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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2)// 태평양의 한산도대첩, 미드웨이 해전(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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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0건 조회 2,165회 작성일 10-09-09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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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중지

이쯤에서 수백 킬로 뒤에서 안타까이 상황전개를 지켜보고 있었을 연합함대 지휘부와

사령관 야마모토의 대응을 살펴보도록 하자. 오전 11시 아카기와 가가와 소류에 화재

가 발생했고 히류 단독으로 미 항모들에 대한 공격을 지속한다는 나구모 제독의 보고

를 듣고 연합함대 지휘부는 해도와 차트를 대조하며 각 함대의 위치를 확인하고 병력

의 집결을 논의했다. 그러나 어느 함대도 지금 당장 나구모 기동부대에게 도움을 줄

위치에 있지 못했다. 작전 개시전, 참모진 일부가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일단 북방 알류션으로 접근중인 가쿠다 제독의 제2 기동부대의 항모를 미드웨이 방향

으로 향하게 하고 곤도 제독의 침공함대 역시 나구모 기동부대와 합류토록 해서 전력

을 집중키로 한다. 그리고 야마모토 자신의 주력 전함대 역시 전속력으로 항진, 나구

모 부대와 합류할 생각이었다. 사이판에서 출발했던 상륙 부대와 수송선단은 잠시 항

로를 돌려 대기 하도록 했다. 다음 날 실시될 미드웨이 상륙은 일단 연기되었다.

그날 오후 내내 피격당한 세척의 항모들의 화재는 진압되지 않았고 이미 아카기와

가가, 소류에겐 희망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오후 5시 반 무렵, 나구모 기동부대

의 마지막 항모였던 히류마저 치명타를 입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자, 지휘부의 분위기는

더욱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연합함대 참모진은 여기서 작전을 포기하기 보다는

야전으로 최후 결전을 벌이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이 무렵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도쿄

해군군령부의 나가노 총장 역시 혹시 야마모토가 무리한 작전을 계속하지 않을까 노심초

사 하고 있었다. 오후 7시 야마모토 사령관은 나구모 중장에게 승리에 취했을 미 함대를

미드웨이 서쪽으로 유인하여 야간해전으로 결전을 시도하라고 지시했다. 이 작전을 위해

침공함대를 이끌고 있는 곤도 제독의 전함과 순양함들로 하여금 서둘러 나구모 기동부대

의 잔존 함대와 합류토록 했다. 일본해군이 장기로 삼는 야간해전으로 대낮의 참패를

설욕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어둠이 깔리자 이제 TF 16, 17을 모두 지휘하게 된 스푸르언스 제독은 전함이 한

척도 없는 미 함대가 자칫 미드웨이 서쪽 너머로 무리하게 진출할 경우 함재기를 띄울

수 없는 야간에 강력한 일본 수상함대와 야간해전에 휘말릴 수 있음을 염려하여 히류를

공격했던 함재기들을 수용하는 즉시 침로를 동쪽으로 돌려 일본함대의 추격을 벗어나

버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미드웨이 기지를 보호할 수 있는 거리에 함대를 위치시켜 혹

시 있을지도 모를 일본함대의 미드웨이 상륙을 견제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처음으로

항모를 지휘하는 지휘관답지 않은 침착하고 차분한 대응이었다. 당시에는 스푸르언스

의 이러한 행동이 지나친 몸조심이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전후 스푸르언스의 대응은 놀

랄만한 통찰력을 가진 작전지시였음이 입증되었다. 자정을 넘기면서 여전히 미 함대와

의 접촉이 없자 초조해진 연합함대 지휘부는 미 함대의 위치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정찰

기와 잠수함으로부터 받은 보고로 미 항모함대가 전속력으로 미드웨이에서 하와이쪽으로

동진중임을 알았다. 요컨대 미 함대는 일본해군과 야전을 벌일 의사가 전혀 없었고 이제

날이 밝아오면 열세의 항공 세력을 가진 곤도제독의 침공함대와 잔존 나구모 기동부대가

지나치게 미드웨이에 접근했다가는 자칫 미 항모 함재기들의 역습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

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때 야마모토 주력전함대와 나구모 기동부대와의 거리는 여전히

500km. 다음 날 하루 종일 전속력으로 항해해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북태평양

에서 진로를 바꿔 내려오고 있을 제2 기동부대도 합류하려면 이틀은 더 기다려야 했다.

