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바다의 싸움(2)// 태평양의 한산도대첩, 미드웨이 해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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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한편 나구모 기동부대의 근처 하늘에서는 카탈리나 비행정이 약삭빠르게 구름 속을
오가면서 계속해서 일본함대의 위치와 항로를 미드웨이 기지항공대에게 알려주고 있
었다. CAP임무를 맡고 있는 제로전투기들이 계속 추적은 하고 있었지만 짙은 구름 속을
들락거리는 카탈리나 비행정을 잡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일본 항
모에는 레이다가 없어 미드웨이에서 날아오는 미군 공격기들을 일찍 발견하지 못하고
순양함 도네에서 출격한 정찰기의 무전보고와 호위함들의 보고, 그리고 자체 함교의
관측에만 의존하고 있어 그 대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오전 7시를 조금 넘기자 카탈
리나 비행정의 유도를 받은 미드웨이의 기지 항공대의 공격기들이 처음으로 일본 항모
근처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기의 호위도 없이 마구 출격해버린 이들 미드웨이 기지
잡탕(?)부대의 선두에는 L.K.피버링 대위가 이끄는 6대의 TBF 신형 어벤저 뇌격기와 육군
항공대 B-26 머로더 경폭격기 4대가 있었다. 어벤저 뇌격기가 우수한 성능의 튼튼하고
신뢰가 높은 새기종이기는 했으나, 호위 전투기도 없이 저공으로 접근하는 일은 사실상
자살행위였다. 6대의 뇌격기중 3대는 항모근처에 접근해보기도 전에 제로전투기의 밥이
되었고 어렵게 접근해 어뢰를 발사한 3대도 곧 대공포와 제로전투기에 의해 간신히 한
대만 살아남고 2대는 모두 바다 속에 처박혔다. 발사한 어뢰도 히류와 순양함 나가라를
위협하기는 했으나, 느린 속도로 인해 일본 함대는 쉽게 회피해버렸다. 살아 돌아간
어벤저 뇌격기도 너무 큰 손상을 입어 사용불능이 됐다. 첫 공격은 성과 없이 전멸.
이번에는 어뢰를 장착한 B-26의 차례였다. 미 육군항공대 폭격기가 처음으로 어뢰를 싣고
저공으로 날아드는 참으로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는 했으나, 이 역시도 자살행위이기
는 앞서의 어벤저 뇌격기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4대의 머로더 중 2대는 어뢰를 발사해보
지도 못한 채 불덩이가 되어 버렸고 스칠 듯이 수면을 나르며 발사된 한발의 어뢰는 기함
아카기를 노렸으나, 아카기 조타장의 노련한 전타로 인해 빗나가 버렸다. 육군 항공대의
B-26 머로더 역시 용감하고 대담하기는 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들의 공격을 직접 함상에서 목격했던 후치다 중좌(수술 후 회복 중이던 후지다는 미군
기가 접근해온다는 경보가 울리자 병상을 박차고 나와 전투기에 오르겠다고 고집을 피웠
지만, 담요를 뒤집어 쓴 채 관전을 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를 비롯한 일본장교들의
전후 증언에 따르면, 미 항공기 파일럿들이 용감하게 투지를 발휘했으나, 미군의 어뢰는
너무 느려서 쉽게 피할 수 있었고 심지어 어떤 어뢰는 항모에 장치된 기관포로도 파괴할
수 있었다고 하니, 당시 미 해군이 사용한 MK13어뢰의 신뢰도와 성능이 얼마나 떨어졌
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의 어뢰는 당연히 일본군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고 43년 중반에 가서야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미드웨이 기지 항공대의 산발적인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7시 15분 나구모 제독은 도모나
가 1차 공격대 지휘관의 의견을 수용, 대기하고 있던 2차 공격대의 폭장을 함선 공격용에
서 지상 폭격용으로 교체하라고 지시했다. 함상공격기에 달려 있던 833kg짜리 어뢰를 다시
800kg 고폭탄으로 바꾸고 급강하폭격기 역시 철갑관통용 폭탄 대신 지상공격용 고폭탄으로
교체하느라 기함 아카기와 가가, 제2항공전대 소류와 히류의 정비병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한창 폭장 교체 작업이 진행되던 7시 30분 경, 30분 늦게 출발했던 순양함 도네의 4호
정찰기로부터 미드웨이 동북방 380km 해상에서 빠르게 기동하고 있는 미 함대를 발견했다
는 보고가 들어 왔다. 참으로 공교롭기 짝이 없는, 뒷맛이 찜찜한 보고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 폭장 교체를 중지하고 공격대를 출격시키자니, 지상 공격용 폭장으로는 제대로
된 함선 공격을 하기가 어려웠고 이제 곧 8시가 되면 미드웨이에서 돌아오고 있을 도모
나가 공격대를 수용해야만 했다. 지금 2차 공격대를 발진시켰다가는 도모나가 공격대는
착함 할 기회를 잃게 되고 연료가 떨어져 바다 속에 처박힐지도 모른다.
