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2)// 태평양의 한산도대첩, 미드웨이 해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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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목표에 대한 집중과 선택
야마모토는 나구모 기동부대에게 미드웨이 기지 무력화와 미 함대 격멸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하달했지만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나구모 기동부대는 내
내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방황하다 계속 공격을 허용하며 참패하고 말았다.
그에 비해 니미츠는 수차에 걸쳐 스푸르언스와 플레처에게 오직 목표는 일본 항모라는
점을 주지시켰고 이 집중된 목표 외에 다른 것들은 사실상 바둑의 사석(死石:버리는 돌)
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후 기지사령관 시머드 대령이 다른 곳으로
인사발령을 받고 이임인사차 하와이 진주만에 들렀을 때, 니미츠는 시머드의 은빛 대령
계급장을 가르키며 "실은 내가 자네에게 장례식용 꽃을 보낸 셈이었네"하며 미소를 지었
다는 대목은 미드웨이 기지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실 니미츠의 의중에
는 오직 일본 항모들만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에게 미드웨이 기지는 사실상 버리는 돌
이었다. 이번 기회에 일본의 항모주력만 잡을 수 있다면, 미드웨이 기지자체를 점령당해
도 니미츠에겐 크게 문제 될 게 없었다. 그가 미드웨이 기지에 바란 것은 정찰을 통해서
일본항모들을 먼저 발견하고 되던 안 되던 계속적인 공습을 통해 열세의 아군 항모전력
을 조금이라도 보강해주고 그도 안 되면 일본항모들의 시선이라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열세의 급박한 상황에서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에 집중했던 결과, 예상 이상의 큰 전과를 성취해낸 것이다. 니미츠 사령관은
일본해군이 AL작전으로 더치하버를 공습하고 미국의 본토인 알래스카 주에 해당하는
애투와 키스카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것도 그러한
사실들이 태평양 전선의 향배를 가르거나 향후 제해권을 가늠하는 데 아무런 관건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은 대단히 정확한 것이었다.
집중과 분산의 질적 차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해군은 절대적으로 열세의 함대를 동원했지만, 해전의 핵심이 된
항공기의 숫자를 놓고 보면 미해군은 꼭 열세만은 아니었다. 미군은 미드웨이 기지항공
대라는 항모 1척의 함재기수를 훨씬 능가하는 비행대를 가지고 있었고 항모 수에서도 고
작 한척밖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미 항모는 일본항모에 비해 훨씬 더 많은 함재기를
탑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구모 기동부대는 사실상 압도적인 우세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실제로 미드웨이 공중 대결에서 양측이 동원한 항공기의 수는 특별히 우세한
쪽이 없다고 해야 할 만큼 백중세였다. 비록 질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어서 아무런 전과
도 없었지만 미드웨이 기지에서 출격했던 혼성부대의 계속된 공격으로 나구모 기동부대
는 제대로 반격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고 미드웨이에서 연일 출격했던 40여대의 카탈
리나 정찰 비행정들은 일본해군보다 훨씬 더 먼저 상대를 발견했고 이 때문에 미드웨이
기지는 사실상 적의 움직임을 먼저 알고서 보다 더 조직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합함대는 과거 한산도의 와키자카 함대가 저질렀던 것과 같은 실수를 했다.
임진년 당시 와키자카 결전 함대는 조선수군보다 우세했던 세력만을 믿고 후위에 있던
구키와 가토의 함대와 연합하지 않고 섣불리 전투를 벌였다가 참패를 당했는데, 이번
에도 동원한 함대의 엄청난 우세에도 불구하고 개별 함대가 멀리 분산되어 있었던 관
계로 실전에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믿었던 핵심전력이 궤멸되자 순식간에
기선을 제압당하고 작전을 중지한 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한산도의 조선
수군과 미드웨이의 미해군은 가능한 전력이 총동원된 전력집중형 함대였다.
