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친일파 양성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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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의 글입니다. <민족 사랑> 4월호에서 옮겼습니다.
<일제가 조선 지배를 위해 내세운 두 가지 정책 >
일본 제국주의가 1910년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강제 병합했지만, 조선을 안정적인 식민지로 확보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는 무엇보다도 조선인의 강력한 독립의식과 투쟁 때문이었지만,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먼저 조선은 오랫동안 일본에 문화를 전달해 준 문화 선진국이었다는 점이다. 문화적으로 일본보다 앞서 있었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함께 수치로 다가왔다. 조선인들이 일제의 힘 앞에서 억지로 무릎을 꿇었을망정 일본인을 언제나 '왜놈' '쪽발이'라고 업신여기는 의식이 심연에 자리잡고 있는 한, 일제의 조선 지배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또 영토, 인구 등에서 일본의 그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은 조선을 일제가 무력으로 언제까지나 억압하기란 한계가 있었다.
이에 일제는 한편으로는 폭력을 앞세운 공포정치를 자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조선인을 마음 속으로부터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도록 만들고자 두 가지 방향에서 공작을 추진했다. 하나는 일제의 조선 강점을 정당화하기 위한 지속적인 이데올로기 공작과, 또 하나는 조선인 내부로부터 일제의 식민 통치를 찬양, 협력하는 친일파의 조직적인 육성이었다.
<일제 침략 이데올로기와 친일파의 육성 >
일제의 이데올로기 조작은 시기에 따라 내세우는 주장이나 논리는 차이가 있었지만 크게 보면 대개 이런 것이었다. 조선은 반도라는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없으며, 언제나 대륙 또는 해양 세력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반도 숙명론). 만일 대륙이나 해양 세력이 혼란에 빠져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때에는 조선 사회는 고여있는 물처럼 정체되어 왔다고 주장했다(정체론). 또 조선인은 본디 열등하며 큰 나라에 의존하는 습성이 있으며(사대주의성), 단결력이 없어 분열을 일삼아 '이씨조선'은 당쟁을 거듭해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다고 우겼다(당파성론, 당쟁망국론). 이러한 내용을 조선인들에게 심어주어 조선인의 열등감을 내면화시키려 했다.
이와 함께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미개한 조선인(조선사회)을 문명개화시키려는 시혜의 소산이라고 주장했다(문명개화론).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고 낙후한 조선 사회를 개발하는 것은 주위의 강대국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며, 이는 동양 평화를 위해, 좁게는 조선 사회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것이니, 한일 양국에 모두 도움이 된다고 억지주장을 내세웠다(동양평화론). 나아가 이런 일본의 '호의'는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으니 곧 일본과 조선은 본디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따라서 일본 '천황께옵서' 조선인이나 일본인을 모두 어여삐 여겨(일시동인:一視同仁) 진정한 내선일체의 완성을 향해 진력하고 있으며(일선융화론, 내선일체론), 이를 위한 과정적인 노력이 곧 동화주의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문제는 일제가 볼 때 이러한 기만적인 조선 통치 이데올로기를 조선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일제는 이런 정책을 조선인들이 대행케 하기 위해 조선의 유력자들, 즉 지식인, 관료, 주요 조선인 단체의 간부 등을 포섭해 이들이 이러한 조선 통치 이데올로기를 조선인들 사이에 찬양·보급케 했다. 즉 친일파를 조직적으로 양성해 이들이 일제 식민통치를 찬양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 한 것이었다.
일제의 친일파 육성정책은 식민 통치의 기능면에서 보자면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선총독부와 소속 관서 그리고 군, 경찰기구 등 직접적인 통치기구에 조선인을 일정하게 참여시키는 방식이었다. 조선인도 출세할 수 있다, 동등하게 기회를 준다는 기만성을 퍼뜨리면서 대민 통치를 보다 효과적으로 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둘째, 동양척식회사, 금융조합, 수리조합 등 각종 대민 수탈기구에 조선인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무엇보다 식민지 수탈에 있는만큼 일제는 민족적 억압의 형태로 폭력을 동반한 형태로 이들 기구를 통해 수탈을 자행했고, 수탈의 대행자로 친일파들을 앞장 세웠다.
