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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친일의 길을 기꺼이 간 여성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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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378회 작성일 11-01-2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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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출범과 더불어 탄생한 것이 근우회였다. 근우회는 '김활란' 등이 중심이 되어 여성계의 민족 유일당으로 조직되었고,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와 새 생활 개선을 행동 강령으로 하였다."(고교 국사 교과서 하권 165쪽)
고등학교 교과서의 김활란에 대한 서술이다. 1920년대 민족 유일당으로서 국내 민족 운동의 중심에 있던 신간회의 여성 자매 단체로서 여성계의 민족 유일당이라는 근우회, 그리고 그 근우회의 중심 인물이 바로 김활란이었으니, 김활란은 일제 강점기 여성계의 대표적 민족 운동가가 되는 셈이다.(실제는 김활란은 근우회 활동을 1928년 중단하였다.)
10년 전쯤엔가 입만 벌리면 민족의 대학을 운운하는 모대학에서 인촌(김성수)상이라는 것을 제정하더니, 얼마전에는 그를 흉내 낸 것인지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자대학에서 '김활란상'이란 것을 제정하여 여성 운동에 헌신한 여자들에게 이 상을 주겠다고 나섰다. 해방된지 반세기가 넘었다고 해서 이제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상을 막 주어도 된다는 것인가? 내노라하는 이 시대의 지성들이 아무런 질책없이 넘쭉 이런 상들을 받아 먹어도 되는 것인가.
근대 한국 여성의 대표적 인물, 여성 박사 1호,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 교장, YMCA 창립자, 해방후 이화여대 총장' 1970년 사망한 이후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 받은 여성. 이처럼 교육계, 여성계에서 그가 누린 명성과 지위는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는 그가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친일 행각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한때 민족 운동과 여성 운동에서의 그의 공헌을 인정하고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그에 찬사를 보낸다해도 그것이 일제 말기 그가 벌인 친일 행각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공을 세운 것도 있으니 잠깐 마지 못해 잘못을 한 것 쯤은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할 수도 있다.그렇다면 도둑질을 하고 강도짓을 해가지고 그 중 일부를 불우 이웃돕기에 쓴다면 그 죄가 없어진다고 우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의 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수단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의식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한때 친일을 했지만 그전에는 민족 운동도 했고, 해방이 되었는데 그런 것 자꾸 따져서 무엇하러 분란을 일으키려 하는가. 또 해방 후에 국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두환처럼 광주에서 사람을 많이 죽이고도 권력만 잡으면 되는 것인가.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희생시켜도 좋은 것인가. 수출을 많이 하기만 하면 환경을 오염시키고, 외국 노동자들을 데려다가 비인간적 대우를 해도 되는 것인가. 우리 민족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베트남에 가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해도 되는 것인가. 과거 일본놈들이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켜 준다는 명분으로 식민 수탈하면서 대동아 공영권을 부르짖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위의 첨부파일은 김활란의 친일 행각에 대하여 "친일파 99인-2(돌베게)"에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는 글의 내용 일부를 간추려 올린 것입니다.



김활란의 친일 행각

  (전략) 이러한 가운데 지식층이 일제에게 굴복하여 반민족적 행위에 나서는 데는 각각의 계기가 있었다. 기독교계 학교에 속한 인물들은 신사참배 등의 문제로 일제와 선교사들의 입장이 배치되었을 때, 폐교를 무릅쓰고, 일제의 정책에 반기를 들 것인가, 아니면 묵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할 순간을 맞이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교파마다 학교마다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북장로교계에서는 학교 폐쇄를 불사하였고,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 대부분과 광주 수피아고등여학교, 숭일중학교 등은 폐교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김활란이 몸담고 있던 이화여전은 일제의 요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결국 일제의 요구에 이리저리 끌려다닌 대표적인 이가 바로 김활란이다.

  그가 저지른 친일 행각은 교장직을 맡았을 때인 1939년 4월 이후부터가 아니라, 교장직을 조만간 맡을 가능성을 엿보였던 1936년 말부터 나타난다. 즉, 1936년 부교장으로서 그는 총독부 사회 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 교화 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 교화 간담회에 참석하였고, 1937년 1월 황민화 정책을 철저히 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방송에도 참가하였다.

  (중략)1938년 3월 칙령으로 내선일체화란 이름하에 조선 교육령이 개정되어 사학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수업 중 조선어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학생들은 군수 공장에 근로 동원되고, 교과 과정에서도 우리 문화나 전통에 관한 것은 말살되어 갔다. 그건 가운데 김활란은 1938년 6월 20일 이화 여전과 이화 보육의 400명 처녀들로 '총후 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한편, 기독교 여성 단체 중 가장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였던 조선 YMCA가 1938년 6월 8일 일본 YMCA에 가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그는 그날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 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이지 않으면 안 되겠으므로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의 활동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 금번 '제네바 동맹'을 탈퇴....기독교여자청년회 일본 동맹에 가담하게 되었다"라는 발표를 하고 있었다. 1941년경에 가면 결국 활동이 중지될 것을, 이토록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단체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있었다. 이때 지방 YMCA에서 활약하던 인물 중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하여 사회적 지위에 초연한 태도를 취한 여성들도 있었다. 조선 YMCA를 탄생시킨 김필례가 바로 그러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중략)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 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여기에 친일 여성 단체를 만들고 여성 명사들을 동원하는 등 여성들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김활란은 인전대책협력회 위원, 조선인전보국단 부인회 지도원, 국민총력 조선연맹 평의원,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조선 언론 보국회 이사 등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직을 맡았다. 그리고 여성 대중에게는 노력 동원, 가정의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였다.

  그는 1941년 말 야마기 카쓰란으로 창씨하였다. 그리고 부인 궐기 촉구 강연, 결전 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 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국신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 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 동생으로서' 징병, 징용, 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군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일본)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 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들이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그는 후에 자선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에서 일제 때 가장 안타깝고 분하게 여겼던 일 중의 하나가 1943년 말 전시비상조치방책으로 이화전문학교가 농촌지도원 연성소가 된 것을 꼽고 있다. 이것은 사실 그가 친일행각을 중단할 계기가 될 수도 있엇다. 그러나 이 때도 이렇게 말하였다.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 기관으로 새로이 출발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의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12.25)

  이화전문학교가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 연성과로 바뀌어, 기본 학생들에게는 3개월간의 교육을, 신입생에게는 1년간의 교육을 시켜 전조선에 설치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로 배치하여 농촌 여성을 계몽한다는 일제의 방침대로 되자, 1944년 이화여전 학생모집에는 150명 모집에 40명밖에 지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재학생들도 격감하였다. 그리고 제자와 후배들은 그를 외면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래도 그는 그냥 있었다. 아무리 자기 본심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이미 공인으로서의 행동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공인으로서의 책임있는 행동보다는 껍데기뿐인 이화를 잡고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일관했을 뿐이었다. 그가 조선 민족을 향해 내뱉은 그 숱한 반민족적 연설, 글, 방송을 어떻게 주워 담을 것인가.

  이러한 친일적 지식인 여성들의 활동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과거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던 까닭에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투쟁은커녕 안면몰수한 친일 행위는 민중에게 분노와 실망만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패배주의를 낳게 했다. 김활란과 같이 교육계에 있었던, 특히 서울의 여학교 교장들 - 황신덕, 송금선, 이숙종, 신봉조, 조동식, 배상명-은 약속이나 한 듯 같은 길을 갔다. 교육계에 종사한 이들의 친일 행위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그저 보고 따르는 스승이었기에 악영향은 상대적으로 더욱 큰 것이었다.

(후략)


출처: 미래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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