게다가 도네의 보고는 발견한 미 함대의 함종이나 가장 중요한 항모가 있는지에 대해
서는 아직 언급이 없는 애매모호한 것이었다. 나구모 제독은 미 함대의 종류와 침로,
속도 등의 상세정보를 보고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도네의 4호 정찰기는 빠른 응답을
해오지 않고 있었다.
8시가 되자, 로프튼 헨더슨 소령이 이끄는 미드웨이 해병항공대의 SBD 던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16대가 전투기의 호위도 없이 항모 히류의 주변에 날아들었다. 헨더슨 소령은
'나를 따르라'며 과감히 공격에 나섰지만, SBD를 몰아본지 불과 며칠 밖에 안 된 신참
파일럿들로 구성된 헨더슨 소령의 급강하 폭격대는 제로전투기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기체가 80-85도의 예리한 낙하각을 형성해야 효과가 극대화 되는 급강하를 할 능력이
없었던 헨더슨 급강하 폭격기대는 일본 항모의 대공포 사수들이 쉽게 요격 할 수 있는
3000미터 상공에서 겨우 45도 각도로 접근하다 연이어 불덩이가 되며 바다에 떨어졌다.
공격에 나선 16대중 10대가 격추 되었고, 최선두에 서서 부하들을 유도하던 지휘관
헨더슨 소령도 제로전투기에 의해 가장 먼저 전사했다(후일 헨더슨의 이름은 과달카날
의 미군 비행장에 붙여졌고 미해병대의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기억 중 하나가 된다)
미드웨이로 귀환한 6대도 심한 손상을 입어 다시는 비행할 수 없었다. 야마구치 제2항공
전대 사령관이 타고 있던 항모 히류에서 불과 50미터 거리에 떨어진 폭탄이 가장 근접
했던 공격이었다.
던틀리스 급강하폭격대의 공습이 끝난 지 몇 분 후 육군항공대 월터 스위니 중령이
이끄는 15대의 B-17 중폭격기들이 동북쪽 방향에서 날아오며 6600미터 상공에서 소류와
히류, 아카기를 향해 폭탄을 투하했으나, 엄청난 크기의 물기둥들만 만들어 냈다. 근접
해서 투사하는 어뢰나 급강하폭격도 명중률이 떨어지는 해상전투에서 고공폭격을 전문
으로 하는 B-17로 전과를 내기는 애초부터 불가능 했다. 노련한 기동부대의 조타장들은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회피기동을 시작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다만 제로전투
기의 화력으로 B-17을 격추하기에는 기체가 너무 크고 장갑이 우수했기에 큰 피해 없이
귀환할 수 있었다. 미군의 공격은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수중에서도 전개되었다. 소령
윌리엄 브로크맨 함장의 잠수함 SS-168 노틸러스(최초의 핵추진 잠수함 노틸러스와는
전혀 다른 디젤추진식 잠수함으로 후일 핵잠수함 노틸러스가 이 이름을 승계했다)가 7시
55분경 일본 기동부대를 발견하고 이를 추적하다 8시 25분에 전함 기리시마에게 어뢰 2
발을 발사했으나 명중(한발은 아예 발사조차 되지 않았을 정도로 당시 미해군의 어뢰는
신뢰성이 떨어졌다)되지 않았다. 노틸러스의 잠망경과 항적을 발견한 순양함 나가라가
추격을 개시하며 폭뢰를 투하했으나, 노틸러스는 심도 50미터로 잠수하며 이를 피했다.