셋째, 일진회, 국민총력연맹, 협화회, 임전보국단 등 일제의 식민통치를 보조하고 협력하는 각종 관제, 민간 친일기구를 들 수 있다. 이런 단체는 정치활동, 이데올로기 영역, 기타 전시 동원기구로서 사회의 전 분야를 그물망으로 엮어 대민 통제와 감시체제, 나아가 일제에 조선인을 동화 협력시키는 부일단체로 악명을 떨쳤다.
이른바 조선의 문명개화론과 동화주의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앞의 것이 조선인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마취제의 기능을 담당했다면, 친일파는 일제의 다양한 지배와 통치를 보조하거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보급을 대행함으로써 조선사회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마약 중개상'의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그러면 시기별로 일제는 자신의 정책 목표에 맞추어 친일파를 어떻게 육성하려고 했는가?
<1910년 이전 일제의 침략논리와 친일파 육성 >
일본은 이미 1860년대이래 정한론(征韓論)을 들고 나와 한반도 정복을 꿈꾼 이래, 청, 러시아, 기타 서구 열강과 경쟁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논리를 동원했다. 1884년 일본이 후견이 된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의 한반도 침략논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의 탈아론(脫亞論)과 다루이(樽井 吉)의 흥아론(興亞論)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1885년 등장한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일본은 청과 조선과 같은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고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하자는 논리였다. 청과 조선은 일본을 맹주로 그 지도 아래 문명화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청과 조선에 대해 무력 침공도 불사해야 한다는 침략론이었다.
비슷한 시기 다루이는 흥아론을 내세웠다. 다루이의 흥아론은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인종주의적 의식을 깔고 있는데, 백인의 침략에 동양이 단결해서 막아내야 하고, 일본과 조선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을 건설하고 이 대동국과 청이 연대해야 한다고 했다. 이 사상은 일본 우익의 '아시아주의'의 뿌리가 되고, 조·중·일 '삼국공영론'이나 '한일합방론' 그리고 '대동아성전(大東亞聖戰)도 이 논리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1905년 이전 일본은 조선의 관료, 각종 단체 등에 친일파를 부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나, 대체로 이 시기까지는 친일파를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투자기간이자 인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성격이 짙었다. 조선의 정치인들이나 식자층에서 친일파가 적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 친일파란 친미파, 친러파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 독립에 어떤 나라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 하는 정치적 선택이란 각도에서 일본과 친연성을 가진 부류도 있었고, 일신의 영달을 위한 기회주의자들도 있어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을 배경으로 한 '삼국공영론' 등을 수용하면서, 이미 반민족적 의미를 띠는 '친일'적 사고가 조선의 식자층 가운데 상당히 침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러·일전쟁기에 다가가면서 이용구의 일진회와 같은, 정치적으로도 완전한 친일파로 변신하는 집단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통감부'시기 친일파에는 크게 세 부류의 집단이 있었다.
첫째, 일진회(一進會)와 같은 적극적인 친일단체로, 일본의 군부와 우익단체들의 조종과 원조에 의해 활동하였다. 일본 정부는 '한일합방' 같은 것을 일진회가 청원하는 방식으로 교묘히 움직여 한일합방을 일본이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처럼 이용했다.
둘째,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이완용(李完用), 조중응(趙重應)과 같은 고관들로, 이토오와 통감부 당국에서 직접적으로 이들을 원조하고 이용하였다. 또 일제는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갑신정변·갑오개혁 관련자들을 귀국시켜 친일파로 이용하였으며, 때로는 일진회세력과 경쟁시켜 실효를 거두기도 했다.
셋째, 계몽운동에 참여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는 적극적인 합방론이 반일운동을 격앙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 합방에 소극적인 인사들을 내세워 일본유학생이나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동양평화론, 삼국연대론 등을 유포시켰다. 그 결과 계몽운동 참여자의 많은 수가 일제침략에 간접적인 동조세력이 되어 동양평화와 문명개화를 주장하면서 '한·일합방'을 방조했다. 일본인 고문 오카끼(大垣丈夫)의 지도를 받은 대한자강회나 대한협회를 들 수 있다.
