들이 호메이니 혁명정신을 배반하고 외세의존적 친미세력인 <개혁주의>자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 어휘문제로 혼돈이 없기를 바란다.

보수파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후에 강경정책으로 인하여 개혁파로 여겨지는 대학 총장들과 교수들이 경질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란이 한 때 개혁파의 바람이 심하게 불어 닥쳐서 이로 인하여 언론매체와 출판활동이 다소 허용되였다. 하지만 이런 자유분방한 행동들이 결코 이란의 근본적인 보수파 정권을 흔들 수는 없는 것이다.

이란의 대통령선거 때 마다 크게 등장되는 큰 이슈는 반외세 자주진영 내부의 <보수파와 개혁파>의 경쟁이다. 즉 노선은 같은데 같은 노선을 지향하는 내부의 경쟁이다. 같은 진영에서 누가 대통령 후보자가 되느냐의 문제이다. 이란 국민들이 이러한 과정에서 출마한 두 후보자 중에서 그 누구에게 투표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쟁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직자 정치제도 내부에서도 <보수파와 개혁파>로 갈라진다. 하지만 아흐마디네자드는 보수파의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여 두번째 재임 대통령으로 현재 집권하고 있다.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석유를 목말라하는 중국괴 손잡고 또 핵 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와도 손을 잡고 있다. 그럼으로 보통 거론되고 있는 미국의 이란공격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 본다. 미국이 공연히 이란을 건드리면 이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입지만 더 튼튼해 질 것으로 분석된다.

아흐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이란의 핵 개발을 미래의 석유 부족에 대한 대비책이라는 당당한 이유로 미국의 의혹을 막고 있다. 하지만 이란의 보통 시민들의 공통된 인식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안보위협 으로부터 이란을 지키려면 이란의 핵 개발은 당연하다> 라고 숨김없이 말한다.

또한 이란의 두뇌집단(싱크탱크)은 < 이란의 핵 개발은 평화적 목적으로 핵에너지 개발을 위함이다. 아무리 석유가 많이 있어도 21세기 끝에 가서 석유가 바닥나면 어찌할 것인가? 이란이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데 왜 미국이 야단인가>라고 대꾸한다.

이제 이란은 석유자원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미사일을 포함하여 위성발사에도 성공한 나라로서 참단과학을 이용한 군사력을 개발하여 놓았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그리고 미국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중동의 강국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저력은 이란 국민들이 지난 시기 강대국들에게 시달려 오면서 터득한 교훈들이 큰 힘으로 반영되었다고 진단한다.(끝)

[동영상]

***외세에 시달리다가 중동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자주국가 "이란"







[출처 : 유태영 박사 특별기고 2010-09-07]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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