도쿄의 나가노 군령부 총장은 이 시점에서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이 무리하게 미

해군의 절대 제공권 속으로 함대를 이끌고 가지 않을까 우려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오전 2시 55분,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는 새로운 명령을 전체 함대에게 하달했다.

-AF(미드웨이)점령 작전을 취소한다.

-미드웨이 침공함대, 잔존 제1항공함대는 주력전함대에 합류한다.

-상륙 부대는 서쪽으로 침로를 돌려 사이판으로 귀환하라.

-제2기동부대는 원래대로 AL작전을 계속한다.

국운을 걸었다는 MI작전을 중지하고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갈 것을 명령한 것이다.

이 무렵 곤도제독 휘하의 구리타 순양함대는 미드웨이에서 불과 144km 해역까지 진출

해 있었지만 함포 한발 발사해보지 못하고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일본해군은 사실상

모든 전함과 중순양함을 총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미드웨이에 포격을 가했던 것은

잠수함의 소형 포 몇 발이 전부였다. 그만큼 해전의 주역이 달라진 셈이다. 미드웨이에

상륙할 예정이었던 5천명의 이치기 지대를 태운 수송선단은 영문도 모른 채 작전 중지를

통보 받고 왔던 길을 되짚어 사이판 섬으로 돌아갔다. 미드웨이를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웨이크 섬에 대기하던 제 11 항공함대 소속 기지 항공대 역시 출동이 취소되었다.

가장 가까이 미드웨이에 접근했다 허무하게 돌아서야 했던 구리타 제독의 중순양

함대는 연합함대의 지시를 받은 지 얼마 후 미군 잠수함 탬버호를 발견하고 급격한

좌선회를 시도하다 신호를 제때 전달 받지 못한 순양함 모가미가 동형함 미쿠마를

들이 받는 사고까지 발생해 두 함 모두 출력을 잃고 느릿느릿 움직이게 되었다.

날이 밝자 다시 서진해온 미 해군 정찰기들에게 발견된 이들 두 불운했던 순양함에

SBD던틀리스 급강하 폭격기의 맹폭이 쏟아졌고 결국 미쿠마는 견디다 못해 처참한

모습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모가미 역시 대파되어 다시 전열에 나오기까지 1년이 넘

는 수리기간을 거쳐야 했다. 한편 대화재가 발생했던 4척의 항공모함 아카기와 가가,

소류와 히류는 여전히 밤새도록 불에 타고 있었다. 일본해군은 그 상징성 때문에 어

떻게든 기함 아카기를 살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화재로 선체 거의 대부분이 허물어진 상

태에서 예인조차 여의치 않았다. 적에게 넘겨주느니, 구축함의 어뢰로 자침을 결정했다.

어뢰에 의한 아카기의 자침은 근대 일본해군 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었고 항공함대의

상징이자 기함인 아카기를 스스로의 손으로 침몰시켜야 했던 함장 아오키 대좌와 생존

승무원들의 눈에는 비통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히류에서도 승무원들의 구조가 끝나자 야마구치 사령관은 구축함에게 어뢰를 발사할

것을 지시했다. 40년이후 야마구치를 내내 보좌해왔던 키우마 중좌는 히류를 마지막

으로 떠난 장교였는데, 보트에 올라 히류를 돌아본 그의 눈에는 함교에서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는 야마구치 소장과 함장 가코 대좌의 모습이 보였다. 제2항공전대원들이

본 두 사람의 최후모습이었다. 구축함 마키구모의 항해사 타무라 소좌가 어뢰를 발사

하기 전, 다시 한번 히류에 올라 생존자를 확인했을 때, 이미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디

에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미드웨이 최후의 일본항모였던 히류에게 그날 새벽 5시를

조금 넘겨 구축함이 어뢰를 발사했고 여전히 4시간이나 떠있다 최후를 마쳤다.