<1910년대 일제의 친일파 육성 >
1910년을 전후해 일제는 친일, 비친일을 막론하고 조선인 단체를 모두 해체하고 조선총독부를 정점으로 친일파를 재조직하려 했다. 그 대상은 크게 세 부류였다.
첫째, 조선 왕실을 친일세력의 정점에 두었다. 일제는 순종(純宗)을 비롯한 왕족들이 민중의 반일적인 저항을 막아내는 데는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판단, 일본 궁내부 대신이 조선 왕실을 관리하면서 일정한 예산을 지급해 왕실을 방패막이로 끌여들었다.
둘째, 일제는 '조선귀족령'을 제정해 이왕직에서 제외되었던 왕족, '합방'에 공이 있던 한말의 고급관료를 대상으로 해당자에게 작위를 주었다. 박영효(朴泳孝), 이재각(李載覺), 윤덕영(尹德榮) 등의 후작(6명)을 비롯하여 백작 3명, 자작 21명, 남작 45명 등이었다.
셋째, 일제는 조선인들을 직접적으로 총독부의 관료로도 임용하였다. 조선총독의 자문기구라는 중추원(中樞院)에는 부의장(1911년 김윤식)과 고문(이완용을 비롯한 14명) 등에는 귀족들을, 그 아래의 찬의(20명), 부찬의(35명)에는 한말의 중급관료 출신들을 임명하였다. 또한 4명의 도 장관과 각 도의 참여관(參與官) 13명을 비롯하여, 6∼7명의 경시(警視), 재판소의 판사 등에도 한국인을 임명하였다. 1910년대 초반에 전국의 모든 군의 군수도 한국인이었다. 총독부의 행정을 지방 단위에서 실현 지배하는 기구에 조선인을 참여시켜 친일파를 육성한 것이다.
넷째, 일제는 유생층을 회유하는 방편으로 '천황' 명의로 25만원을 지급해 경학원(經學院)을 설치했다. 유교에서 강조하던 조상숭배, 스승공경의 습관을 통하여 식민통치=천황에 순응하는 충량한 '신민(臣民)'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경학원의 강사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여 민풍개량, 근검저축의 장려 등을 강조하기도 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총독부의 신정(新政)을 선전하였다.
그 외 문명개화론, 부원(富源)개발론 등과 직접 연관이 있던 지주와 자본가들도 보호·육성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종래 대한제국의 고급관료층, 총독부의 군수들이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지방에 발달하였던 금융업(이른바 민족은행, 금융조합, 농공은행 등)의 주주들이었다.
<192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책과 친일파 육성 >
3.1민족해방운동 이후 일제는 경술국치 때 이용한 친일파만으로는 식민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친일세력을 보다 확대 양성하여 식민 통치에 이용하고자 했다. 사이토 총독은 1920년 '조선 민족 운동에 대한 대책'에서 다음과 같이 친일파 양성책을 구상하였다.
1. 친일 인물을 물색하고 이들을 귀족, 양반, 유생, 부호, 실업가, 종교가들에게 침투시켜 친일단체를 만든다.
2. 각종 종교단체에서 친일파가 최고 지도자가 되게 하고 일본인을 고문으로 앉혀 어용 화 한다.
3. 친일 지식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수재 교육의 이름 아래 친일 지식인을 장기 적 안목에서 대량으로 양성한다.
4. 양반 유생으로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 방도를 만들어 주고 이들을 선전과 민정 정 찰에 이용한다.
5. 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쟁의, 소작쟁의를 통해 노동자, 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고 그들을 일본 자본과 연결해 매판화시켜 일본측에 끌어들인다.
6. 농민을 통제, 조종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단체 교풍회, 진흥회를 만들어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 주는 한편 수목 채취권을 주어 회유, 이용한다.
사이토 총독의 친일파 양성안은 그대로 실현되어 대동동지회, 교풍회, 국민협회 등 각종 친일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들 단체는 친일 여론을 만들고,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이거나 변절하도록 설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일운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각종 친일활동을 벌였다.
