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 박용만 연보 (2011.01.14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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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작성일 11-01-24 13:59 조회 3,095 댓글 0본문
1881.07.02(고종 18 음력 윤달)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중리 109번지에서 출생
부친 박선병과 모친 김해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남, 본관은 밀성, 호는 又醒, 이명은 容弼
1893. 관립 일본어학교(서울소재)졸업,
1895. 일본유학시험에 합격 후, 숙부 박희병을 따라 도일 일본에서 중학교 졸업.
게이오의숙(경의의숙-일본소재)에서 2년간 정치학 공부.
숙부의 소개로 박영효 등의 개화파들과 교류, 활빈당에 가입.
1901.03 안국선, 오인영등과 함께 귀국후, '활빈당 사건'으로 피체, 투옥.
-숙부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석방. 출옥 후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며 전도활동.
1903.09. 상동청년회 多情국장으로 선임.
1904.09 상동청년회 통신국장으로 선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반대투쟁 중 피체, 2차 수감.- 이승만, 정순만 만남. (삼만의 유래)
출옥 후 숙부가 있는 평안남도 순천의 사립시무학교에서 제직 중 정한경, 유일한 등을 만남.
(국어, 일어, 산술, 중국고전 등 가르침.)
1905.02. 한일의정서, 러일전쟁 등의 사태를 보고 미국으로 망명.
(숙부 박장현과 상동감리교회 전덕기목사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출국)
1905.02.19 샌프란시스코 도착 - 이승만의 아들 태산. 정순만의 아들 양필 동반
봄 정한경,이희경 도착.
04.00 LA에서 신흥우 만남.
04.21 부친 박선병 사망
09.00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 북감리교회 연회에서 한인전도사로 임명되었으나
09.27 샌프란시스코에 삼촌 박장현 도착.- 이종희, 유일한 이관수 동반.
박장현, 안정수와 함께 미 동부 네브라스카주 커니시로 떠남.
가을 숙부 박장현이 네브라스카주 소재 유니온 퍼시픽 철도회사의 추전서를 가져와서
커니시 철도회사에서 한인들을 네브라스카에 취업 시킴(김병희,조진찬, 권종호, 정영기 등)
이종희, 이희경, 김용대 등을 링컨시의 학교에 입학시킴.
1906 초 숙부 박장현과 함께 콜라라도주 덴버로 옮김
- 해외동포들을 위한 여관과 직업주선소 운영
콜로라도 예비학교 입학, 유학생회를 조직하여 청년유학생을 규합(최초의 미주유학생회)
1907.06.10 숙부 박장현 덴버에서 위암으로 사망. (1871~1907)
06.25 제2차 만국평화회의 밀사들을 지원하고자 윤병구와 송헌주를 헤이그로 파견
1908.01.00 덴버근처의 한인 유지들과 논의하여 해외동포대표회의 개최 결의.
05.00 박처후, 임동식, 정한경 등과 함께 애국동지대표자회의 준비사항 점검과
한인청년 군사양성기관 설립을 계획,
07.11 <북미 대한인 애국동지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한인군사학교 설립안을 제출, 통과시킴.
(7월 11일~14일까지 4일간)
08.00 덴버 여관을 윤병구에게 넘긴 후
09.00 네브라스카주 링컨시의 네브라스카 주립대학 정치학과에 입학. 장교후보교육을 받음.
10.23 하와이 합성협회와 미주 공립협회의 통합을 위한 합동발기문 기초(11.30-발표)
겨울 박처후 임동식을 만나 한인군사학교 설립 논의-박처후․임동식은 군사학교 부지 및 숙소,
그리고 군용총 마련. 박용만과 정한경은 주정부와 커니지방청과 교섭하여
12.00 한인소년병학교 네브라스카주정부의 승인을 받음.
1909.02.01 대한인국민회 창립(한인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 합병)
06.00 네브라스카 커니농장에서 한인소년병학교(Military School for Korea Touth) 설립
- 농장에서 일하면서 군사훈련을 하는 둔전병제 군사학교
09.00 링컨시 'P'가 1724번지 2층 주택을 임대하여 한인학생기숙사 - 학생지도
1910.04.01 헤이스팅스 대학과 교섭 후, 그 학교 건물 1개 동을 임대하여 한인소년병학교 이전
06.00 한인소년병학교 개교, 2개월간 소년병학교 재정모금차 캘리포니아 순회.