날이 밝아오던 오전 7시 15분 가장 피해가 컸던 소류가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했고,

13분 후 가가 역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일본 해군의 가장 소중했던 항모 주력 4척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잔존 나구모 기동부대는 초라한 모습으로 서둘러 미드

웨이 북서쪽으로 항로를 돌려 연합함대 주력전함대 쪽으로 향했다. 더 이상 미드웨이

근처에 어슬렁거리다가는 미 함재기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었기에.

한편 TF 16의 지휘관 스푸르언스 제독은 귀환하는 공격대 파일럿들의 보고와 통신을

분석해 본 결과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스의 공격대가 적 항모 4척 모두에게 일정 이상의

타격을 준 것은 사실인 듯 했으나, 여전히 그 전과를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 날 밤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카탈리나 비행정들은 4척의 일본항모들이 여전히 불타고

있음을 목격했다(그날 저녁 잔존 미드웨이 기지 항공대는 이들 항모를 향해 다시 폭격을

가했지만 이번에도 명중탄은 하나도 없었고, 잠수함 노틸러스도 가가를 향해 4발의 어

뢰를 더 발사했지만 하나도 폭발하지 않았다) 스푸르언스는 그제야 휘하 비행대원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승리를 이끌어냈음을 실감했고 적의 항모들이 완전히 회생불능이

되었다고 진주만에 보고했다. 냉정하고 침착한 신임지휘관의 정식보고로 진주만 기지는

승리를 완전히 확신하고 환호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통신감청을 통해서 항모들과 파

일럿들의 대화를 계속 듣고 있었던 진주만 태평양 함대 사령부의 참모들과 사령관 니

미츠 제독도 이미 TF 16과 17이 어느 정도 전과를 올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전과와 전황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신 할 수 없었다. 산호해 해전 당시에도 섣불리 승리

를 자축했다가 렉싱턴을 잃고 요크타운이 손상을 입었던지라 조심스러웠지만, 스푸르언스

의 보고로 이제 큰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니미츠는 스푸르언스가 큰 전과로 방심하여

무리하게 서진하다 야간 매복에 휘말릴 것을 염려했지만, 다행히 스푸르언스는 함대를

동쪽으로 이동시켜 진주만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스푸르언스 제독은 다음날 오전 정찰을 통해 미드웨이 서측방에는 일본함대의 자취가

보이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 날 내내 스푸르언스의 함대는 혹시 있을지 모를 미드

웨이에 대한 일본군의 역습을 경계하며 미드웨이 동북방해상에 머물렀다. 대열에서 뒤

쳐진 2척의 일본순양함에게 치명타를 가했고 이의 사진을 찍어 승리의 증거를 확보했다.

(너무 순간적으로 벌어졌던 결정적인 순간을 촬영한 사진은 아쉽게도 하나도 없었고 이

를 목격한 미국 측 증인은 호넷 뇌격대의 생존자 조지 개이 소위 한사람 뿐이다)

이날 내내 미 함대의 주요관심사는 사실상 일본함대보다는 어제 가장 빛나는 투혼을

보여주며 분전했던 항모 요크타운의 회생 여부였다. 당초 침수가 심해져 전날 오후 3시

경 선체를 포기하고 모든 승무원이 배를 떠났지만 밤새도록 요크타운은 기울어진 채

여전히 바다에 떠있었다. 구축함 햄먼으로 옮겼던 요크타운의 함장 버크마이스터 대령은

자원자를 뽑아 다시 기울어진 요크타운으로 다가가 구축함의 전력을 빌어 펌프를 돌려

서서히 침수구역의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소해정 빌레로과 구축함 휴즈가 더 추가되어

서서히 거대한 요크타운을 예인해가기 시작했고 밤새도록 요크타운의 보수반원들은 침수

구역의 물을 퍼내고 파손된 곳을 복구했다. 두 차례의 공격으로 폭탄과 어뢰를 두들겨 맞

았던 요크타운은 끝끝내 강인한 내구성을 자랑하며 회생하는 듯 보였다. 당장 1척의 항공

모함이 아쉬웠던 진주만의 니미츠 사령관 역시 요크타운의 수리와 예인에 모든 노력을 기

울이라고 지시했다. 진주만에서 출항한 예인선들이 도착해서 속도를 더 낼 수 있다면 이

역전의 항모는 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느리게 예인되고 있던 요크타운은 일본수상정찰기의 눈에 띄었고 근처에는 잠수

