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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2)// 태평양의 한산도대첩, 미드웨이 해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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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나그네
댓글 1건 조회 2,672회 작성일 10-09-09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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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타운

낮 12시가 채 못 돼, 항모 요크타운의 레이다는 80km거리에 위치한 고바야시 폭격대를

발견하고 전투태세를 갖춘다. 요크타운은 착함을 준비중이던 레슬리 소령의 폭격대에게

일시 안전한 장소로 대피해 대기할 것을 지시하고 20대의 와일드캣 전투기들이 상공에

서 대기하며 요격토록 했고, 요크타운의 연료파이프에는 불활성 이산화탄소 개스를 가득

채워두었다. 산호해해전에서 부적절한 CAP 대응과 연료파이프의 누출로 인해 렉싱턴을 상

실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요크타운은 나름대로의 준비에 몰두하며 보일러의 온도를 높여

30노트의 고속으로 항진하기 시작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와일드 캣 호위 전투기들은 고바야시 폭격대를 급습해 3대의 제로

전투기와 6대의 급강하 폭격기를 격추했고 요크타운의 대공포 역시 2대를 걷어냈다.

고바야시 대위 역시 이 과정에서 전사했고 살아 돌아간 폭격기 수는 겨우 5대.

접근하면서 심한 견제를 받은 고바야시 폭격대는 겨우 5대가 폭탄을 투하해 3발이나 명

중시키면서 요크타운을 격침시켰을 것으로 짐작했다. 이정도 명중탄이면 일본항모들처럼

미항모에게도 치명타를 안겼을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고바야시 폭격대가 명중시킨 3

발은 각각 격납고를 파괴하고 요크타운의 보일러를 일시 멈추게 하기는 했으나, 일본항모

들처럼 대규모 유폭이나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다(그러나 고바야시 폭격대의 생존함재기

들은 미항모가 불타고 있는 것을 목격, 이를 보고후 귀환했다) 요크타운의 함내 연료파이

프에 채워진 불활성 개스와 피해복구반의 신속한 화재진압으로 불길은 한 시간도 채 되

지 않아 모두 잡혔고 오후 1시 40분이 되자 갑판의 뚫어진 구멍마저 모두 수리한 요크타

운은 엔진을 재점화해 속도를 20노트로 올리고 근처 하늘에 대기하고 있던 레슬리 폭격대

를 수용했다.

그러나 폭탄 공격으로 레이다와 통신시설이 파괴되면서 더 이상의 기함역할을 하기는

어렵게 되어 플레처 소장은 기함을 순양함 아스토리아로 옮기면서 전체 TF 17의 작전지

휘권을 엔터프라이스의 스푸르언스 소장에게 인계했다.

2시 반이 지나자, TF 17 호위순양함의 레이다가 도모나가 공격대가 남서쪽 80km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감지했고 발광신호로 요크타운에 알렸고 요크타운의 호위 전투기들은

8대에서 12대로 증가했다. 4척의 중순양함이 함포사격으로 거대한 물기둥을 만들면서

저공으로 접근해 오는 일본뇌격기들의 공격을 방해했고 대공포화 역시 불을 뿜었다.

와일드캣 전투기들과 제로전투기가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는 동안 히류의 뇌격대는 어

뢰를 발사했고 5발 중 2발이 요크타운을 명중시켜 연료탱크에 구멍을 내고 키를 사용

불능상태로 빠트렸다. 일본측 피해는 도모나가 대위의 탑승기를 포함한 뇌격기 5대와

전투기 3대. 그러나 도모나가 뇌격대는 자신들이 공격한 항모가 고바야시 폭격대가 공

격했던 요크타운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전혀 새로운 항모를 만나 대파시켰음을

야마구치에게 보고했다. 야마구치는 이제 양측의 항모는 각각 한척이 남았다고 생각

했고 최후의 결전을 벌일 결심을 한다.

한편 수선하부를 강타당한 요크타운도 곤경에 빠져 있었다. 첫 번째 공습에서 수월

하게 화재를 진압하고 함의 기능을 회복했던 역전의 항모 요크타운이었지만, 어뢰에

피격되어 수선하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태평양 바닷물을 진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피해복구반의 절망적인 보고를 듣자, 버크마이스터 함장은 오후 3시 요크타운을 포기

하기로 결심하고 총원 퇴함을 명한다. 그러나 산호해의 렉싱턴처럼 이번에도 미 해군

은 여유롭게 함원들의 퇴함을 준비하고 커다란 인명피해 없이 요크타운을 빠져나왔다.

