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2)// 태평양의 한산도대첩, 미드웨이 해전(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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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은 것과 잃은 것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 연합함대는 가장 중요한 항모 전력이었던 아카기와 가가, 소류
와 히류 4척과 중순양함 미쿠마를 잃었다. 그 외 중순양함 모가미가 대파되었고 7,8척의
구축함과 순양함들이 일부 파손되었다. 흔히 미드웨이 해전으로 나구모 기동부대의 정예
파일럿들이 모두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드웨이에서 일본 파일럿들의 피해는 미
군 파일럿들보다 훨씬 적었다. 아카기 6명, 가가 16명, 소류 10명, 히류 66명으로 모두
98명에 불과하다. 이 숫자로도 결정적인 "운명의 5분"당시 일본파일럿들이 갑판에서 출격을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재확인된다. 최후까지 공격을 지속했던 히류의 파일럿들이
피해가 컸을 뿐, 대부분의 파일럿들은 불타는 항모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항모의 침몰로
함재기는 4척에 탑재한 227대를 모두 잃었다.
그러나 즉각 화재가 번졌던 가가와 소류의 승무원 손실은 매우 컸고 정예의 항모 요원들
이었던 이들을 잃었던 것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다. 가가에서 811명, 소류에서 711명,
아카기 267명, 히류 392명, 총 2,181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그 외 순양함 미쿠마와 기타
사망자를 모두 합친 일본해군 공식기록에 따르면 총 3,057명의 전사자(아카기와 소류에
탑승했던 민간인 2명 포함)를 냈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손실은 또 있었다.
MI작전으로 일본 연합함대는 평상시라면 함대가 1년 반에 걸쳐서 쓸 수 있는 막대한
양의 연료를 한꺼번에 써버렸다. 이 작전에 동원된 함대들은 사실상 일본 해군 전체나
다름없었고, 이들 함대가 태평양의 거의 절반을 횡단, 왕복하면서 복잡한 정찰과 전투와
기동을 빠르게 전개하면서 실로 엄청난 양의 기름을 소모했는데도 얻은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가뜩이나 소모전을 경계해야 할 일본해군은 점점 연료의 부족을 느끼게 되었
고 이후 작전행동에서 적지 않은 제약으로 작용했다.
미 해군은 전술한대로 항모 요크타운과 구축함 햄먼을 잃었고 함재기와 미드웨이
기지의 항공기를 모두 합쳐 132대를 잃었고 전사자는 약 307명에 그쳤으나, 일본해군
보다 더 많은 파일럿과 비행승무원을 잃었다.
반면 주지하다시피 얻은 것은 아주 많았다. 그중 잘 알려지지 않은 하나를 언급하면,
레이먼드 스푸르언스 소장이다. 일본해군이 미래의 연합함대 사령관 감이라던 야마구
치를 미드웨이 해전으로 잃었던 데 비해, 미드웨이 승전으로 미해군은 스푸르언스라는
유능한 지휘관을 발굴해냈다. 그는 처음 맡은 항모 지휘관의 중책을 기대 이상으로
잘 해냈고 끝까지 냉정함을 유지하며 대승을 이끌어냈다. 스푸르언스를 눈여겨 본 니미
츠는 이후 그를 자신의 참모장으로 발탁했고 이 역할 역시 매우 조직적으로 해냈다.
43년 중반 이후 최신예 항모들과 고속전함으로 이뤄진 주력함대의 총사령관으로 사실
상 태평양 미 해군의 반격을 주도하게 된다. 44년 6월 두 번째 미일 간 항모결전이었
던 필리핀해 해전에서 스푸르언스는 예의 탁월한 통찰력과 흔들리지 않은 리더십으로
다시 한번 미드웨이에 버금 가는 대승을 거둔다. 태평양 전쟁 기간 내내 스푸르언스 제
독은 니미츠 원수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지휘관이었고 니미츠의 뒤를 이어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니미츠 VS 야마모토
미드웨이 해전의 승패의 원인을 놓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란은 뜨겁다.
특히 나구모 제1항공함대 사령관의 폭장 재교체 지시로 공격대의 출격이 늦어진 게 미드
웨이 해전의 주된 패전이라고 지적이 기존의 많은 역사서들의 견해이고 이를 읽은 2차대
전 매니어들과 독자들 사이에선 우세하지만 교전 양측의 기록을 대조하여 꼼꼼하게 미드
웨이 해전의 사실들을 재구성해보면 과연 패전의 주된 이유가 나구모의 우유부단함에서
비롯된 치명적인 판단착오였는지 회의가 짙게 든다.