-최정익과 만나 신한민보 주필직 수락.
08.25 헤이스팅스로 돌아 옴. 소년병학교는 그 후 6년간 운영되다가 일제의 항의 등 압력과 인력 및 재정부족으로
1914년 8월8일 졸업생 배츨 후 사실상 폐교.
1911.02.08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 4대 주필로 취임. (217호~252호까지)
대한인국민회를 해외한인의 통일기관인 임시정부로 만들고자 노력
03.00 중국 광둥의 김복(본명 김규흥)이 국민회로 서신을 보내 개간공사(開墾公司) 설립 후 만주 등지에 토지를
매입하여 둔전병제에 입각한 황무지 개간 제안.
03.08 신한민보 논설을 통해 해외 한인을 통일, 결속하기 하여 무형국가나 가정부로 만들고자 임시정부 조직론인
'무형국가론'을 주창.
<조선민족의 기회가 오늘이냐 내일이냐>1911.3.8
<조선 독립을 회복하기 위햐여 무형한 국가를 먼저 설립할 일>1911.4.11
<정치적 조직의 계획>1911.5.17 등 다수의 논문
- 그로인해 헌법개정안 기초위원으로 선출된 후, 결성포고문을 기초함.
< 이러한 그의 노력은 1911~1912년 사이 국민회 조직은 시베리아에서 만주지방 등에 16개의 지방회가 건설될 정도로
확산되었으며, 그의 임시정부조직론에 힘입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의 유일한 조직체로 성장함.>
04.00 신한민보에서 <국민개병설> 간행.
-이 책은 원래 <독립>이라는 신문에 10회 연재되었던 기고문을 모은 것이다.
06.00 샌프란시스코를 떠남, 주필업무는 후임자 취임 때까지 맡기로 하고 편비사무는 ‘강번‘을 초빙
07.00 <군인수지>저술 출간.
08.00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발족
08.19 소년병학교 첫 졸업생 13명 배출 -1914년 폐교 때까지 백여 명의 사관생도를 배출했다.
09.00 대한인국민회 헌장 초안을 작성하여 중앙총회에 방문․ 제출하고 주필 사임.
10.00 멕시코한인의 하와이 이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출발.
11.00 워싱턴 상공국과 교섭, 실패
11.23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의회 리버사이드에서 개회-대한인국민회 헌장 20개 조항 의결 (11.23-12.04)
12.27 워싱턴에 체재하던 박용만 시카고 환착.
1912.08.09 네브라스카 주립대학 정치학과 졸업
09.16 한인소년병학교 2회 졸업식(이승만 연설)-졸업생 13人,
09.30 이승만에게 서신 보냄-하와이교민들의 초대에 대한 갈등
10.02 이승만에게 서신 보냄-하와이행 일정과 서박사에 대한 내용.
10.10 손정도에게 서신 보냄-만주식민책 관심표명. 지질,지가,장소 등의 정보 요구(1915년 귀국의사 밝힘)
11.08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총회장 선출,
11.13 이승만에게 서신 보냄-하와이행에 대한 일정 문의
11.20 해외 한인의 최고 통일기관인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결성 포고문 반포.-선포문 기초작성
박상하로 부터 <신한국보> 주필로 초빙.
12.02 박상하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도착
12.09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헌장수정위원과 외교원으로 선임.
1913.01.27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자치규정 발표하여 국민의무금 제도 확립.
02.03 이승만 하와이에 도착.
05.09 하와이 주정부로부터 하와이지방총회 관인허가를 받아 특별경찰권 승인-한인자치제 확립.
<이는 해외 한인을 일제의 지배하에 두려는 일본정부의 간섭을 배제하여 망명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 >
08.01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발간하던 ‘신한국보’의 주필을 맡아 ‘국민보’(The Korean National Herald)로 개칭
10.19 이용화, 이일, 이원 3人 하와이 상륙 (1914년 7월 이용화 출국)
12.06 일군함 출운호 호놀룰루 내착(12월 9일 멕시코로 출항)
12.00 국민군단과 사관학교 설립 합의-Nauuanu YMCA에서 한인지도자급 인사들과의 회합.
1914.06.25 <아메리카 혁명사>출간
08.19 대조선 국민군단 창단 낙성식 (하와이 오하후섬 가할루지방)-국민회 도움.
