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53> 무형정부는 임시정부와 같은 망명정부라
페이지 정보

본문
박용만과 그의 시대 -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53. 무형정부는 임시정부와 같은 망명정부라
▲ 감자 대기근의 참상을 보여주는 동상들. 고향을 떠나는 앙상한 몰골들이다.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수도이자 항구도시다. 세관이 있는 부두에 가면 앙상한 몰골의 동상들을 볼 수 있다. 1845년 일어난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을 형상화한 것이다. 젊은이의 어깨 위에서 축 늘어진 아이는 생명이 붙어 있지 않는 것 같다.
감자 대기근은 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일어났다. 그러니까 동상들은 망국민의 신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1905년 일본 통감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간도로 떠나는 이주민이 급증했다. 1911년 한 해에만 12만6천 명이나 됐다. 해방될 때까지 무려 2백만 명 이상이 조선 땅을 떠났다. 아니 쫓겨났다. 그들의 모습을 서울역 앞에 동상으로 세워 놓으면 망국민의 설움이 어떻다는 교육효과로 그만일 것이다.
감자 대기근은 1845년서부터 7년 간 감자 흉작으로 일어났다. 인구 8백만 중 1백만이 굶어 죽었다. 또 1백만이 해외로 이주함으로써 인구의 25%가 줄었다. 부두에 세운 동상들은 이민선을 타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더기로 굶어 죽는데도 감자 말고 다른 식품들은 영국으로 계속 반출되고 있었다. 당시 독립국가의 정부가 아닌 아일랜드 정부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오스만 터키 왕국은 비밀리에 구호양식을 가득 실은 배를 보냈다. 영국 해군은 그것을 막기 위해 경계에 들어갔다. 일리노이즈 대학 법학교수 프란시스 보일은 1996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영국이 아일랜드 인들을 계획적으로 대량학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벨파스트에 세워진 벽화. 영국이 150만 명 이상을 굶겨 죽였다고 쓰여 있다.
감자 대기근은 아일랜드 역사의 분기점이 됐다. 수백 년에 걸친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해야겠다는 민족주의 운동이 불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1905년 <뎨국신문>에 발표한 박용만의 수필 <청춘소년들아>에도 아일랜드(애란)가 나온다. " --- 고로 대장부 세상에 태어나서 능히 당시 애란을 구하지 못하고 천하의 근심을 풀지 못하면 --- " 운운한 것이다. 박용만이 그 글을 쓸 때만 해도 아일랜드는 영국에 병합돼 있었다.
그는 애란과 같은 신세인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해서 구상한 것이 '무형한 국가'의 수립이었다. 영토와 주권이 없으니 '유형한 국가'를 세울 수는 없고, 해내외 국민들을 조직하여 '무형한 국가'에 준한 정치조직을 꾸림으로서 궁극적으로 '유형한 국가'의 건설에 대비하자는 거였다.
'무형한 국가'에 준하는 자치기관을 만들어 동포들이 조세와 병역을 실제 감당함으로서 국민의 의무를 다 하게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런 합의가 있었기에 네브래스카와 하와이의 동포들은 한인공회나 국민회에 일정액의 의무금을 자진 납부했다. 박용만이 어디 가나 추구했던 둔전병식(屯田兵式) 군사훈련 역시 병역을 국민의 의무로 알고 무력을 길러 광복전쟁에 대비하자는 거였다.
▲ 네브래스카 주 링컨 시 한인학생기숙사에서 공부하는 박용만.1911년.
3월 29일자 <신한민보>에 박용만은 약 5500자에 달하는 장문의 논설, '조선 민족의 기회가 오늘이냐 내일이냐'를 실었다. 언젠가는 미국과 일본 간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런 기회를 이용해서 독립을 도모하고 그러자면 어떤 준비가 있어야 하겠는 가에 대해 논한 것이다.
"만일 조선국민으로 하여금 완전히 조직체가 있어 사회의 의미로 이것을 유지하지 말고 곧 정치적 의미로 유지하여 의무와 권리가 명백히 분석되고 정사(政事)와 명령이 엄정히 실행되지 않으면 결단코 성공하기 어렵도다.
시방 외국에 나와 있는 동포들은 우리 국민회로 하여금 완전한 조직체를 허락하고 이만하면 무슨 일을 다 치룰 것같이 생각하나 그러하나 이는 아직도 사회적 조직이요 정치적 조직이 아니라. 그러므로 내지에 있는 동포는 고사하고 외국에 있는 사람도 한 결 같이 통일할 수가 없으며 또한 법률과 제도가 없어 정사(政事)와 영(令)이 행하지 못하게 되니 이는 우리의 큰 한이 되는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 국민회로 하여금 사회적 범위를 떠나 정치적 지경으로 들어가 조선 사람의 한 '무형국가'를 성립하지 않으면 큰일을 건지기가 어려울 진저."