공습이 이어지는 가운데 잠수함의 존재마저 감지되자, 기동부대의 호위함들은 바싹 경
계망을 강화했고 점점 더 주력함들의 보호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잠수함을 탐지 공격
하는 호위함 중에는 구축함 아라시도 끼어 있었는데, 이 아라시가 전체 판세의 흐름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빌미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노틸러스의 공격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벤저민 노리스 소령이 지휘하는 미드웨이 해병
항공대의 구식 빈디케이터(하도 낡아 덜덜거리는 풍향계라는 별명이 붙은) 급강하 폭격기
11대가 일본기동부대 남동방면에서 공습을 개시했으나, 워낙 항모주변의 제로전투기 초
계망이 강화되어 있었고 거리상으로도 너무 멀다 판단되어, 전함 하루나에 공격을 시도
했다. 그러나 전함 하루나는 막강한 대공포화를 쏟아내며 고속으로 기동, 5-6개의 폭탄
을 잘 피해냈다. 이어서 날아온 제로전투기들이 이들을 남서방면으로 몰아내버렸다.
노리스 소령의 부대는 2대를 잃었다. 돌아간 빈디케이터 급강하 폭격기들 역시 대공포화
와 제로전투기의 요격으로 기체에 무수한 구멍이 뚫린 채 간신히 귀환해 재출격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로써 미드웨이 기지항공대는 모든 공격을 마쳤지만 거의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반면 유효한 명중탄은 단 한발도 없었다.
오전 7시 무렵, 미군의 첫 공격이 시작된 이래 8시 반까지 일본 기동부대는 산발적
인 공습을 받으면서 함대의 영공보호를 맡은 제로전투기들이 계속 이함과 착함을 반
복하며 재급유와 재무장을 해야 했고(전투기들은 고속의 전투비행을 하면 평상시
비행보다 훨씬 더 빨리 연료를 소모한다. 설사 기름이 남았다 하더라도 기총의 탄약
이 떨어지면 전투기들은 다시 착함하여 탄약을 보충해야 임무수행이 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실 것) 폭탄이 떨어지거나 어뢰가 발사되면 고속의 회피기동과 대공포 사격
을 해야 했던 관계로 8시 5분이 조금 지나 기동부대의 상공에 도착했던 도모나가 1차
공격대는 계속 안전지대를 선회하며 착함허가를 기다려야만 했다. 도모나가 공격대는
헨더슨 급강하 폭격대와 B-17 그리고 빈디케이터 공격대의 공습이 모두 끝난 8시35분
을 넘어서부터 착함이 시작되어 9시 15분이 되어서야 간신히 전체 공격대의 수용이 끝
날 수 있었다.
딜레마 1
한편 미드웨이 동북방 200km해역에서 은인자중하며 일본항모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TF 16,17의 항모들은 6시가 되기 직전, 하워드 애디 대위의 일본 항모 발견 보고
를 수신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TF 16의 신임지휘관 스푸르언스 소장은 당초
일본 항모들과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지는 시각에 맞추어 공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미드웨이 기지 비행정이 보고한 거리는 미 함재기들의 최대 항속거리에 가까워 오차
범위를 생각하면 조금 더 가까워 진후의 공격이 적합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TF 16의
참모장 마일스 브라우닝 대령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지금 한창 미드웨이를 공습하고
있을 일본 공격대가 모함으로 돌아가 착함을 하고 재출격을 준비하고 있을 그 시점이야
말로 일본 항모들이 가장 취약한 상태가 되는 최상의 역습기회라고 생각해 지금 당장
모든 공격대를 출격시키자는 의견을 내놨다. 전임지휘관 핼시의 참모다운 대담하고
적극적인 발상이었다.