08.29 대조선 국민군단 사관학교 낙성식 (29~30 이틀간) 교민 600여명 참석
예산-7만8천달러, 103명 입교(전성기때 331명),
목총사용.'산너머 아이들' '우리독립군'으로 불림.
1200에이커의 파인애플농장의 조지를 맡은 박종수의 도움을 받음
농장에서 기숙, 병영을 만들고 낮에는 10시간의 농장일을 하고, 밤에 훈련.
당시 한인사회에선 이들의 군대식체조가 유행.
1915.01.00 하와이 지방총회 회장 김종학 취임-하와이 분쟁이 발생하여 이승만이 하와이 장악
국민회 회장 김종학의 자살미수
-국민회 자금문제로 이승만이 고소,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자살시도.
이승만의 하와이 지방총회 장악, 박용만계열 대의원 구타 등, 음해와 테러공작
-이로인해 하와이 정부로 부터 특별경찰권 취소당함.-하와이 한인사회 자치권 상실
02.05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 당선(회장-안창호) .
06.11 중앙총회 부회장 취임식 참석차 샌프란시스코 도착
07.07 이승만의 공개 서신- 옥중동지를 잊지 않고 있다. 누구편이 될지 선택하라
07.12 오진국의 테러 - 이승만측의 선전물을 본 오진국이 박용만을 찾아와 부회장 자리를 내놓으라는
주장과 폭행으로 다리 부상. (그 후에 9월28일 하와이로 돌아가는 배에서 자살.)
08.11 호놀룰루로 출발
08.15 총회장 안창호는 하와이분규 중재위해 하와이로 출발-사전에 이박사에게 전보했으나 거절당함.
10.00 대조선국민군단 kahuku지역으로 이전
후반 中國 安東縣의 백세빈(동제사 관련인물)에게 서신 보냄.
1916.02.07 안동의 知友(백세빈 추정)에게 서신-간도 인민을 개도하기 위해 3개 위원파견 계획과 국내,상해,서북간도
기관이 일제에 발각되지 않게 부탁.
05.00 국민회에서 하와이에 중앙총회를 설립하고 상하이를 활동근거지로 삼은 후 중국과 교섭을 통해
독립전쟁을 준비할 것을 거론함.
06.12 국민보 주필 재임 (국민보 임원회 가결) -한인사회 통합을 위해 수락.
10.00 국민군단 실질적 폐교 -
- 국민군단의 계약기간 만료, 또한, 농장의 토질이 안 좋아서 농장문을 닫게 되었음,
- 카후쿠(kahuku)농장으로 이전.
- 기부금과 노선문제로 이승만과의 대립 심화 이유.
10.00 봉천성 유하현의 양기탁이 박용만에게 ‘시급 긴요’한 일로 미국․하와이에서 상하이․서북간도․러시아 등지에
윤회통신을 발송하여 하와이와 상하이의 김규식 처소를 최종 거점으로 할 것을 당부.
1917.07.14 상하이에서 대동단결선언 발표-박용만 등 14人의 발기인 서명
10.29 뉴욕세계약소민족대표회의 한국대표로 참석.(10.29~31)
1918.01.05 이승만측의 재정흠축 드러남 - 하와이 대의회 분쟁 시발.
02.00 일본군함 출운호 사건으로 스파이로 몰려 법정에 나감.
-이승만은 박용만이 미국영토 내에 군조직을 설립해 일본 군함인 출운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 한다며 이는 미.일관계를 악화시키고 국제평화를 저해하려는 음모이므로
미국 내에서 그의 군사활동을 금지시켜야한다고 요청하는 등 법정에서 증언까지 함.
후에, 이승만은 다만 농담이었다고 함, 당시 신한민보 (1918.6.27)
03.14 이승만의 선언
06.11 「시국소감」발표-이승만의 죄상 공박
07.01 하와이국민회 임시중앙연합회, 일명<갈리회 연합회> 이승만에게 장악된 국민보 대신 연합회보 발행
11.28 호놀룰루에서 주간지 <태평양시사>(The Korean Pacific Times) 창간, 주필역임.
1919.02.00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음력 1918년 12월(일명 무오독립선언서)
03.03 호놀룰루에서 대조선독립단을 조직.-국내, 연해주 만주,중국의 구국단체와 제휴.
