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49> - 반대파를 또 경무청에 고발한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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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49. 반대파를 또 경무청에 고발한 이승만
이승만은 죽기를 거부하는 화산이었다.
끼친 재앙의 머쓱함 때문에 수면(睡眠)으로 들어가는 사화산이 아니라 끊임없이 불기를 토해내는 활화산이었다.
1918년 2월 27일서부터 3월 8일까지 있었던 형사재판에서 이승만과 안현경이 고발했던 박용만 파 네 사람은 무죄가 입증돼 풀려났다. 분규는 거기서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점차 수위를 높여가며 분쟁을 이어가던 중 5월 28일 이승만은 반대파를 또 경무청에 고발했다.
원래 고발을 한 사람은 해동여관 주인 정윤필이었다. 그러나 경무청은 움직이지 않았다. 근래 한인들이 쓰잘 데 없는 사건을 가지고 경무청을 성가시게 하므로 두 번이나 고발을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승만이 전화로 급히 고발했다.
"지금 당장 사람이 다치고 있단 말이요."
마지못해 경무청은 경찰과 마차를 보내 국민회관 안에 있던 박용만 파 사람들과 총회장 안현경을 포박해서 끌고 갔다. 그게 저녁 7시경이었다.
박용만파 대의원들은 3월 8일 재판이 끝난 다음부터 끈질기게 임시의회 소집을 요구해 왔다. 그날도 오하우, 가와이, 하와이 각 지방을 대표하는 대의원 10여 명이 안현경에게 임시의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동안 50여 일에 걸쳐 글과 말로 여러 번 요구했으나 안현경의 대답은 강경했다.
"내 목을 자르고 배를 가를지라도 의회를 열어줄 수 없다"는 거였다.
대의원들은 의회를 못 열겠다면 총회 장부라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안현경은 그것마저 거부했다. 그들은 아침 9시서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의회를 열거나 아니면 장부를 보여주지 않으면 물러날 수 없다고 주저앉자 밖에서 이승만이 전화해서 경찰이 출동했던 것이다.
경무청은 이번에도 허탕을 쳤다. 마지못해 잡아들여서 양쪽 얘기를 들어보니 이건 구속요건이 성립되지 않았다. 이승만 역시 또 헛발질을 한 셈이다.
"한인들이 마냥 이런 식이면 국민회를 해산시키는 수밖에 없소." 경무청 소장의 화난 말투였다.
그가 화를 내는 건 치안문제 때문만이 아니었다. 더 골치 아픈 건 재정문제였다. 1915년 총회장 김종학 고소건만 하드래도 고등재판소의 재판경비가 2천 불이나 들었다. 김종학의 무죄 판결이 날 때까지 애꿎은 시민의 세금만 축낸 거였다. 또 금년 2월에 박용만 파 네 사람을 고발한 사건 역시 무죄판결로 끝났고 막대한 재판비용만 지출해야 했다. 하와이 정부가 국민회를 성가신 물건으로 보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박용만 파의 임시의회 소집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약소국동맹회의 재정 농락.
농장 주식회사 구채를 수봉 투식.
신문사 장부를 모호케 하여 재정을 농락.
회관 임대료를 수봉 투식.
유학생 휴대금을 사기.
총회관 기지대금 농락.
작년도 일체 행정을 제멋대로 시행.
의회가 열릴 때 경찰을 사서 의회를 압박한 일.
무죄한 동포에게 죄를 얽어 옥에 가둔 일 총회장의 부도덕한 행위로 그 신성한 지위를 손상한 일.
국민보가 총회장 편에 서서 총회장의 죄상을 엄호한 일.
이상의 이유로 14개 지방 대의원 명의로 임시의회 소집을 청원한 것은 4월 8일이었다. 그때부터 양 측의 샅바싸움이 시작됐다. 우선 총회장 안현경이 마위섬으로 자취를 감췄다. 부회장 윤계상은 총회장이 출타 중임으로 의회를 열 수 없다고 통고했다. 총회장 유고 시에는 부회장이 대신해서 처리하는 게 마땅함에도 윤은 총회장이 곧 돌아오면 청원하라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청원자들은 "임시의회 소집할 이유는 총회장 각하의 재정 간몰한 것과 행정 불법한 일이어늘 (중략) 이제 총회장은 과연 범법한 것이 있어 스스로 자기 죄를 알아 도망하고 부회장 각하는 총회장의 출타함을 빙자하고 농락의 술을 베푸니 이것이 자치규정에 있느뇨?"라고 서면 질문한다.
그러자 윤계상은 이렇게 대답한다.
"금년도 정식 의회를 필한지가 몇 날이 되지 않고 각 지방 동포가 의회 결안을 심히 원만히 생각하여 일심으로 복종인 바 소수인의 사사히 원하는 것을 인하여 전체를 문란케 함이 불가하고, 청원인 제 씨를 대표로 인정치 않으니 이상 이유로 소집을 준허치 못하오니 요량하시오."
주고받는 문서의 내용을 보면 양쪽 다 지지 않겠다는 투지가 충만하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을 눈여겨보면 근대화의 기미가 역력하다. 더 이상 조선식으로 싸우지 않고 미국식으로 싸우는 양상이다. 물론 초기에는 치고 박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차츰 미국식으로 바뀐다. 폭력 대신에 말싸움으로, 그 다음엔 편지싸움으로, 그것도 안 되면 변호사를 사고, 그래도 안 되면 단식투쟁으로 들어갔다. 결국 최종단계는 법정투쟁이었다. 한푼 두푼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회비는 독립운동 보다 법정투쟁의 비용으로 탕진됐다.