만약 브라우닝 대령의 진언대로 일시에 모든 공격대가 지금 출격해 일본 기동부대를
제대로 공격할 수 만 있다면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 정찰보고
가 잘못되었다거나, 적 함대가 항로를 바꾸거나, 항속거리 한계 이상으로 멀어져 버려
제때에 일본항모들을 찾지 못하게 된다면 함재기들은 연료가 떨어져 바다에 떨어지게
되고 더 이상의 공격기회는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노련하고 유능한 일본 기동부대
파일럿들의 역습을 허용하게 되고, 열세의 전투기 호위만 남게 될 엔터프라이스와
호넷의 운명은 극히 위태롭게 된다.
처음 항모를 지휘하고 있던 스푸르언스 소장은 과거 자신이 모셨던 상관 핼시라면
아주 좋아했었을, 이 대담한 건의안을 놓고서 잠시 숙고했다. 침착하고 냉정하며,
이성적인 면이 강했던 스푸르언스 제독은 항모전의 전문가는 아니었으나, 브라우닝이
주장하고 있는 절호의 공격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해 모험을 해보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엔터프라이스와 호넷에는 34대의 CAP용 와일드 캣 전투기만을 남겨두고,
먼저 호넷(호넷의 함번은 8번이며 휘하 비행대는 모두 기종에 따라 8번으로 동일하게
호칭된다)에서 TBD 디베스테이터 뇌격기 15대(일명VT-8), SBD 던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35대(VB-8), 뇌격대를 호위할 와일드 캣 전투기 10대(VF-8)가 전투기, 급강하 폭격기,
뇌격기의 순으로 이함을 시작했고 기함 엔터프라이스(함번 6)에서도 TBD 디베스테이터
뇌격기 14대(VT-8), SBD 던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35대(VB-6), 와일드 캣 전투기 10대(V
F-6)가 차례로 날아올랐다. 모두 합해 뇌격기 29, 급강하 폭격기 70, 전투기 20으로
이뤄진 합계 119대의 대부대였다. 그러나 미 함재기들은 4척의 항모에서 각각 27대가
이륙해 고작 45분도 채 걸리지 않았던 도모나가 1차 공격대와는 달리, 2척의 항모에서
각각 60대의 함재기가 이함 해야 했던 관계로 한 시간을 더 넘겨서야 모든 공격대가
이륙하고 편대를 편성해 공격에 나설 수 있었다. 한참 공격대의 발함이 이뤄지고 있던
7시 30분경 TF 16은 일본해군 수상정찰기가 자신들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
때문에 스푸르언스 제독과 TF 16의 참모진들은 느리게 진행되는 공격기들의 발함이 더
욱 더 초조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서둘러 출발한다고는 했으나 가장 먼저 이함(당시
항모는 기체가 제일 가벼워서 활주거리가 가장 짧은 전투기가 맨 먼저 이함 했다)해
상공에서 거의 1시간 가까이나 대기해야 했던 와일드캣 전투기들은 출발시부터 연료가
부족했었고 충분한 편대 구성의 시간마저 빠듯해 그야말로 마구잡이에 가까운 엉성한
편대구성으로 적진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실상 조직적인 협동 공격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TF 16의 대규모 공격대는 일본항모들을 찾아 서쪽으로 서쪽으로
기수를 향했다. 이제 스푸르언스 제독과 참모진들은 낭보를 기다리며 초조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과연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계속 저울질하는 딜레마에 빠진 채.