<1930년대 이후 전면적인 민족말살과 친일파 육성 >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만주는 일본의 '엔-블럭권'에 편입되었다. 일부 조선인 자본가는 일제의 비호 아래 일본군이 점령한 만주지역에 공장을 세우고 판로를 개척해, '만주특수(滿州特需)'의 수혜자가 되었다. 이들은 시장을 확대·개척하고 보다 많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편승했고, 스스로 친일협력의 길을 걸어갔다.
농업 증산의 이익 도한 여전히 친일지주에게 돌아가 지주들은 이 시기에도 일제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다. 조선의 지주·자본가·친일지식인 등 이른바 유산자계층은 식민지 구조 내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1931년 5월 개정 시행된 부·읍회(府邑會) 및 면(面)협의회 의원을 뽑는 '지방자치선거'에 출마해 식민지 지배의 노골적인 협력자로 변신했다. 민족주의운동의 지도자들마저 일제의 강력한 통치에 굴복해 친일협력의 길로 들어서는일이 점차 많아졌다.
1930년대 초 공황에 뒤이은 노동자 파업, 농민 소작쟁의 등 민중의 항일투쟁이 활성화되고 사회주의의 저항운동이 거세어지자 일제는 농촌 중견인물 양성책 등을 통해 대중 부문에서도 친일파를 육성하고자 했다. 특히 1937년 중국 침략, 1941년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전시파시즘 체제가 성립되자 일제는 다양한 전시 수탈기구를 확립하고 국민정신총력연맹 등 이른바 전시총동원기구를 만들어 철저하게 대민 통제를 가했다. 또 조선의 명망가들을 동원해 각종 관제 친일기구를 분야별, 지역별로 만들어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시동원체제에 조선인들을 끌어내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제의 전면적인 전시 수탈과 강력한 통제는 일제의 기만적인 동화정책과 친일파 육성책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면적 수탈과 조선인의 전시총동원은 조선 민중의 총체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일제의 이익과 일체가 된 친일파와 대가 없는 희생만을 강요받는 조선 민중의 전면적 적대가 더욱 커져간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출처: 미래엔 한국사
<일제가 조선 지배를 위해 내세운 두 가지 정책 >
일본 제국주의가 1910년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강제 병합했지만, 조선을 안정적인 식민지로 확보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는 무엇보다도 조선인의 강력한 독립의식과 투쟁 때문이었지만,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먼저 조선은 오랫동안 일본에 문화를 전달해 준 문화 선진국이었다는 점이다. 문화적으로 일본보다 앞서 있었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함께 수치로 다가왔다. 조선인들이 일제의 힘 앞에서 억지로 무릎을 꿇었을망정 일본인을 언제나 '왜놈' '쪽발이'라고 업신여기는 의식이 심연에 자리잡고 있는 한, 일제의 조선 지배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또 영토, 인구 등에서 일본의 그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은 조선을 일제가 무력으로 언제까지나 억압하기란 한계가 있었다.
이에 일제는 한편으로는 폭력을 앞세운 공포정치를 자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조선인을 마음 속으로부터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도록 만들고자 두 가지 방향에서 공작을 추진했다. 하나는 일제의 조선 강점을 정당화하기 위한 지속적인 이데올로기 공작과, 또 하나는 조선인 내부로부터 일제의 식민 통치를 찬양, 협력하는 친일파의 조직적인 육성이었다.
<일제 침략 이데올로기와 친일파의 육성 >
일제의 이데올로기 조작은 시기에 따라 내세우는 주장이나 논리는 차이가 있었지만 크게 보면 대개 이런 것이었다. 조선은 반도라는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없으며, 언제나 대륙 또는 해양 세력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반도 숙명론). 만일 대륙이나 해양 세력이 혼란에 빠져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때에는 조선 사회는 고여있는 물처럼 정체되어 왔다고 주장했다(정체론). 또 조선인은 본디 열등하며 큰 나라에 의존하는 습성이 있으며(사대주의성), 단결력이 없어 분열을 일삼아 '이씨조선'은 당쟁을 거듭해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다고 우겼다(당파성론, 당쟁망국론). 이러한 내용을 조선인들에게 심어주어 조선인의 열등감을 내면화시키려 했다.