사태를 보는 '신한민보'의 논평은 이랬다.
"하와이 총회 자치규정 제2장 입법부 제23조 제2관에 가로되 '임시의회는 전체 국민회의 중대한 사건이 있거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국민회에서 마땅히 할 일이 있을 때에는 기한을 정치 않고 개회함'이라고 했고 (중략) 헌장 제3장 21조에 '임시의회는 대의원 3인 이상의 동의나 혹 임원회의 요구를 인하여 개회함'이라 한 바 이 조목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자치규정 제 23조에 의회는 통상과 임시를 막론하고 소집 해산의 권리가 오직 총회장에게 있다고 임시의회를 열어주지 않으면 이는 법률을 더욱 어기는 말이라.
이번 의회 소집은 총회장 탄핵안을 제출하기 위함이니 총회장은 곧 의회의 피고자라 피고자가 돼서 의회심의를 거절하고 여론을 덮어 누르는 것은 오직 국민회 헌장이 허락지 않을 뿐 아니라 가령 죄가 없더라도 이는 스스로 죄를 만드는 것이니라."
당시 하와이 경무청에서 죄인을 잡아가는 마차를 동포들은 풍경마차라고 불렀다.
5월 28일 박용만파 대의원들은 총회장 안현경을 붙들고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긴 하루해가 저물어갈 무렵인 저녁 7시 경 홀연 풍경소리가 철렁철렁 나더니 호랑이 같은 경찰관이 서넛 들이닥쳤다. 그들은 총회관 안에 있던 8개 지방대의원은 물론 안현경까지 마차에 실었다. 영장이 없을 경우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잡아가는 게 관행이었다.
풍경마차를 타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나 이 신사들은 하도 여러 번 타봐서 이젠 습관이 됐다. 포박한 이유는 가릴리하 여학교에서 이승만이 전화했다는 거였다.
경무청 소장 도푸가 대의원들에게 물었다.
"당신네들이 총회관에 가서 야료를 부린다니 무슨 일로 그리 하오?"
대의원 유동면이 간략하게 대답한다.
"우리가 총회장의 행정상 부정한 과실을 들어 의회를 소집하던지 장부를 조사하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허락하라고 두 달 동안 총회장에게 청원했으나 그는 자기 과실을 감추느라고 허락지 않으니 이것은 의회공법을 어기는 일이 아니겠소?"
경무청 소장이 안현경에게 묻는다.
"어찌하여 그걸 허락지 않나뇨?"
안형경의 대답은
"이 사람들은 대의원의 권리가 없는 자들이요."
"이들 중에 권리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나뇨?"
"권리를 가진 사람도 있지요."
"그러면 회칙에 대의원 몇이 청원해야 의회를 소집하나뇨?"
"3인 이상이 청원하면 허락하지요."
"이들 중에 대의원의 권리를 가진 자가 3인도 없나뇨?"
"3인은 되는 듯하오."
"그러면 어찌하여 의회를 열어주지 않나뇨?"
이 질문에 안현경은 대답을 못한다.
경무청 소장이 심문을 마무리했다.
"세 주일 기한을 주겠오. 이 안에 의회를 열던지 장부를 조사하게 하던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시행하시오. 다시는 이런 일로 트러블을 일으키지 마시오."
붙잡혀갔던 사람들은 즉각 풀려나고 이승만은 헛발질의 불명예를 또 한 번 기록하게 됐다.
안현경은 경찰서장의 타이름을 고부고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구실을 만들어냈다.
5천 동포들의 투표를 통해서 결정하겠다는 엉뚱한 핑계도 댔다. 각 섬의 지방의회들을 알아 봤더니 대다수가 의회를 열기를 원치 않는다는 주장도 했다.
▲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징병 포스터
하와이 동포들이 패가 갈려 피터지게 싸울 동안 미국도 독일과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약 1년 전인 1917년 4월 6일 미국은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 잠수함들이 미국 상선을 7척이나 침몰시킨 다음이었다. 그 세계대전이 끝난 건 1918년 11월 11일이었다.
"전시 중 재류국 정부에 일이 많은 때에 다시 이 일로서 시비를 일으키면 오직 체면만 손상할 뿐 아니라 국민회 존립의 운명이 위태할 터인 고로 부득이 국민회 일이 바로 잡힐 때까지 연합회 동조자 20여 지방을 거느려 정식 임원을 선거하고 공고서 대신 연합회 기관지를 조직하며 들어오는 의무금은 미국전시저축우표를 사둘 터이다."
이것은 박용만파가 6월 19일 발표한 성명이다.
이렇게 해서 하와이 동포사회는 두 갈래로 영원히 갈리고 말았다.
다음 해에는 조국에서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그러나 그 중요한 시기에 둘로 갈린 동포사회는 제대로 운동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와이 동포사회의 분열이나 남북한의 분단은 이승만이 지도자로 있었을 때 일어난 사건들이다.
그 책임을 그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분열이나 분단을 스스로 일으키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그것을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막기에는 한 개인으로써 역부족이었을까. 아니면 막으려는 의지나 있었을까. 각 자의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출처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원문보기▶ 글쓴이 : 한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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