태평양시사를 인수, 기관지로 함.(31일-선포식 거행)
04.13 상해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임명
04.23 한성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임명
05.19 미군함 토마스호를 타고 호놀룰루 출발 시베리아로 향함.
06.00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 한상량(韓相良)으로 변명, 미 시베리아 원정군사령부를 방문, 정보 제공.
08.말 <대한국민군>창설- 총참모 박용만, 총사령 조성환, 총사령부 블라디보스토크
09.00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피선되나 취임 거부, 이동휘 등을 만나 국민군 확대방안 강구.
11.00 김규흥 등과 중국 진형명 등이 한중 합작으로 <흥국실업은행>발기
1920.02.00 大朝鮮國民軍 布告文 과 大朝鮮國民軍團의 各道各郡國民軍排置計劃表.
03.10 대동단 <갹금권고문>발표 - 총부 무정부장으로 임명.
03.29 상해 도착하여
04.03 만찬회에서 안창호에게 외무총작직 사의 표명후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향함.
04.17 군사통일비주회 결성 - 삼패자화원
04.19 <군사통일회의>로 명칭 확정.
임시정부에서 의원면직
05.00 문창범,신채호,유동렬,김동학 등과 북경을 떠나 포그라니치나야에 도착 (14人) 국민군 조직 활동
07.00 북경과 천진에서 공산주의 선전에 힘 쏟던 극동공화국 전권위원 유린과 회합
09.00 <군사통일촉성회>조직-박용만, 신숙, 신채호, 이회영, 배달무, 김대지, 김갑. 장건상, 남공선 등 15인
12.00 특사 한알렉산드리아와 김하석을 니콜스크로 파견.
연말 치타에 설치된 중로연합선전부(中露聯合宣傳部) 부부장으로 임명
1921.02.22 하바로프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의장 문창범과 이동휘, 김립, 신채호, 김와실리, 조성환, 정데파니,
김하석, 김진무 등 노령각지 대표 100여명과 회합- 하바로프스크에 한족 공산당을 설치,
니콜라예프스크에 있는 한인빨치산을 규합하여 여름에 간도로 남하 계획.
03.21 러시아 공산주의자 극동위원과 함께 북경으로 귀환.
04.17 군사통일회의 -국민회(박용만)․대한광복단(權敬止)․조선청년단(李光東․李章浩)․노동당(金甲)․
통일당(신숙․黃學秀․申達模), 하와이의 대조선국민군단(金天浩․朴承善․金世晙)․대조선독립단
(權承根․金鉉九․朴健秉), 북간도의 대한국민회(姜九禹), 서간도의 서로군정서(成駿用․宋虎)․
광한단(洪南杓·魚秀甲),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南公善) 등 11개 단체, 17인 참석.
- 이 회의에서 군사단체 통일과 군사상 총기관 설립 결의, 이외에도 임시정부 불신임과 이승만의 대미위임통치청원사건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조선공화국임시정부 수립을 천명.
04.00 <제2보합단> 조직-단장 박용만, 부단장 강향태, 비서 서일보,내임장 신채호, 재임장 김창숙,
군임장 노백린, 사령관 김좌진…..조성환 등
05.20 군사통일회의 대표 <박용만 선언서>-상해 임정과 임시의정원 승인반대를 통고, 이승만 성토.
06.17 5월12일 역시 국민대표회의를 제기한 안창호와 만나 국민대표회의 개최문제 논의.
07.19 <대동>제 4호 발간, 박용만등에 의해 발간-군사통일회의 논설, 선전서 등 게재
09.21 중국여인 熊素靑과 혼인-신채호등 8~9명과 중국인 다수 참석
10.06 제2회 국민대표회의 개최
11.00 북경에서 조선공화정부를 조직하고 교통총장에 추대되었으나, 수립되지 못함.
1922. 봄 훈하유역에 땅을 빌려 벼농사 시작.
04.17 안창호․이동휘․유동열․노백린 등과 국민대회 개최 협의.(4.17~5.3)
04.00 중국군벌 오패부를 만남-자신에게 병기와 군자금을 제공하면 동삼성의 한인을 무장시켜 봉천군을
배후에서공격하여 장작림을 전멸시키겠다고 함
08.10 革新公報 창간- 1923년 5월 주필 박용만
11.04 흥화실업은행 창립(흥국은행 개칭)-박용만, 김규흥, 이회영, 김창숙, 신채호 등
-자금을 모아 토지를 매입하여 독립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함.