만약 작전 개시 전 참모진 일부의 우려를 받아들여 각 함대간의 거리가 유사시 서로 유
기적으로 공조할 수 있는 거리에서 작전을 펼쳤다면 설사 나구모 기동부대가 치명상을
입었다 하더라도 즉각적인 전력보강을 통해서 반격에 나설 능력과 기회가 당시 연합함대
에겐 충분히 있었다. 이 대목에서 미 태평양 함대가 연합함대의 의도를 전혀 모르는 상
태에서 미드웨이 기습을 허용하고 허둥지둥 출동할 미 함대와의 결전을 8일로 설정했던
당초 연합함대의, 애초부터 너무 안이했고 산만했던 작전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해전에서 전력의 분산은 필패를 가져온다는 너무도 기초적인 원칙을 무시했었을 만큼
당시의 일본해군이 연이은 승리로 자만과 도취에 빠졌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야마모토의 주력 전함대와 가쿠다의 제2기동부대 그리고 곤도의 미드웨이 침공함대
모두 350년 전 히데요시와 구키와 가토가 느꼈을 낭패감을 또 다시 맛본 셈이다.
거시적 관점에서 야마모토는 태평양의 제해권을 놓고 니미츠와의 머리싸움에서 철저
하게 니미츠에게 패배했다. 미드웨이는 그 둘의 머리싸움의 현장이었고 많은 우연과 실
수가 점철되기는 했으나, 기본적인 전략과 전술에서 니미츠는 상대를 늘 한발 앞서 나
갔다.
둘은 지휘방식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니미츠는 안전한 지상기지에서 해도와
차트, 무전기를 앞에 놓고 다수의 완비된 참모들과 풍부한 시설을 100% 활용하면서 전
체적인 상황을 한눈에 조망하고 함대를 움직였던데 비해 야마모토는 거대한 전함에 올
라 비좁은 함교에서 제한된 숫자의 참모만을 거느리고 자신을 보호하는 무수한 호위함
들을 대동하고 직접 바다에서 함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과거 넬슨이나 도
고 제독 시절처럼 총사령관이 기함에서 직접 함대를 통솔해야만 하는 전통적인 방식
이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기함 야마토와 거기에 탑승한 야마모토를 호위하던 전함과
순양함들은 차라리 나구모 기동부대에게 더 필요한 것이었다. 이미 시대는 더 이상 총
사령관이 바다에 나가서 직접 싸우는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야마모토는 이러한 방식을
고집했고 이 역시 신속한 지휘판단과 대세를 조망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태평양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평가되는 니미츠 원수는 정작
단 한 번도 실제 해전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본인 역시 이를 매우 아쉬워했으나, 그는
발달된 지휘통제기술과 통신기술에 힘입어 좀 더 입체적이고 신속한 지휘통제를 시도
했고 결과는 역사가 말해준다. 니미츠 이전의 미사령관들에게는 전통적으로 전함이 기함
으로 배정되었으나, 태평양 전쟁 내내 니미츠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기함을 설정하지
않고 지상의 기지에서 전체 함대를 통제했다. 연함함대는 2년이 지난 뒤에서야 사령관
이 기함에 탑승하지 않고 지상에서 지휘를 하게 되었으나, 이미 승세는 기운지 오래였다.
미드웨이 해전의 전략적 의의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가 가져다 준 전략적 의의는 사뭇 의미심장했다. 당연하게도 먼
저 중부태평양에서의 일본군 진격이 저지되면서 전진기지 하와이의 안전이 보장되었다.
만약 미드웨이를 점령당하고 항모주력들을 잃어버렸다면 미 해군은 어쩔 수없이 하와이를
포기하고 본토 서해안 샌 디에고 기지로 철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미군이 태평양
에서 이정도로 위축되었다면 전쟁은 45년 8월이 아닌, 46년 혹은 47년까지도 계속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일본이 항모주력을 상실하면서 전반적인 기세가 꺾였고 이로 인해 남태평양 전선에서의
일본군공세 역시 하향세로 접어들면서 가장 염려되던 호주와 뉴질랜드의 안전이 확보되
고 미국과의 교통선도 원활히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MI작전이 성공했다면 42년 8월의
일본 연합함대의 다음 목표는 바로 호주와 하와이를 잇는 뉴칼레도니아섬과 피지, 사모
아섬이었다.