요크타운의 승무원들이 구조를 위해 접근하는 호위함들을 향해 "택시, 택시!!"를 외쳤

을만큼. 그러나 요크타운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여전히 떠 있었다(버크마이스터 함장의

퇴함 명령은 좀 성급한 것이었다)

달빛 아래 두 남자

2시 45분경, 요크타운에서 출격했던 정찰기의 월레스 쇼트 대위로부터 TF 17의 북서방

175km 해역에서 나구모 기동부대의 마지막 항모 히류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를 수신한 TF 16의 스푸르언스 제독은 요크타운의 설욕을 위해 그날의 두 번째 출격

을 지시한다. 오후 3시 30분 24대의 SBD 던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들이 윌머 갤러허 대위

의 인솔(1차 공격을 지휘했던 맥클러스키 소령은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지휘를 할 수 없

었다)하에 엔터프라이스에서 이함했다. 이중 10대는 요크타운이 피격될 때 비상 착함

했던 요크타운의 함재기들이었다. CAP전투기가 부족해져 호위전투기를 딸려보내지는

않았으나, 이미 히류에게도 충분한 호위전투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오후 5시, 이제 야마구치의 히류에는 급강하 폭격기 5대, 뇌격기 5대와 6대의 제로전

투기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장을 잃고 돌아온 도모나가 뇌격대로부터 미 항모 한척에

게 다시 치명타를 입혔다는 보고를 받고 이제 양측에는 각각 한척씩의 항모가 남아 있을

뿐이므로 최후의 결전으로 미항모세력을 일소하고 아카기와 가가, 소류의 복수를 하고

자 했다. 야마구치는 함재기들의 재급유와 무장탑재가 이뤄지는 동안 먼지를 뒤집어

쓰고 피로에 절은 자신의 공격대원들에게 밥을 먹이고 일일이 한사람 한사람 모두에게

담배를 직접 건네며, '하루 종일 혹사시켜 정말 미안하지만 한번만 더 버텨주게'라는

말로 위로했다.

그러나 야마구치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5시 3분 정찰기로부터 '적 급강하 폭격대가

바로 히류로 접근중'이라는 보고가 날아들었고 채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갤러허 급강

하 폭격기들은 석양을 등지고 히류로 내리꽂혔다. 간신히 첫 번째 폭탄을 전타로 회

피하기는 했으나 연이어 날아든 4발의 폭탄은 히류의 전부 갑판을 부수고 격납고에서

대폭발을 일으켰다. 갤러허 공격대의 피해는 단 3대. 고작 4발의 폭탄이었지만, 이미

급강하 폭격에 취약했던 동형함 소류의 경우처럼 히류 역시 한번 불붙은 화재를 제어

하지 못하고 이내 전체로 번져나갔다. 남아 있던 갤러허 대위의 공격대 중 일부는 전

함 하루나와 순양함 지쿠마를 공격했을 만큼 히류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여전히 속도를 잃지 않고 대공포화 역시 치열했으나, 내부 폭발로 피해복구용 장비

거의 대부분이 날아가 버린 상태에서 줄서서 물동이를 이어 나르는 식으로는 히류의

화재를 복구할 방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5시 30분 경, 호넷에서 출격했던 급강

하 폭격기들도 히류를 발견했으나 그들은 이미 불능이 된 히류를 공격하지 않고 대신

전함 하루나를 공습했다.

자정을 넘겨 한시, 상황이 절망적이 되자, 야마구치 소장은 총원 퇴함을 명했다.

그러나 소류, 히류 양함을 잃은 데 대한 책임을 지고자 야마구치 스스로는 히류와

최후를 함께 할 것임을 밝혔다. 휘하 참모들이 이후 재기를 위해 퇴함을 간청했으나,

야마구치는 자신의 전투모를 가족들에게 전해줄 것을 유언한 후, 함장인 가코 대좌와

함께 "자, 이제 달구경이나 하세"하며 함교를 떠났다. 구축함 노와케가 다가와 히류의

승무원들을 구조하는 사이, 휘영청 뜬 달빛 아래에서 불타는 히류에는 오직 야마구치와

가코 두사람이 남았을 뿐이었다.

야마구치 다몬, 야마모토의 뒤를 이어 미래의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손꼽히던 수재

이자 맹장이었던 그가 이토록 빨리 세상을 버린 것 역시 일본해군에게는 크나큰 손

실이었다. 누구보다 항공전력의 미래를 내다보고 이의 육성을 강력히 주창했으며,

선후배들간에도 신망이 높아,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일본해군내에서도 선배기수들

조차 "그의 지휘라면 언제든지 기쁘게 받겠다" 라는 찬사를 받았던 야마구치.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적극적인 공격으로 기선을 잃지 않으려했던 야마구치는 끝내

히류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떠 있는 비행장의 근원적 문제

미일을 막론하고 태평양 전쟁 전부터 항모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측에서는

항공모함이 지상의 비행장보다 공격 반경이 획기적으로 커지는 장점이 있지만, 물 위에

떠있기 때문에 파괴될 가능성도 더 크다는 약점을 지적해왔다. 그리고 이후 실전에서

이들의 우려는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된다. 항모는 선체 구조상 장갑을 둘러친 전함이나

순양함에 비해 방어력이 매우 취약했고 그 때문에 자주 침몰되고 손상을 입곤 했다. 하지

만 태평양 전쟁 기간 내내 거의 비슷한 크기의 미 항모들이 폭탄 피격만으로 침몰한 사례

가 전무한데 비해 미드웨이에서 일본항모들은 폭탄피격만으로 재기불능이 돼버렸다.