먼저 나구모 중장이 폭장교체냐 선제출격이냐를 고민하던 상황에서 야마구치 제2항공전
대 사령관의 의견을 묵살했다는 것 때문에 나구모가 우유부단했고 항공대 지휘관으로써
는 과단성이 부족했다는 세간의 평가는 그 날 나구모가 설사 야마구치의 제안을 받아들
였다 해도 쉽사리 공격대를 출격시킬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상황적 진실에 대해서 납득
할 만한 반대논리가 필요하다. 일본 함대는 폭장교체의 시기가 늦어져 패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잘못된 정보에 근거해 전력을 엉뚱한 곳에 먼저 투사하면서부터 상황이 꼬여
버려 계속적으로 반격을 허용했고 이로 인해 공격할 기회를 끝내 찾지 못하고 결정타를
얻어맞은 게 패전의 원인이었다.
패전의 책임을 통감한 나구모 제독 스스로의 사의에도 불구하고, 전투기록과 보고를 살
펴본 연합함대가 새로운 편성된 항모부대(제3항공전대)의 지휘관으로 재선임했던 것은 미
드웨이 해전에서 나구모 제독 개인의 결정적인 실수나 오판으로만 패전한 것이 아님을
반증한다(물론 나구모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주력 기동부대의 알토란 같은 항모를 모두 상실하는 대참패를 하고도 해당 함대
사령관이 인책 해임되지 않았던 배경에 대해서 일본군 특유의 잘못된 인사관행(참패를
하면 설욕의 기회를 주는)을 언급하면서 같은 일로 치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해군내에서 나구모 기동부대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도저히 인사관행
수준으로 대충 덮어두고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물론 책임자였던 나구모 제독에게
패전의 책임이 없다고 말해선 결코 안된다. 그러나 이 해전은 명백히 현장에서 자웅을
겨뤘던 미,일의 항모지휘관들인 나구모와 야마구치 VS 스푸르언스와 플레처의 대결로만
음미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더 큰 차원의 거시적 배경이 존재한다. 나구모 책임론은
순전히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모함대 전투만을 놓고 봤었을 때에만 성립가능하다. 요컨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진주만 기습이후 6개월간 일본해군의 가장 화려했던 전성기를 주도
했댄 1항공함대의 지휘관이었고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되도록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고
노력했던 사실은 분명하기에 미드웨이 패전을 전적인 그의 우유부단함과 결단의 부족으로
봐서만은 곤란하다.
미드웨이 해전은 전체 태평양의 제해권과 향후 전개될 전쟁의 주도권을 놓고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니미츠와 일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가 벌인 정면 대결이었다고 봐야
미드웨이 승패의 맥락이 보다 더 명확해진다. 미드웨이 해전은 철저하게 둘의 두뇌싸움이
자, 둘이 두는 일본식 쇼기(장기) 혹은 서양식 체스의 수 싸움이었다.
MI 작전의 규모와 계획을 놓고 봤었을 때, 나구모 기동부대는 가장 중요하기는 했으나
전체의 일부분이었다. 분명 야마모토는 이 작전을 통해 미 해군의 주력을 완전히 일소하고
1905년 대마도 해전이후 짜르의 러시아와 같은 상황으로 몰고 가려 했다. 대마도 해전에
초급 장교로 참전해 왼손가락 2개를 잃었던 야마모토는 대마도 해전의 전술 전략적 의미
를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던 당사자였다. 당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끈 도고 헤이하치
로 원수는 대승 후 내각에 더 이상의 전쟁은 너무도 위험하니, 화친의 길을 찾아달라고
강력하게 주청하여 이를 관철했었다. 하버드에 유학까지 다녀온 야마모토가 미국과 1년
이상의 장기전을 계속할 의사가 과연 있기나 했었을까?