이와 함께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것은 미개한 조선인(조선사회)을 문명개화시키려는 시혜의 소산이라고 주장했다(문명개화론).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고 낙후한 조선 사회를 개발하는 것은 주위의 강대국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며, 이는 동양 평화를 위해, 좁게는 조선 사회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것이니, 한일 양국에 모두 도움이 된다고 억지주장을 내세웠다(동양평화론). 나아가 이런 일본의 '호의'는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으니 곧 일본과 조선은 본디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 따라서 일본 '천황께옵서' 조선인이나 일본인을 모두 어여삐 여겨(일시동인:一視同仁) 진정한 내선일체의 완성을 향해 진력하고 있으며(일선융화론, 내선일체론), 이를 위한 과정적인 노력이 곧 동화주의라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문제는 일제가 볼 때 이러한 기만적인 조선 통치 이데올로기를 조선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일제는 이런 정책을 조선인들이 대행케 하기 위해 조선의 유력자들, 즉 지식인, 관료, 주요 조선인 단체의 간부 등을 포섭해 이들이 이러한 조선 통치 이데올로기를 조선인들 사이에 찬양·보급케 했다. 즉 친일파를 조직적으로 양성해 이들이 일제 식민통치를 찬양하고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 한 것이었다.
일제의 친일파 육성정책은 식민 통치의 기능면에서 보자면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선총독부와 소속 관서 그리고 군, 경찰기구 등 직접적인 통치기구에 조선인을 일정하게 참여시키는 방식이었다. 조선인도 출세할 수 있다, 동등하게 기회를 준다는 기만성을 퍼뜨리면서 대민 통치를 보다 효과적으로 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둘째, 동양척식회사, 금융조합, 수리조합 등 각종 대민 수탈기구에 조선인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무엇보다 식민지 수탈에 있는만큼 일제는 민족적 억압의 형태로 폭력을 동반한 형태로 이들 기구를 통해 수탈을 자행했고, 수탈의 대행자로 친일파들을 앞장 세웠다.
셋째, 일진회, 국민총력연맹, 협화회, 임전보국단 등 일제의 식민통치를 보조하고 협력하는 각종 관제, 민간 친일기구를 들 수 있다. 이런 단체는 정치활동, 이데올로기 영역, 기타 전시 동원기구로서 사회의 전 분야를 그물망으로 엮어 대민 통제와 감시체제, 나아가 일제에 조선인을 동화 협력시키는 부일단체로 악명을 떨쳤다.
이른바 조선의 문명개화론과 동화주의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앞의 것이 조선인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마취제의 기능을 담당했다면, 친일파는 일제의 다양한 지배와 통치를 보조하거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보급을 대행함으로써 조선사회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마약 중개상'의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그러면 시기별로 일제는 자신의 정책 목표에 맞추어 친일파를 어떻게 육성하려고 했는가?
<1910년 이전 일제의 침략논리와 친일파 육성 >
일본은 이미 1860년대이래 정한론(征韓論)을 들고 나와 한반도 정복을 꿈꾼 이래, 청, 러시아, 기타 서구 열강과 경쟁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논리를 동원했다. 1884년 일본이 후견이 된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의 한반도 침략논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의 탈아론(脫亞論)과 다루이(樽井 吉)의 흥아론(興亞論)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1885년 등장한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일본은 청과 조선과 같은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고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하자는 논리였다. 청과 조선은 일본을 맹주로 그 지도 아래 문명화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청과 조선에 대해 무력 침공도 불사해야 한다는 침략론이었다.