반면, 이미 최초의 항모간 대결 산호해해전을 경험했던 TF 17의 요크타운(함번5)에 승
선해 있던 프랭크 플레처 소장의 대응은 조금 달랐다. 산호해 해전에서 정찰기의 잘못된
보고로 전 공격대를 엉뚱한 곳에 출격시켰다가 막상 쇼가쿠와 즈이가쿠를 발견하고도
공격기회를 놓쳐 다음날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함재기와 대형항모 렉싱턴을 잃어야
했던 쓰라린 경험을 반영해 충분히 거리가 좁혀졌다고 판단되는 8시 무렵에야 전부가
아닌 절반의 공격대만을 출격시킨다. 모두 17대의 급강하 폭격기(VB-3:이 대목에서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왜 TF 16과 달리 요크타운의 함번(5)과 항공대의 번호(3)가 다른
지를 의문이 가실 것이다. 그렇다, 당시 요크타운에는 원래 함번 3인 사라토가의 비행
대가 대신 배속되어 있었다. 원래 요크타운 비행대는 산호해해전의 피해가 커 재정비중)
와 12대의 뇌격기(VT-3)가 6대의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날아올랐다. 플레처는 산호해
해전의 교훈을 살려, 절반의 던틀리스 급강하 폭격대로 하여금 예측불허의 상황을 대비
하려고 했다. 워낙 조심성이 많아서 니미츠 태평양 함대 사령관과 어네스트 킹 해군 참모
총장으로부터 적극적이면서도 순간 포착이 능해야 할 항모지휘관으로는 부적합 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사기까지 했던 플레처 제독은 어쨌거나 신중한 포석으로 일본항모
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플레처의 작전은 워낙 예측불허의 상황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항
모 작전에서 1차 공격이 실패하더라도 다시 한번 공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고 추후의
상황변화에 TF 16보다 훨씬 더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가뜩이나
항모 한척에 불과한 TF17의 전력을 분산시켰기 때문에 잘못하면 각개격파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어찌 보면 항모가 2척인 TF 16이 전력을 비축하고 항모가 한척에 불과한
TF 17은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 TF 16과 균형 잡힌 공격대를 형성해 동시에 공격을 했었더
라면 이함과 편대편성의 시간을 절약하면서 여러모로 좋았겠지만, 선임자로 전체 작전을
지휘하게 된 플레처 제독은 스푸르언스 소장의 작전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았고 사실상
둘은 니미츠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플레처 제독 역시 일말
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오전 8시 30분을 넘기면서 이제 TF 16과 17의 두 제독은 오직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동쪽의 하와이 진주만에서도 쓸 수 있는 카드라는 카드
는 모두 승부수로 던져버린 니미츠 사령관 역시도 밤을 새우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딜레마 2
잡동사니 미드웨이 기지항공대의 영양가 없는 산발 공습을 연신 피해가며 2차 공격과
도모나가 1차 공격대 수용을 준비하던 기함 아카기의 나구모제독과 기동부대의 참모진은
오전 7시 반을 전후하여 매우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해 있었다. 예정보다 늦게 출발했던
순양함 도네 4호 정찰기의 미 함대 발견 보고는 일본 기동부대에게 전혀 뜻밖의 상황
전개를 의미했다. 여태까지의 모든 작전이 미드웨이 주변에 미 함대가 없다는 전제하에
서 이뤄지고 있었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준비 해둔 2차 공격대의 함선공격용 폭장을
미드웨이 폭격용으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린지 고작 15분도 채 되지 않아 전개된 상황
변화는 기함 아카기의 함교 내 분위기를 묘한 긴장과 불안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나구모
제독은 일단 2차 공격대의 폭장 교체 작업을 중지시켰다. 이 바람에 절반 정도 교체가
진행되었던 기동부대 항모 갑판 아래의 격납고는 일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격납고
에서는 막 떼어낸 어뢰들을 어뢰 보관창고로 실어 가려다가 기폭장치를 그대로 달고서
다시 격납고 여기저기에 쌓아 둬야 했고 장착을 서두르던 지상 공격용 폭탄과 함선공격
용 폭탄이 온통 뒤섞여 가뜩이나 비좁은 격납고를 더욱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들 역시
도 뇌관을 제거하지 않은 폭탄이 많아 순식간에 격납고는 매우 위험할 수 도 있는 상황
이 되었다. 현재상태의 위험성을 너무도 잘 아는 격납고의 정비병들은 다음 지시를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아직 함교에서는 이렇다 할 지시가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최초 미 함대 발견 보고 후 10분이 지나서야 도네의 4호 정찰기는 미 함대가 순양함
5척 구축함 5척으로 이뤄졌고 20노트의 속도로 항진중이라고 타전해왔다.