더 이상 일본이 장기전을 한다는 것은 곧 패전과 국망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또 한 번
진주만처럼 모든 것을 걸고 한판의 도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실제로도 야마모
토는 대단한 포커광이었고 늘 도박의 수입으로 부족한 해군의 월급을 벌충하곤 했었다)
문제는 상대인 니미츠가 너무도 빨리 야마모토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카드를 다 동원해 이 한판의 도박에 올인 했었다는 것이다. 니미츠는 MI작전이 실
시되기 3달 전부터 야마모토의 의중을 알고 있었고 사실상 MI작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야마모토가 쥐고 있는 카드의 면면을 모두 알 수 있었다. 물론 상대의 카드를 다 안다
고 해서 내가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이길 확률은 높아지고 설사 불리해
지더라도 크게 패하지는 않을 수 있다. 이미 기술했듯이 니미츠 제독이 미드웨이 작전
에 투입한 전력과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것은 상대의 의도에 철저하게 맞춘 그야말로
맞춤형 대안이었고 막상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전혀 없었
을만큼 니미츠의 준비는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미 전술했지만 국운을 걸었던 진주만 기습작전(이 때문에 전사가들은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해군이 수행했던 작전 중에서 가장 준비가 철저했던 작전으로 평가된다)을
앞두고 그토록 철저하게 준비하고 또 준비했던 것과는 달리 진주만보다 어찌 보면 더
신중했어야 할 대규모 함대결전 MI의 준비태세는 너무도 방만하고 허술했다.
작전의 개요는 물론 상세부분(미 해군은 일본의 신임 미드웨이 기지 사령관 내정자의
인적사항까지 알고 있었다)까지 모두 통신전파로 송수신 해버렸던 부주의한 군대의 모습
과 최후까지 공격목표를 통신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신중과 준비철저를 보여줬던
일본해군이 같은 존재 인지 의심케 한다. 진주만 기습을 앞두고 당초 4척의 항모만을
동원하려던 작전부의 초안에 대해 막 배치된 제5항공전대(쇼가쿠,즈이가쿠)까지 총동
원해 모두 6척으로 하라고 지시했었던 야마모토가 산호해해전에서 상처 하나 없이 돌
아온 즈이가쿠를, 본인 스스로 그토록 중요하다고 간주했던 MI작전에서 항공대 재편
성을 이유로 작전에서 배제했던 모습은 중상을 입고 돌아와 최소 두어 달은 수리가 필
요했었을 항모 요크타운을 72시간의 긴급수리를 강행해 거의 반억지로 다시 전선에 내
보냈던 니미츠와는 너무도 대조되는 안이함이었다.
둘의 기본적인 차이는 역시 선택과 집중이었다.
야마모트는 기본적으로 너무도 산만했고 니미츠는 시종일관 집중하고 있었다.
정보의 실패와 성공
오늘날 미드웨이 해전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과 군사학자들의 일치되는 지적 중 하나는
이 해전만큼 정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전투도 드물다는 것이다. 수세에 몰렸던 미
해군이 어찌 보면 도박에 가까운 수준으로 미드웨이에 전력을 집중 할 수 있었던 배경
에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던 정보분석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해군은 연이은 승리
에 도취되어 여러 징후에서 드러났던 미 해군의 사전 움직임에 대해서 거의 주의를 기울
이지 않았다. 나구모 기동부대는 미드웨이 해역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주변에 미 항모들
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작전을 개시했고 이것이 가장 큰 패착이었다. 그리고 일본
해군은 전쟁이 끝나는 그날 까지도 여러 차례 자체 내의 의문제기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
이 자신의 암호체계를 낱낱이 해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은 정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만큼이나 우연이 지배한 대목도 적
지 않음을 간과할 수 없다. 프렌치 프리깃 숄과 잠수함의 사전정찰만 있었어도 미 항모
들의 출동을 충분히 감지할 기회가 있었다는 점, 하필 일본 해군의 정찰기들이 고장을 일
으키거나 출발이 지연되는 경우마다 그들이 수색할 해역에 미 항모들이 있었던 점, 일제
공격으로 기세 좋게 출발했던 TF 16의 공격대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연료도 떨어져 거의
지리멸렬해가고 있었을 때 본대로 돌아가는 구축함 아라시를 발견한 것, 도모나가 대위
의 2차 공격 제안을 수용한지 불과 15분 안짝으로 미 함대를 발견하는 바람에 폭장 교체
문제로 딜레마에 빠졌던 점이라던가, 정작 미항모들을 발견한 소류의 정찰기는 통신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적시에 보고를 할 수 없었다는 점 등등이 우연이 지배한 요소가 너무
많아 사실상 정보가 승패를 결정지은 게 아니라 정보의 가능성과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준
전투로 평가하기도 한다. 군사학의 세계적인 석학인 존 키건도 자신의 저서 "정보와 전쟁"
에서 미드웨이의 정보전 양상에 대해서 위와 같은 태도를 견지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미드웨이 해전은 양측 모두 무수한 실수로 점철된 싸움이었고 그 승패를 결정한 것은 사
실상 우연(영화 미드웨이에서도 이런 뉘앙스의 대사가 맨 끝에 나오기도 한다)에 가까웠
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육군사에 정통한 키건은 해전이 주를 이룬 태평양 전쟁사의 전
과와 의의에 대해서 다소간 인색한 평가를 하는 경향(영국사람 키건의 입장에서 태평양
전쟁에서 보여준 영국군의 졸전과 무능과 참패를 희석하려면 불가피하다 싶기도 합니다)
이 있고 전쟁은 손자가 지적했듯이 예상하기 어려운 뜻밖의 경우가 무수히 발생한다.