함 I-169호가 도사리고 있었다. 6월 6일 오후, 구축함의 호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

잠수함 I-169호가 발사한 어뢰는 구축함 햄먼을 한번에 격침시켰고 요크타운의 수선하부

에 또 한번 치명타를 가했다. 침수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고 배수펌프를 돌려 줄

전력을 공급해주던 구축함 햄먼도 없어진 상태에서 버크마이스터 함장은 어제의 성급

했던 포기를 또 한번 자책하며 역전의 용사 요크타운에게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복구작업을 하고 배수를 했었다면 요크타운은 출력을 회복하고 자력으로 움직일

기회를 얻었을 지도 몰랐기에 더더욱 아쉬운 최후였다.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 내내 빛나는 전과를 올리며 분전했던 항모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동북방 북위 30도 47분, 서경 176도 24분 해상에서 침몰했다. 미드웨이 해전

에서 미 해군은 항모 요크타운과 구축함 햄먼을 잃었다. 니미츠 사령관은 요크타운과

햄먼의 상실을 옥의 티라고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미드웨이 기지의 안전을 완전히 확

보해준 TF 16과 17은 4일간 계속된 전투와 초계로 많은 함재기와 파일럿을 상실했고

어느덧 연료마저 부족해지고 있었다. 스푸르언스 제독은 함대의 침로를 동쪽으로 돌려

하와이로 개선할 것을 명했다. 미 해군은 진주만 기습 6개월 만에 짜릿한 복수를 해냈다.

초라한 귀향 VS 당당한 발표

일본의 운명과 연합함대의 모든 것을 걸고 호기롭게 출발했던 대규모 MI원정은 생각

지도 않은 미 함재기의 공습으로 제1항공함대 주력 항모 4척이 전멸하는 참패로 끝났다.

MI작전의 중지를 지시한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관은 지병인 위궤양이 더욱 악화되었

고 이후 자기 선실에 들어가 3일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나구모 중장은 창졸간에

벌어진 상황전개에 거의 넋을 잃고 망연자실했다가 사직서를 제출하고 패전에 대한 사

죄의 뜻으로 자결을 하려고 했으나, 구사카 참모장을 비롯한 측근들은 나구모마저 잃을

수는 없다고 판단, 감시병까지 동원해 그의 자살을 막았다. 3일 만에 선실을 나온 야마

모토 사령관은 우가키 참모장과 숙의한 끝에 미드웨이의 패전 사실을 은폐하는 대대적

인 공작에 들어갔다. 6월 14일, 상처투성이의 함대가 최초의 출발지 하라시지마에 입항

했으나, 누구도 상륙이 허락되지 않았다. 전사자들에 대해서는 통보만 하되, 소속함선

은 알려주지 않았고 부상자 전원은 마치 죄수처럼 철저하게 격리되었다. 일본의 언론들

은 알류션 열도를 공격해 애투와 키스카 섬을 점령했다는 사실만을 보도했다. 침몰한

4척의 항모들과 순양함 미쿠마도 당분간 해군의 함적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일본 해군 군령부는 도쿄 시각으로 6월 5일 오후 늦게서야 히로히토에게 사절을 보내,

나구모 기동부대의 참변을 알렸고 히로히토는 큰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고 함선을 잃을수

있어도 감투정신만은 잃지 말라는 의례적인 격려를 보냈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기도 내

대신마저도 미드웨이 참패소식은 사흘 후에나 알 정도로 은폐되었다. 해군의 파트너였던

육군에게조차 6월 10일 대본영 합동회의에서도 이를 알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몰랐던 육군

참모본부는 해군의 항모에서 아카기와 가가, 소류와 히류가 이후 작전에 동원 되지 않은

것을 보고서야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를 눈치 챘을 정도였다. 미드웨이 해전의 진실이

일반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였다. 그간 연합함대의 자랑이었던 아

카기와 가가와 소류, 히류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의혹의 눈길이 있기는 했었지만,

일본인들은 이들 항모가 미드웨이에서 모두 침몰하는 참패는 생각지도 못했다.