비슷한 시기 다루이는 흥아론을 내세웠다. 다루이의 흥아론은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인종주의적 의식을 깔고 있는데, 백인의 침략에 동양이 단결해서 막아내야 하고, 일본과 조선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을 건설하고 이 대동국과 청이 연대해야 한다고 했다. 이 사상은 일본 우익의 '아시아주의'의 뿌리가 되고, 조·중·일 '삼국공영론'이나 '한일합방론' 그리고 '대동아성전(大東亞聖戰)도 이 논리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1905년 이전 일본은 조선의 관료, 각종 단체 등에 친일파를 부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나, 대체로 이 시기까지는 친일파를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투자기간이자 인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성격이 짙었다. 조선의 정치인들이나 식자층에서 친일파가 적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 친일파란 친미파, 친러파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 독립에 어떤 나라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 하는 정치적 선택이란 각도에서 일본과 친연성을 가진 부류도 있었고, 일신의 영달을 위한 기회주의자들도 있어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을 배경으로 한 '삼국공영론' 등을 수용하면서, 이미 반민족적 의미를 띠는 '친일'적 사고가 조선의 식자층 가운데 상당히 침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러·일전쟁기에 다가가면서 이용구의 일진회와 같은, 정치적으로도 완전한 친일파로 변신하는 집단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통감부'시기 친일파에는 크게 세 부류의 집단이 있었다.
첫째, 일진회(一進會)와 같은 적극적인 친일단체로, 일본의 군부와 우익단체들의 조종과 원조에 의해 활동하였다. 일본 정부는 '한일합방' 같은 것을 일진회가 청원하는 방식으로 교묘히 움직여 한일합방을 일본이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처럼 이용했다.
둘째,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이완용(李完用), 조중응(趙重應)과 같은 고관들로, 이토오와 통감부 당국에서 직접적으로 이들을 원조하고 이용하였다. 또 일제는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갑신정변·갑오개혁 관련자들을 귀국시켜 친일파로 이용하였으며, 때로는 일진회세력과 경쟁시켜 실효를 거두기도 했다.
셋째, 계몽운동에 참여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는 적극적인 합방론이 반일운동을 격앙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 합방에 소극적인 인사들을 내세워 일본유학생이나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동양평화론, 삼국연대론 등을 유포시켰다. 그 결과 계몽운동 참여자의 많은 수가 일제침략에 간접적인 동조세력이 되어 동양평화와 문명개화를 주장하면서 '한·일합방'을 방조했다. 일본인 고문 오카끼(大垣丈夫)의 지도를 받은 대한자강회나 대한협회를 들 수 있다.
<1910년대 일제의 친일파 육성 >
1910년을 전후해 일제는 친일, 비친일을 막론하고 조선인 단체를 모두 해체하고 조선총독부를 정점으로 친일파를 재조직하려 했다. 그 대상은 크게 세 부류였다.
첫째, 조선 왕실을 친일세력의 정점에 두었다. 일제는 순종(純宗)을 비롯한 왕족들이 민중의 반일적인 저항을 막아내는 데는 여전히 가치가 있다고 판단, 일본 궁내부 대신이 조선 왕실을 관리하면서 일정한 예산을 지급해 왕실을 방패막이로 끌여들었다.
둘째, 일제는 '조선귀족령'을 제정해 이왕직에서 제외되었던 왕족, '합방'에 공이 있던 한말의 고급관료를 대상으로 해당자에게 작위를 주었다. 박영효(朴泳孝), 이재각(李載覺), 윤덕영(尹德榮) 등의 후작(6명)을 비롯하여 백작 3명, 자작 21명, 남작 45명 등이었다.
셋째, 일제는 조선인들을 직접적으로 총독부의 관료로도 임용하였다. 조선총독의 자문기구라는 중추원(中樞院)에는 부의장(1911년 김윤식)과 고문(이완용을 비롯한 14명) 등에는 귀족들을, 그 아래의 찬의(20명), 부찬의(35명)에는 한말의 중급관료 출신들을 임명하였다. 또한 4명의 도 장관과 각 도의 참여관(參與官) 13명을 비롯하여, 6∼7명의 경시(警視), 재판소의 판사 등에도 한국인을 임명하였다. 1910년대 초반에 전국의 모든 군의 군수도 한국인이었다. 총독부의 행정을 지방 단위에서 실현 지배하는 기구에 조선인을 참여시켜 친일파를 육성한 것이다.
넷째, 일제는 유생층을 회유하는 방편으로 '천황' 명의로 25만원을 지급해 경학원(經學院)을 설치했다. 유교에서 강조하던 조상숭배, 스승공경의 습관을 통하여 식민통치=천황에 순응하는 충량한 '신민(臣民)'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경학원의 강사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여 민풍개량, 근검저축의 장려 등을 강조하기도 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총독부의 신정(新政)을 선전하였다.