이 대목에서 왜 일본의 항모들이 폭탄 서너 발로 순식간에 기능이 정지 되고 심지어는

단 한발로도 이토록 엄청난 대화재를 일으켰는지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당시 미국과 일본의 항모들은 모두 비행갑판을 장갑화하지 않고

나무갑판을 깔았기 때문에 폭탄 피격 시 쉽게 구멍이 뚫렸다는 점은 같았다.

그러나 그 밑의 구조는 사뭇 달랐다. 당시 미 항모는 단일 격납고 구조에 개방식 설계

를 택했지만, 일본 항모들은 복층식 격납고 구조에 폐쇄식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복층식 폐쇄구조를 가진 일본 항모가 훨씬 더 튼튼해 보이지만, 실제

로 격납고에서 폭탄이 터지게 되면 개방식 선체를 가진 미 항모들은 폭발시 발생하는

에너지의 상당수를 그냥 외부로 배출시켜 선체의 피해를 최소화 해주는 데 비해 폐쇄

식 구조를 가진 일본 격납고는 폭발 에너지 전체를 모두 함선의 구조물이 흡수해버려

훨씬 더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미 항모들은 폭탄창과 격납고 사이의 격벽

구조가 장갑화되어 있어 피탄을 당해도 쉽사리 유폭을 일으키지 않는 반면, 일본 항모

의 폭탄(어뢰)보관창의 장갑구조는 미항모에 비해 현저히 약했고 폭발로 인한 연쇄

유폭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또한 격납고에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에도 개방식

선체구조를 가진 미 항모들은 유폭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폭탄이나 어뢰 기타 인화물

질들을 개방된 통로를 통해 쉽게 바다로 내던져버릴 수 있었던데 비해 폐쇄식 선체

구조를 가진 일본 격납고에서는 위험 물질의 배출 역시 쉽지 않았다. 여기에 미항모들

은 시야가 탁 트인 대형 아일랜드(항모의 지휘함교를 전통적으로 아일랜드라고 부릅니

다)함교구조를 택해 선체가 파손을 당해도 신속히 피해상황을 파악하고 복구 작업을

지시할 충분한 지휘공간이 있었던데 반해, 일본항모들의 아일랜드 함교구조는 전통적

으로 작게 설계되어 자함의 피해를 신속히 파악할 시야도 부족했고 복구작업을 지시

할 통합적인 지휘소 공간도 없었다. 미 해군은 피해복구에 대해서 보직과 계급을 불문

하고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이 실시되어 수병에서 제독에 이르기까지 누구든 선체 피격

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에 비해 일본해군에게 피해복구와 제어는

여전히 전문가들의 일이었다. 가가의 경우 피해복구 담당 장교가 전사해버리자, 당장

함체의 피해복구를 지시할 지휘관이 누군지도 모르는 혼란 상황에 빠져버렸다. 피해

복구 실무자였던 쿠니사다 대위가 당시지휘계통상 가가의 피해복구를 지휘했어야 했지

만, 정작 당사자 쿠니사다 대위는 전체 상황을 파악 하지 못했고 그저 부서진 전송관에

매달려 함교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초기에 적절한 대처를 전혀 못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개념을 우선시한 일본해군들은 미해군에 비해 피해복구 분야에

있어 여러 면에서 뒤졌고 특히 항모의 피해복구능력에 있어서는 그들의 뛰어난 공격력

과 명중률에 비해 취약한 구석이 많았다.

당시 미드웨이의 일본항모들은 연료와 폭탄과 어뢰를 만재한 함재기(2차 공격대)를 격

납고에 그대로 둔 상태에서 연이어 폭탄에 피격된 상황이었다. 폭발의 충격을 거의 100

% 선체로 받아내어 파손이 컸던 것은 물론, 격납고에서 발생한 폭발들은 연이어 함재기

들의 연료와 탑재된 폭탄과 어뢰에 유폭과 화재를 일으켰고 이에 따른 피해복구활동 역

시 빠르게 전개되지 못했다. 특히 지휘부가 피격으로 전원 전사한 항모 가가의 경우는

지휘 계통을 잃어 피해복구가 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폐쇄식 선체구조에도

장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42년 6월 미드웨이 시점에서 일본항모의 폐쇄식

선체구조 설계는 급강하 폭격에 의한 피격 시 즉각적인 회복불능이 될 만큼의 취약성을

노출시켰다.

근본적으로 화재와 폭탄 공격에 취약한 선체구조에다 다량의 위험물질을 가지고 있었

던 2차 공격대가 대기하고 있던 격납고에 직격탄 폭발이라는 상황이 맞물리자, 가가와

소류와 아카기의 화재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번지기 시작 했고 세 항모 모두 30분

이 채 못돼 더 이상 항모로써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소류는 피격 20

분후 퇴함 명령이 내려질 정도로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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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다시 읽는 글이지만 나그네님의 분석이 참 치밀하고, 박진감 있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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