미국시각으로 6월 6일 일본함대가 일제히 후퇴중임을 확인한 니미츠 대장은 미드웨이

의 승전을 알리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진주만의 복수는 일부 성취되었습니다. 미해

군은 적들이 이 전쟁이 지옥임을 깨닫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일본 해군이

완전히 무력해질 때까지 진주만의 복수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 중간지점(Midway)에 와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며 휘하 태평양 함

대 참모들과 모든 장병들의 노고와 분전을 치하했다.

처음 니미츠가 부임했었을 때, 전함 주력을 모두 잃고 패배주의에 빠져 지리멸렬하고

있던 태평양함대를 다독이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니미츠에게는 연이은 패배와 후퇴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부임 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6개월을 버티면 다행이

라고 토로할 정도로 니미츠의 입지는 불안하기만 했었다. 당장 반격하라고 재촉하는

성마른 상관 킹 해군 참모총장을 계속 설득해가면서, 자기보다 임관(니미츠는 39명이나

되는 선임제독들을 제치고 소장에서 바로 대장으로 승진해 태평양 함대를 맡음)이 빠른

선배기수 해군 제독들의 의심에 찬 눈초리와 잔소리를 견뎌가며 이룬 이 극적인 승리로

인해 니미츠의 입지는 탄탄대로를 굳혔고 이후 누구도 그의 리더십과 전략전술에 함부로

제동을 걸 수 없게 되었다.

미국 시각으로 6월 7일 오후가 되자, 미드웨이의 대승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이로 인해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축제분위기로 빠져들었다.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건 그간 티격태격 다툼이 잦았던 육군의 반응. 하이포의 정보분석을 못내 의심스러

워 했던 하와이 주둔 미 육군사령관 에몬스 중장(그 역시 진주만 기습으로 해임된 월터 쇼

트 중장의 후임으로 니미츠와 비슷한 시기에 부임)이 직접, 해군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네

이비 블루와 축하를 의미하는 금색의 화려한 리본으로 장식된 고급샴페인 박스를 들고 니

미츠 사령관을 찾아왔다. 그리고 황금색 거품이 이는 샴페인을 따르며 진주만 굴욕이후

처음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킨 해군의 승전과 노고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겸손한 니미츠는 이번 작전에서 보여준 육군 항공대의 적극적인 협조와 다대한 공헌

(전후 미일양측의 전과 확인 작업이 끝날 때까지 미드웨이승전에 대해서 육군항공대

역시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해왔다)에 대한 치사와 감사의 인사로 답했고 에몬스 중장

에게 일일이 휘하 참모들을 소개하며 이들의 미드웨이 공헌을 화제로 분위기를 띄웠다.

이 즐거운 자리에 니미츠는 일등공신인 하이포의 로쉬포트 중령도 불러 함께 축하하며

치하를 하고자 했으나, 자신의 일 이외의 일상적인 사교에는 0점인 이 괴짜 사내는 니

미츠의 전령이 부르러 갔었을 때 결전을 앞두고 연일 밤을 새워 부족했던 수면을 취하

다가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느라 시간을 지체해 정작 파티에 도착했을 때에는 육군이 보

내온 샴페인은 모두 떨어진 뒤였다고 한다.

6월 7일 워싱턴에서 어네스트 킹 해군참모총장은 미 해군 함대 총사령관을 겸직하는

첫날, 취임 기자 회견에서 미드웨이의 승전을 다음과 같이 브리핑 했다. "미드웨이 해전

은 일본 해군에게 350년만의 참패이며 이것으로 일본군의 공세는 종지부를 찍고 태평양

제해권을 다시 찾게 되었다." 킹의 지적은 350년전 조선의 이순신 함대에게 한산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던 일본이 또 그에 버금가는 치욕을 맛보았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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