그 외 문명개화론, 부원(富源)개발론 등과 직접 연관이 있던 지주와 자본가들도 보호·육성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종래 대한제국의 고급관료층, 총독부의 군수들이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지방에 발달하였던 금융업(이른바 민족은행, 금융조합, 농공은행 등)의 주주들이었다.
<192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책과 친일파 육성 >
3.1민족해방운동 이후 일제는 경술국치 때 이용한 친일파만으로는 식민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친일세력을 보다 확대 양성하여 식민 통치에 이용하고자 했다. 사이토 총독은 1920년 '조선 민족 운동에 대한 대책'에서 다음과 같이 친일파 양성책을 구상하였다.
1. 친일 인물을 물색하고 이들을 귀족, 양반, 유생, 부호, 실업가, 종교가들에게 침투시켜 친일단체를 만든다.
2. 각종 종교단체에서 친일파가 최고 지도자가 되게 하고 일본인을 고문으로 앉혀 어용 화 한다.
3. 친일 지식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수재 교육의 이름 아래 친일 지식인을 장기 적 안목에서 대량으로 양성한다.
4. 양반 유생으로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 방도를 만들어 주고 이들을 선전과 민정 정 찰에 이용한다.
5. 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쟁의, 소작쟁의를 통해 노동자, 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고 그들을 일본 자본과 연결해 매판화시켜 일본측에 끌어들인다.
6. 농민을 통제, 조종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단체 교풍회, 진흥회를 만들어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 주는 한편 수목 채취권을 주어 회유, 이용한다.
사이토 총독의 친일파 양성안은 그대로 실현되어 대동동지회, 교풍회, 국민협회 등 각종 친일단체가 조직되었다. 이들 단체는 친일 여론을 만들고,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이거나 변절하도록 설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일운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각종 친일활동을 벌였다.
<1930년대 이후 전면적인 민족말살과 친일파 육성 >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만주는 일본의 '엔-블럭권'에 편입되었다. 일부 조선인 자본가는 일제의 비호 아래 일본군이 점령한 만주지역에 공장을 세우고 판로를 개척해, '만주특수(滿州特需)'의 수혜자가 되었다. 이들은 시장을 확대·개척하고 보다 많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편승했고, 스스로 친일협력의 길을 걸어갔다.
농업 증산의 이익 도한 여전히 친일지주에게 돌아가 지주들은 이 시기에도 일제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다. 조선의 지주·자본가·친일지식인 등 이른바 유산자계층은 식민지 구조 내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1931년 5월 개정 시행된 부·읍회(府邑會) 및 면(面)협의회 의원을 뽑는 '지방자치선거'에 출마해 식민지 지배의 노골적인 협력자로 변신했다. 민족주의운동의 지도자들마저 일제의 강력한 통치에 굴복해 친일협력의 길로 들어서는일이 점차 많아졌다.
1930년대 초 공황에 뒤이은 노동자 파업, 농민 소작쟁의 등 민중의 항일투쟁이 활성화되고 사회주의의 저항운동이 거세어지자 일제는 농촌 중견인물 양성책 등을 통해 대중 부문에서도 친일파를 육성하고자 했다. 특히 1937년 중국 침략, 1941년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전시파시즘 체제가 성립되자 일제는 다양한 전시 수탈기구를 확립하고 국민정신총력연맹 등 이른바 전시총동원기구를 만들어 철저하게 대민 통제를 가했다. 또 조선의 명망가들을 동원해 각종 관제 친일기구를 분야별, 지역별로 만들어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시동원체제에 조선인들을 끌어내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제의 전면적인 전시 수탈과 강력한 통제는 일제의 기만적인 동화정책과 친일파 육성책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면적 수탈과 조선인의 전시총동원은 조선 민중의 총체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일제의 이익과 일체가 된 친일파와 대가 없는 희생만을 강요받는 조선 민중의 전면적 적대가 더욱 커져간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출처: 미래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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