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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5> - 결의형제가 된 이승만과 박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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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도르테아
댓글 3건 조회 4,413회 작성일 10-09-10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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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1928년 북경에서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1912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결의형제가 된 이승만과 박용만


이승만은 죄수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의 유교사상은 바위처럼 틈이 없었다. 하지만 처지들이 워낙 절망적이었다. 40여 명의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 중에는 간수부장도 있었다.

처음 이승만은 선교사들을 침략의 앞잡이로 의심했다. 그러나 배재학당이나 제중원에서 만나본 그들의 행동거지는 달랐다. 미개한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내리먹이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다. 자신이 먼저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스스로 실천하는 의지와 희생을 보여주었다.

1903년 3월 감옥 속에 콜레라가 만연돼 이틀 동안 40 명 이상의 시체가 실려 나갔다. 이승만은 의사 에비슨에게 약을 얻어 환자들에게 먹게 했다.

"잘 생각해 보시오.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몸이오. 조금만 있으면 다른 세상에 갈 터인데 서양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하오. 허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라도 용서하신다고 하오."

이승만이 이렇게 신념에 찬  전도를 하자 그렇지 않아도 그를 우러러보던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감옥에서 이승만은 항아리 속에 촛불을 감춰 두고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다. 영어 성경은 물론 선교사가 정기적으로 넣어주는 영문 잡지들을 외어가며 읽었다. 아펜젤러 박사가 건넨 영일사전을 참조하면서 조잡한 대로 영한사전을 만들었다.

한편 '독립정신'이라는 책도 썼다. 그 원고는 이승만이 도미한 석 달 후인 1905년 2월 박용만이 트렁크 밑바닥에 숨겨 미국으로 가져왔다. 그때 이승만의 네 살짜리 아들 태산도 같이 데리고 왔다.


박용만은 만민공동회가 열릴 때 몇 번 안면을 익힌 사이였다. 뜻밖에도 이승만이 출옥을 앞두고 있을 때 한성감옥으로 끌려 왔다. 보안회(輔安會) 사건 때문이었다. 보안회는 일본이 1904년 전국토의 3할이 되는 황무지의 개척권을 달라고 강요하자 그 저항운동으로 같은 해 7월 서울에서 조직됐다.

박용만은 철원 출신이었다.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가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경응의숙에서 2년간 정치학을 전공한 다음 귀국한 게 23세 때였다. 이승만보다 6살 어렸으나 지식수준도 높고 이념의 방향도 같아서 둘은 곧 친밀해졌다. 결의형제 사이로 발전했고 박용만은 연상의 이승만을 깎듯이 공경했다. 이후 미국에서도 이승만이 사람들의 눈 밖에 나거나 구설수에 오를 때도 감싸는 데 주저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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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찍은 사진. 왼쪽에 첫부인 오른쪽에 아들 태산

 

 박용만은 숙부 박희병과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몇 개월 안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숙부는 당시 운산 금광의 미국인들을 위한 통역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인근의 선천에 와 있는 맥퀸 선교사와도 친분이 있었다.

출옥 후 박용만은 선천으로 가 숙부가 세운 사립학교에서 국어, 산술, 중국고전을 가르쳤다. 당시로는 뒤늦게 그 즈음 결혼해서 딸 동옥(東玉)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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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앨범에
있던 박용만사진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자 조정에서 친로파가 물러서고 정권이 바뀌면서 그해 8월 이승만은 불시에 석방됐다. 하지만 일본의 한국지배가 노골화돼 외려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이승만은 비밀리에 미국유학을 떠난다. 여비는 감옥의 간수장이 마련해줬는데 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었다.

 

나이 20에 배재학당을 들어가서 나이 30에 한성감옥을 나오기까지 이승만의 삶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그는 우매한 임금과 싸우고 이권을 향해 달겨드는 외국과 싸워야 했다. 개선될 희망이 없는 제도와 백성의 무지와도 싸워야 했다. 때로는 신문의 논설로 때로는 군중 앞의 연설로 혹은 반대 세력을 만나면 폭력도 주저하지 않는 게 그의 무기였다.

 

한국을 떠나기 전의 10년은 그가 정치가로서 필요한 체험을 쌓는 데 충분한 기간이었다. 대중의 생리와 테러의 용도와 전도의 비결 등 요긴한 노하우를 체득한 셈이었다. 하와이행 노동자처럼 배 밑창에 몸을 싣고 이승만이 인천항을 떠난 건 1904년 11월 4일이었다.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캐나다로 이민했으며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한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 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 그 속에 '우성 박용만 약전'이 포함돼 있음.
신한국보, 국민보, 신한민보, 공립신보, 단산시보 등 1백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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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흥미롭네요.... 사실 이승만의 미국시절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좋은 공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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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이승만이 구한말에 감옥살이를 제법 하였군요.  박용만과의 인연도 거기서 시작되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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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복복님의 댓글

복복복 작성일

잘 읽고 가져갑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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