또한 다른 전선들과 달리 2차대전 전역중 가장 최단시간 내에 추축국 공세의 예봉을 꺾
고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는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 2차대전 중 가장 치열한 지상전이었
던 러시아 동부전선에서 소련이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의 기회를 잡은 것은 처
음 전쟁이 발발한 후 무려 2년이나 지난 42년 겨울 스탈린그라드에서였고 그리고도 전쟁
은 무려 3년여를 더 끌었다. 2차 대전 초 서유럽에서 프랑스가 불과 6개월만에 전열에서
이탈하면서 영국은 노르망디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무려 4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한번 초반에 기선을 제압당하면 기세를 회복해 재반격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반면 미드웨이에서 일본의 기세를 꺾은 태평양의 미해군과 해병대는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8월,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남태평양 과달카날섬에 상륙하면서 바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다.
만약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가 아니었다면 미 해군이 이토록 빠르게 남태평양에서 반격
을 가할 수 없었을 것이며 설사 공세를 취했다 하더라도 최강을 자랑하고 있던 일본 항
모들과 매우 힘든 싸움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에필로그
뒷얘기 영 : MI작전에서 치명적인 정부누출로 승부를 그르친 연합함대는 이후에도 미
해군이 자신들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의심만 했을
뿐, 눈치 채지 못했으며, 연합함대의 수장 야마모토의 전선순시 계획마저 가로챈 미 해군
정보부는 43년 4월 18일 최전선을 방문하는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미 육군항공대 P-38 전
투기의 기습으로 격추, 진주만의 복수를 했다. 총사령관조차 지키지 못한 연합함대의 허
술한 정보보안 시스템은 전황을 더욱 궁지로 몰았다.
하나:호넷 뇌격대 VT-8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조지 개이 소위는 물위에서 그날 한순간
3척의 일본항모가 불덩어리로 변해버리는 역사적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 다음날 운 좋게도 순찰중인 PBY 카탈리나 비행정에 구조된 그는 과날카날 전투에도
참전했고 몇 개의 훈장을 받았다. 전후에는 조종사로 일했고 영화 미드웨이를 제작할 시
에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1994년 조지 개이는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며 자신의 유골
을 호넷 뇌격대가 전멸했던 해상에 뿌려달라고 유언했고 그렇게 먼저 간 전우들 곁으로
돌아갔다.
둘 :그날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전투현장을 목격했던 후지다 미쓰오 중좌는 아카기가
피격될 때에도 살아남았으나, 퇴함하면서 손에 화상을 입고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후송되어 병원에 갇혀 있다시피 했다. 그의 진주만 출격 동료 파일럿들이 대부분이 2차대
전 중 전사했음에도 종전 시까지 살아남았고 대좌로 예편, 서구에도 잘 알려진 미드웨이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후 상당수 구 일본해군 출신들이 해상자위대에 투신해
계속 출세와 영달의 길을 달렸지만 후지다는 주변의 권유에도 자위대 참여를 거부하고
개신교에 귀의해 남은 생을 전도사로 보냈고 전쟁의 무망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일
에 헌신하다 76년 타계했다.
셋 : 미드웨이 해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항모 호넷의 함장 마크 미처
대령은 한동안 일선에서 밀려나기도 했었지만 미드웨이 해전을 통해서 많은 것을 체험했
던 것으로 보인다. 44년 2월 고속 항모함대 TF 58의 사령관에 임명된 후, 조직적이고 체
계적인 항모운용으로 트럭과 필리핀해 오키나와에서 연전연승했고 역대 미 항모 지휘관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2차 대전 미 해군의 항모전술은 미처 제독에 의해 완성되었다.
넷: 야마구치 다몬 소장의 부인은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남편의
죽음을 모른 채 계속 편지를 보내다 답장이 없자, 해군군령부를 방문해서야 남편의
전투모를 받아들고 전사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은 제독의 죽음마저도 친족에까
지 비밀에 부쳤을 만큼 미드웨이의 패전사실을 은폐했다.