그러나 정보는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지휘관에게 매우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는 점에서
미드웨이 해전에서 우연의 요소가 전체의 흐름을 결정했다는 해석은 다소 지나친 감이
있다.
우연의 뒷면에 도사린 진실
그렇다면 미드웨이 해전에서 우연이 승패를 좌우했다는 해석이 나올 만큼 양측의 전
술과 전략은 왜 계속 실수와 착오를 연발해야 했었던 것일까?
미드웨이 해전을 연구하는 학자(Shattered Sword라는 기념비적인 미드웨이 해전사를
쓴 파셜과 털리, 태평양전쟁사를 저술한 존 코스텔로와 로널드 스펙터, 매터슨등)들의
또 다른 공통된 견해인, 42년 6월 당시 미 해군도 일본 해군도 항모를 어떻게 운용해야
효과가 극대화 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42년 미드웨이 당시만 해도 항모
를 이용한 전술은 실용화 된지 6개월밖에 안된 최첨단 전법이었다. 오늘날 최신 컴퓨터
프로그램도 베타가 출시되어 안정화되려면 많은 에러수정과 최적화작업이 필요하다.
1942년은 미,일 양측에게 항모전술을 체계화하는 기간이었다. 요컨대 당시 양국은 모두
초보자에 불과했고 초보에게 실수와 착오는 일상사였다.
특히 진주만 기습을 통해 최초로 항모와 함재기의 무서운 잠재력을 현실화 해낸 일본
해군조차도 자신들이 가진 무기가 어떤 한계와 장단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거의 인식하
지 못하고 있었다. 야마모토가 산호해해전에 제5항공전대(쇼가쿠, 즈이가쿠)를 분산해
서 투입해 정작 중요한 MI결전에서는 사용하지 못했던 것이라던가, 상처하나 입지 않은
즈이가쿠마저도 숙고 없이 MI작전에서 제외한 조처, 나구모 기동부대를 앞세우고 전함
주력이 뒤를 따라간 작전 배치와 주요 함대마다 항모를 모두 분산해서 배치했던 점 등
모두가 항모전술이 체계화되어 있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비슷한 대목은 미 해군에서도
엿보인다. 전함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항모를 쓸 수밖에 없었던 미 해군도 맨 처음 항모
를 출동시키면서는 전력을 분산해서 한척 단위로 작전에 임했고 그 결과는 신통치 못했
다. 뿐만 아니라 항모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지휘관이 부족해 베테랑 핼시 중장을 제외
한 다른 항모 TF의 지휘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교체되기 일쑤였다. 이른바 항공대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제독들조차도 막상 항모를 지휘하면서 뭘 해야 할지를 잘 몰랐다.
미드웨이해전에서 TF 16과 TF 17의 작전과 전과를 검토해보면 산호해 해전으로 항모 간
대결을 경험한 요크타운의 함재기 운용이 처음 항모간 대결에 나서는 엔터프라이스와
호넷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항모 요크타운의 분전이야말로 미 해군이
미드웨이에서 보여준 가장 빛나는 대목이었다. 이런 차원에서도 산호해해전을 경험했던
즈이가쿠를 배제하고 제1,2 항공전대만으로 결전에 나선 일본해군은 항모전술을 맨 처음
현실화해낸 선도적 입장이었고 정예의 파일럿과 우수한 승조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미 해군과 다를 바 없는 항모전술의 초보였다. 특히 일본해군은 그들의 항모가
피탄 되었을 시, 피해복구분야에 있어서 미 해군에 비해서 현저하게 뒤졌다.