겨울 북경 인근 석경산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흥회실업은행 총동사였던 김규흥의 보증으로 2.500원 융자
1923.01.03 국민대표회의에 참여-군시통일회의에서는 신숙, 박건병,깁갑, 강구우 등이 참석하였으나 김갑을
제외하고는 모두 창조파(박용만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음)
05.00 석경산에 있으면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황학수를 만주로 보냄.
08.14 부하인 김현구의 권총자살 사건으로 중국 경찰에 억류(15일 석방)
12.20 총독부와 협의 후, 북경 출발-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국민위원회 참가이유로 출발
(북경-상해-나가사키를 경유 서울로 향함.)
1924.01.00 국내 밀입국
01.23 하얼빈 도착,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위원회에 전보를 보내 출발계획 알림.
01.14 국민이원회 전보 받음-포그라니치니야로 가서 공산당대표 기세르요노프와 회견할 것을 요청
(기존 이동휘계열의 '고려공산당'외의 새로운 조직을 결성해 이를 코민테른에게 인정받기 위한 포석으로 짐작됨.)
01.15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
01.28 국민회의 개최 (1.28~2.5)-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을 대신하여 <한국독립당>결성
을 의결-비서장 선출. But,한국독립당은 고려공산당의 반발로 인하여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어
추방시킴으로 인해 허사가 됨.
02.18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하얼빈 도착.
02.22 국민위원회 제1회 회의에서 <한국독립당>조직 결정, 비서장 임명.
06.00 박용만이 장춘의 일본영사와 면회하였다는 소문이 퍼짐
08.00 석경산 농장 - 권상수,권성근,박학래 등이 함께 거주 경영하면서, 북경의 박건병, 김규흥, 김강,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 출신 박영선 등과 교류하며 군자금 모집과 기지건설에 대한 노력.
09.00 <국민위원회>에서 박용만 제명, 비서장직 박탈-적의 양해를 받아 국내를 출입한 이유.
말 풍옥상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잠입
1925. 봄 장가구에서 안창호․문창범과 더불어 영주토착지 開拓 計劃,
-자금모집을 목적으로 저축회사 설립 협의.안창호10만엔, 박용만 20만엔, 문창범 30만엔 목표
07.08 호놀룰루에서 태평양연안 국제신문기자대회(7/1~7/15) 한국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하와이 도착
-자금 구하기 위함
07.12 독립단 주최-팔라마 극장에서 박용만 환영 연설회-300여명 참석
08.00 <대조선독립단 단강>발표
12.00 하와이주둔 군사령부에 보고서제출
<레포트 no.1: 일본과 러시아에 의하여 중국영토에서 준비되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대전>
- 「러시아의 중국정책」, 「중국에서의 일본의 활동」, 「중국의 현황」 등에 관해 분석
12.24 대조선독립단장 김윤배와 서기 이상호는 하와이지구 미군사령관에게 진정서 제출
-박용만과 미국무부나 육군부의 고위관리와의 회담 청원.
1926.04.20 독립단의 2차 청원서 제출-박용만과 미군고위부와의 회담은 미국에 이익이 될 것.
06.26 중국이름 <한상량>으로 된 여권을 가지고 북경행 여객선 승선.
07.00 북경으로 귀환
후반 북경에 대본공사 설립 (독립운동기지 목적)
1927.04.02 호놀룰루 팔라마지방에 우성학교 설립 직접 국어교과서를 편찬, 교재로 사용.
05.01 조선말 독본 첫책 발행 - 발행처/북경 독립단지부,하와이 독립단총부
06.01 조선말 독본 둘째책 발행 - 발행처/북경 독립단지부,하와이 독립단총부
06.04 <대한북여요선, 대동고대사론.제창아조선독립문화지일이어(提倡我朝鮮文化之一二語)> 편찬.
대조선독립단 중국 북경지부(석판인쇄)
07.00 前門外 西河沿에 대륙농간공사를 설립하여 永定河岸의 토지를 開墾하는 계획.
1928.10.00 중국국민군 군장 여장들과 협상하여, 군사학교 부지를 확보하고 염석산에게 인허를 얻기 위해
청원서 작성해 놓음.
10.17 북경자택으로 독립자금 一千원을 청하러 찾아온 이해명에게 피살됨.
1962 건국훈장 단장
1995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처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원문보기▶ 글쓴이 : 한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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