다섯: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한동안 미드웨이해전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다가 두 아들
이 전사한 뒤, 중부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으로 부임을 앞두고 비서를 통해 당시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털어놓고 자신의 실책으로 전사한 부하들에게 사죄를 표했다. 이 기록
은 후일 미드웨이 해전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이판으로 떠난 나구모는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지자, 미드웨이 패전 2년 후 57세의 나이로 바다가 아닌 사이판
북벽 동굴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여섯: 미드웨이에서 TF 17을 이끌며 분전했던 프랭크 플레처 제독은 불운하게도 산
호해 해전에 이어 또 항모를 잃었고 이후 TF 61을 이끌며 과달카날 상륙을 엄호했으
나 이때에도 항모를 잃을까 두려워 서둘러 항모를 철수시키는 바람에 사보해에서 기
습해온 일본해군에게 큰 피해를 입는다. 출격할 때마다 늘상 함대의 손상과 상실이
라는 불운이 따랐던 플레처는 해군의 총수 킹에 의해 한동안 워싱턴으로 소환되었고
이후 북태평양 함대 사령관이라는 한직에 머물며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종전
을 맞았다. 47년 퇴역하면서야 대장으로 진급하여 73년 88세로 사망.
일곱 :이후 미드웨이 기지는 종전 시까지 미 태평양 함대의 잠수함 전진기지로 활용
되었고 미 해군잠수함들은 전체 일본선박의 55%를 격침시켰을 만큼 큰 공헌을 했다.
미드웨이를 전진기지로 하면서부터 미 잠수함들은 훨씬 더 원활한 출동과 정비를 보
장 받았고 태평양전쟁 내내 미 해군의 주요기지로 사용되었다. 2차대전 후에도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냉전시기 내내 미드웨이는 미 해군 태평양 방위의 중추역
할을 했다.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는 20세기 후반 미국의 태평양 패권을 든든히 하는
기초가 된 셈이다.
여덟 :1998년 다큐전문 디스커버리 채널의 탐사팀은 미일 양측의 참전 생존자들과 함
께 다시 미드웨이 해역을 찾아 가라앉은 5척의 미국과 일본의 항모를 찾아 나섰으나, 요
크타운을 발견하는 데만 성공했고 그 다음해인 99년에 가가의 일부 잔해를 확인하는데 그
쳤다. 실로 수십 년 만에 다시 그곳을 찾은 노병들은 먼저 간 전우들을 추모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꽃다발을 미드웨이 바다에 던졌다. 승자와 패자를 막론하고 그들 모두가 이후
생에서 단 하루도 이때의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홉: 잘 알려진 SF걸작 '스타워즈' 4편(원래는 77년에 개봉된 최초작품)에서는
거대한 제국의 데드스타를 향해서 연이어 돌진하다 전멸당하고 마는 저항군의 무겁고
둔한 A-wing 편대의 다소 무모한 공격장면이 나오고 이어서 주인공 루크 스카이
워커의 X-wing전투기의 극적인 명중으로 데드스타를 단번에 날려버리며 끝난다.
후일 루카스 감독은 이 장면에 대해 미드웨이해전 당시 무모할 정도로 용감히 달려
들었던 미해군 뇌격대와 결정타를 날린 급강하 폭격대에서 아이디어를 빌렸음을 밝
혔다.
열:미드웨이 해전으로 조선독립은 기정사실이 되었다는 점이 우리에겐 가장 의미
있는 대목일 것이다. 이 해전으로 일본은 미국과 협상은커녕 계속 원치 않는 소모전
으로 말려들어갔고 그 결과는 패전과 국망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은 조선에겐
독립을 의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지도층 인사들은 짧디
짧은 일본의 승리에 앞뒤 없이 도취되어 지금이라도 당장 조선민족은 모두 황국신민
이 되어 이 영광의 한 자락이라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해방이 되기
며칠 전까지도 부역과 민족반역행위를 일삼았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천길 낭떠러지를 향해 내달린 들쥐 떼의 형국이었다.
역사를 바꾼 미드웨이 섬의 바다는 여전히 파도가 출렁이고 있으며,
여전히 미해군의 기지이기는 하지만, 냉전종식 이후 기지의 규모는 축소되었다.
요즘의 미드웨이는 사람보다 갈매기와 신천옹(약 150만 마리)들이 더 많은 평화로운
섬이다. 오래도록 이 평화가 지속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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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나그네님의 오래오래 보존하고싶은 장문의 글 다시 한번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