이때 제2항공전대의 사령관 야마구치 다몬 소장이 탑승한 항모 히류로부터 작전 건의가
발광신호를 통해 들어(당시 히류는 계속된 회피기동으로 기함 아카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구축함이 이 신호를 중계해줌. 이 상황을 기억해두실 것)왔다. 현재 상태에서 즉시
출격해 미 함대에 공격을 개시하자는 것이었다. 즉, 육상용 폭탄으로 바꾼 상태라도 좋으
니 바로 공격해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TF 16의 참모장 브라우닝 대령의
생각과 매우 일치된다. 그러나, 나구모 제1 항공함대 사령관은 여기서 '운명의 결정'이라
는, 후일 대단한 논란이 되는 결단을 내린다. 도네의 정찰기 보고에 따라 아직은 미 항
모가 없을 것으로 가정하고 "2차 공격대에게 적 함대공격을 준비케 하고 아직 지상 폭격
용 폭장으로 교체 하지 않은 함재기에 대해서는 현 상태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2차 공격대의 폭장을 다시 함선 공격용으로 완비해서 제대로 된 전투기 호위를
붙여 어뢰와 철갑탄으로 정공법을 쓰겠다는 의도였다. 여태까지 호위전투기도 없이
날아온 미드웨이 기지 항공대의 공격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효과가 크게 떨
어질 지상폭격용 무장을 달고 무작정 공격에 나서는 것은 자칫 전력의 낭비가 될 수
있다는 우려와 현재 미항모의 위치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출격을 지시할
수도 없었기에 아직은 조금 더 시간여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히류의 야마구치 소장은
재차 출격을 건의했지만 나구모 제독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 함대의 함종
과 항로를 보고했던 도네 4호 정찰기가 두 번째 보고 후 11분이 지나서 8시 9분경에
또 한번 나구모 제독과 참모진의 머리를 싸매게 만드는 보고가 올라온다. 이 불길한
3번째 전문에는 "적 함대는 후방에 항공모함인듯한 1척을 동반하고 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참으로 감질 나는 정찰 보고가 아닐 수 없었다. 여전히 정확히 확신 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으로 미드웨이 주변에 미 항모함대가 전혀 없을 것이라는, 연합함대가
사전 제공한 정보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 버렸고, 이제 시간 상 미 함재기들의 습격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임이 명백해졌다. 정찰과 전황 보고의 상황에 입각해 나름대로 합리
적인 결정을 내기 위해 진력했던 나구모 제독과 기동부대 참모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피가 마르는 초조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미 전술했지만, 같은 시간 나구모
기동부대는 헨더슨 소령의 던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대와 B-17 중폭격기, 해병대의 빈디
케이터 급강하 폭격기들의 연이은 산발 공습을 회피하느라 귀중한 30분의 시간을 또
허비해야 했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2차 공격대를 출격시키지 못하고, 연료가 부족
해지고 곳곳에 손상을 입은 도모나가 1차 공격대를 착함 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미드웨이 기지 항공대의 공습은 아무런 전과도 내지 못했으나, 일본 기동부대의 원활한
항모 운영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구모 기동부대는 9시 15분 경, 1
차 공격대 수용을 마친 즉시, 항로를 바꿔 일제히 북쪽으로 항진을 시작했다. 이미 위
치가 미 해군에게 노출된 이상 예상되는 미함재기들의 공격을 회피함은 물론 미 항모
쪽으로 다가가 공격을 개시할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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