앞에서는 '무형국가'를 수립해야 하는 역사적 전환점에 대해 언급했다면 여기서는 '국민회'와 같은 사회적 조직을 정치적 조직으로 바꿈으로서 '무형국가'의 형성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4월 5일자 <신한민보>에 '조선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무형한 국가'를 먼저 설립할 일'이라는 논설에서도 그는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나는 오늘날 정형을 가지고 장차 할 일을 연구하건대 우리의 가장 먼저 착수할 일은 우리 국민을 일체로 정치적 제도로 조직하여 한 자치하는 실력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결과를 얻을 줄로 믿으며 또 이것을 하자 하면 반드시 외국에 있는 동포로부터 시작하여야 할 줄 아노니 이는 소위 박용만의 아는 것이 이 뿐이요 배운 것이 이 뿐이요 또한 신한민보의 붓을 잡을 때에 이 주의를 우리 동포에게 권고코자 함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치 외에는 사상도 없고 정치 외에는 종교도 없고 정치 외에는 학문도 없다고 자복하노니 이는 오늘날 입을 벌리고 크게 소리 지르기를 우리 조선국민의 단체로 마땅히 사회적 제도를 변하여 정치적 제도로 조직할 것이라 함이라."
그리고 정치적 조직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소위 정치적 조직은 순전히 이에서 반대되어 특별히 한두 가지 목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곧 천만 가지 일을 다 주장하며 이 사람 저 사람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곧 일반 동종을 다 포함함이니 여기 당하여는 입회 출회도 없고 청원서, 보증인도 없고 다만 일반 조선민족을 한 헌법 아래 관활하여 한 '무형한 국가'를 설립하자 함이니 가령 우리 시방 북아메리카와 하와이와 해삼위와 만주에 있는 조선사람들은 응당 이 사람 저 사람을 물론하고 누구든지 만일 조선 산천에 생장하여 조선사람의 성명을 가진 자는 다 일체로 그 공회에 속하게 하여 법률을 이같이 정하고 제도를 이같이 꾸며 뜻이 같든지 의견이 다르든지 감히 이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나니 이는 소위 정치적 조직이다."
그의 일편단심 '무형국가론'을 동포들은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적 수준이 아직 미숙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국가권력처럼 강제성을 띄기에는 한계가 따르기 때문이었다. 정치적 조직론에 대해 "사방에 의논이 분분하여 혹은 환영하고 혹은 의심하며 혹은 찬성하고 혹은 반대한다 하며 또 그뿐 아니라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가 천신만고를 지내고 이 사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을 하루아침에 두들겨 부수면 몇 해 동안 힘쓰던 것이 허사로 돌아간다 하고 또 어떤 이는 의논하기를 단체의 조직은 이만해도 일만 잘하면 그만이라 하였다"고 한다.
'사회적 조직'인 국민회를 어렵사리 세웠는데, 이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치적 조직'을 세우는 것은 아직 모험적이라고 동포들은 판단한 것 같다.
박용만의 '무형국가론'은 아무 근거나 사례가 없는 게 아니었다. 미국에 와 있는 수백만 아일랜드 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발한 운동을 벌였다. '무형국가'의 '가정부(假政府)' 개념을 만들고 동포들로부터 인두세(人頭稅)를 거둬들였다.
한편 1905년 아일랜드에선 새로운 과격파 정당인 신페인(Sinn Fein)당이 결성됐다. 완전 독립을 위해 과격한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1922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 1916년 부활주일 주간에 봉기한 아일랜드 인들. 독립을 외치며 많은 신페인 당원들이 참가.
1910년 10월 5일자 <신한민보>에는 각 지방총회를 통괄할 중앙기관의 설립을 제의하는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라는 무기명 논설이 실린다.
"중앙총회는 대한국민을 총히 대표하여 공법상에 허한 바 가정부(假政府)의 자격을 의방하여 입법, 행정, 사법의 3대 기관을 두어 완전히 자치제도를 행할 일과 내외국인이 신앙할만한 명예 있는 이를 받들어 총재를 삼아 중대 사건을 고문케 할 일과 회원과 아님을 물론하고 각국 각지에 있는 대한국민에게 그 지방 생활정도를 따라 얼마씩 의무금을 정하여 전체 세입세출을 정관할 일과 일체 회원은 병역의 의무를 담임할 일(다만 연령에 따라)"이라는 네 가지 실행항목을 제시한다.
그리고 본문의 일부로 "대한국민회는 국가인민을 대표하는 총기관이 확연히 되었도다. 이제 형질상의 구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의 신한국은 바야흐로 울흥하기를 시작하니 어찌 희망이 깊지 아니함이요..."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귀에 익은 말투가 아닌가.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는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來)하도다."라는 말투와 울림이 같지 않은가.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라고 부르짖은 3.1 독립선언 보다 8년 5개월 이전에 이미 "형질상의 구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의 신한국은 바야흐로 울흥하기를 시작하니..."라고 닮은꼴의 선언이 있었던 것이다.
무기명 논설이지만 실행항목들은 평소 박용만이 주장했던 것이고 문체의 스타일로 봐서도 쓴 사람은 박용만으로 추정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02436
- 이전글<박용만과 그의 시대 54> 이승만파에게 독립운동보다 급선무였던 것은? 11.01.06
- 다음글<박용만과 그의 시대 52> 한글은 참 문명국에서 일등가는 문자라.. 11.01.0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