이들 양 초보(?)가 본격적인 항모간 대결을 펼치면서 필연적으로 오류와 착오를 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미드웨이 해전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천시와 지리와
정보와 기선제압에서 앞선 쪽에게 승리가 돌아갔다. 우연이 겹쳐 필연이 되었다고나 할까.
미드웨이 결전에서 일본 해군은 여러 측면에서 승리할 기회와 여건 그리고 능력을 충
분히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대보다 더 많은 실수와 오류
와 부주의를 범했고 이것이 결국 패착으로 귀결된 것이다. 설령 자신들의 항모가 다른 전
함에 비해 방어력이 너무도 취약하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하더라도 결전의 날, 오전 내
내 십여 회에 가까운 공습을 연이어 허용했던 것은 우연이 아닌 명백한 실책이었다. 통상
이렇게 기선을 제압당하고 상대에게 공격을 허용해서는 해전에서 이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이날 미 항공대의 공격솜씨는 그야말로 형편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적중시킨 몇 발의 명중탄으로 승부가 결정되었다는 것은 항모해전의 냉엄함과 치명적인
요소를 전부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나 주력항모 4척이 모두 격침되었다
는 사실은 이후의 해전에서도 보기 힘든 유례없는 전과였고 그만큼이나 패자에게는 한번
그르치면 돌이키기 어려우며, 후유증이 길고도 오래 남는 해전의 무서움과 냉엄함을 절감
시킨 사건이기도 했다. 일본 연합함대는 미드웨이 이후 다시는 전쟁 초 욱일승천하던
기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은 항모의 장점과 약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과거의 함포전과는 달리 거리와 공간의 제약이 없는 대신, 함포전보다 더 짧은 순간에
승부가 나고, 한 대의 항공기로도 거함이 단번에 끝장이 나기도 하는 의외성과 도박성
이 있어 결과를 예측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실로 복잡다단한.
이후 42년 말까지 미 일 양해군은 과달카날을 둘러싸고 7차례의 해전을 더 치르면서
항모 전력을 모조리 소진해버렸으나, 42년 내내 전투를 치르며 항모에 필요한 최적의 전
술과 각종 운영기법의 노하우를 터득하게 된다.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지 정확히 2년이
지난, 44년 6월 중순 다시 필리핀 해에서 미국과 일본의 해군은 사상 최대 규모의 항모
(미국 15척, 일본 9척)와 함재기(미국890여대, 일본 450여대)를 동원해 태평양의 제해권
을 놓고 또 한번 결전을 벌였다. 결과는 미 해군의 완승이었지만, 이때에도 미 해군은
고작 3척의 일본항모를 격침하는데 그쳤고 그나마도 2척은 함재기가 아닌 잠수함의 전과
였다 (당시 일본항모들은 미 함재기들의 막강한 펀치력을 의식해 멀찍이 물러나서 일본
함재기들의 우세한 항속거리를 이용한 아웃레인지 공격 전법을 사용해 미 항모들을 노렸
지만, 이미 노련한 파일럿 대부분이 전사해버린 상황에서 초보 일본 공격대는 압도적인
미 헬캣 전투기의 요격망을 돌파하지 못하고 거의 전멸해 '마리아나 해의 칠면조 사냥'이
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참패했다. 450여대의 일본 함재기중 전투가 끝난 후 남은 건 고
작 35대)
이 당시 양측의 항모 운용전술과 함재기들은 2년 전과는 사뭇 다른 세련되고 진일보한
것이었고 이 때문에 42년 연간에 보여준 어설픈 착오나 치명적인 오류는 거의 엿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미 해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함재기로는 일본항모를 고작
1척 격침하는데 그쳤다.
이후 전개된 항모해전의 역사를 들여다봐도 미드웨이에서 격침된 4척의 일본 항모가
얼마나 큰 전과인지를 그대로 반증한다. 그리고 그만큼 일본 연합함대가 받은 충격과
패전이 준 여파는 크고 깊게 오래 남았다. 이토록 큰 전과가 양쪽 모두 어수룩했던
항모전 초기 그토록 무수한 실책과 착오의 연속과정에서 나왔다는 것 때문에 우연의 일
치라는 평가가 나오기 까지 했으나, 미드웨이 해전을 통해서 미국과 일본 양측 모두
항모 전술과 함재기 운용에 있어서 많은 산 교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일본이 매우 뼈아픈 대가를 치르면서 이를 배웠다는 차이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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