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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57>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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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489회 작성일 11-01-14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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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57.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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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보스토크 최초의 한인집단거주지 신한촌. 서울거리2A 표지가 보인다. 박용만도 한 동안 이 일대에서 거주했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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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한촌(지금은 하바롭스크 거리)의 현재 모습

 

노령과 만주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생력을 키운 독립운동 단체들과 무장 부대들이 많았다.

뒤늦게 끼어든 박용만이 독자적인 세력을 하루아침에 형성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그의 세력기반이 어디까지나 미주 쪽이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활동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그의 전도를 암시한다.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거나 아니면 세력들의 통합을 통해 독립운동의 판을 키우거나 첫째도 둘째도 군자금을 두둑이 모우는 게 급선무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성환을 총사령으로 자신이 총참모가 돼 '대한국민군'이라는 조직을 내왔지만 처음 착수한 건 군자금 모집을 위해 몇 동지들을 고국에 밀파하는 일이었다.

조성환은 기존의 무장세력인 북로군정서에 속해 있으면서 다가올 전투를 위해 군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사들이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박용만은 자연 음으로 양으로 그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도착 후 해를 넘겨 1920년 초까지 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박용만이 북경으로 간 것은 3월 20일.

같은 시기 하와이에 있는 대조선독립단에서는 두 번에 걸쳐 박용만에게 $3,500을 송금했다.

그리고 같은 해 2월 자유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5만불의 자금을 조성해서 보낼 것을 의논했다.

이것은 아마도 박용만이 북경에서 활동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계획과 연동된 것으로 보여진다.

북경에 온지 얼마 안 돼 박용만은 김가진 등이 조직한 대동단 총부의 무정부장으로 지명돼 활동했다.

또한 신채호, 유동렬, 문창범과 같은 명성 높은 독립운동가들과도 교류를 이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18년 8월서부터 1920년 3월까지 미국은 시베리아에 약 8천 명의 원정군을 파견했다.

임무의 하나는 체코여단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용만이 1919년 5월 미육군수송함 토머스호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올 수 있었던 것도 원정군 사령관에게 현지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세계대전은 독일의 동쪽 전선을 러시아가 담당하고 있었고 서쪽 전선을 프랑스와 영국이 맡고 있었다.

그 와중에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볼쉐빅 정권이 탄생했다.

볼쉐빅 정권은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은 다음 전쟁에서 발을 뺐다.

곤란에 빠진 것은 독일군의 동쪽에 투입돼 있던 약 6만여 명의 체코 여단이었다.

 

연합국 측은 체코 여단이 독일군의 서쪽 지역인 자기네 전선으로 이동하기를 원했으나 러시아는 허용하지 않았다.

외려 무장해제를 명하자 체코 여단은 이를 거부하고 주둔지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동하고 거기서 배를 타고 프랑스를 경유하는 귀국길을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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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체코여단

 

주둔지인 우크라이나에서 시베리아를 향해 이동을 시작한 건 1918년 봄.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다음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떠난 것은 1920년 9월. 무려 2년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러시아 적군파와 전투도 여러 번 치렀다.

열차 안에서는 은행과 우체국이 운영됐다.

자체 신문을 편집하고 정차하는 역의 도시에서 인쇄해 배부했다. 3.1운동이 일어났다는 뉴스도 그 신문에 실렸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동맹해서 러시아, 영국 및 프랑스와 대전을 벌리자 체코인들은 오스트리아군에 동원됐다.

그러나 같은 민족인 러시아의 슬라브족과 싸울 이유가 없어 러시아에 투항, 독자적인 부대를 창설했던 것이다.

 

나중 초대 대통령이 된 마사릭은 미국 시카고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인물. 그 역시 무장 항쟁을 주장했기 때문에 새로 생긴 체코여단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창설 초기부터 부대가 있는 전선을 방문했고 마침내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했을 때는 미국에서 건너와 격려를 했다. 돌아갈 때는 신의주에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일본을 경유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처음으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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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보스토크 시가를 행진하는 미국의 시베리아 원정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규모 병력을 유럽으로 수송하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6만7739명의 장병들과 민간인들을 수송하는데 42척 이상의 외양선들을 동원해야 했다.

그 막대한 수송비용을 지불하자면 조달하기 가장 손쉬운 방법이 무기 판매였다.

소총, 기관총, 탄약 등을 처분해야 했는데 그때 무기 구입을 하겠다고 찾아온 고객이 바로 만주의 한인 독립군부대였다.

 

박용만이 북경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것은 한창 무더운 6월이었다.

이미 체코여단에서 무기를 처분한다는 소식이 파다했다. 그 소식은 이용화를 통해 박용만의 귀에도 들어왔다.

 

조성환은 이용화를 데리고 체코여단의 책임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박용만 역시 방관하지 않았다.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무기구매뿐 아니라 막대한 양의 무기와 탄약을 수송하는 것은 한두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될 일이 아니었다. 조성환과 박용만은 동지들을 규합해서 이 엄청난 작전을 은밀히 추진했다.

 

마침내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의 깊숙한 삼나무 숲 속 아지트에서 북로군정서 재무부장 조성환과 체코여단 대표 가이다르(나중 체코의 국방장관이 됨) 사이에 무기 매매가 이뤄졌다.

구입대금을 지불하자면 만나는 동포들 마다 주머니의 먼지까지 털어야 할 판이었다.

 

박용만도 하와이의 대조선독립단에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준 돈을 성금으로 보탰다. 성금뿐만이 아니었다.

동포들이 내놓은 금붙이도 지불수단으로 사용됐다.

 

후일 체코에서 한국제 금반지, 금비녀는 물론 요강이 발견됐다. 요강은 놋쇠요강으로 금붙이를 담아 수송할 때 사용됐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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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범도 장군(1868-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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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좌진 장군(1889-1930)

 

230명으로 독립군 무기 운반대가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의 비밀지점에 당도한 것은 1920년 7월 30일.

저마다 등에 한 짐씩 지고 연해주에 인접한 만주의 간도 지방으로 돌아온 건 9월 7일.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인 10월 21일서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이 지휘한 2천5백 명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매복전으로 5천 명의 일본군을 무찔렀다.

적의 사상자는 3천 명이나 됐으나 아군 사상자는 1백50명밖에 되지 않는 대승을 거뒀다.

체코 여단으로부터 가져온 1천2백 정의 최신예 소총과 기관총이 통쾌한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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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이 사용했던 소총과 탄약

 

3.1운동 이후 만주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무장 부대들이 조직돼 국경을 넘어가 기습을 자주 했다. 일제는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중국 마적을 사주하여 일부러 훈춘현 소재 일본 영사관에 불을 지르게 했다.

이를 구실로 만주에 3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그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청산리에서 매복전을 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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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부대

그러나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외려 더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왔다.

패배의 치욕을 앙갚음하기 위해 일본군은 무차별의 대학살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소위 '간도참변'이었다.

3, 4개월에 걸쳐 수많은 한국인 마을들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으며 한국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

피살자 수가 무려 3만 명에 이르는 극악무도한 대학살이었다.

이런 혹독한 초토작전 때문에 대부분의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를 떠나 시베리아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됐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출처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원문보기   글쓴이 : 한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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