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과 그의 시대 48> - 그는 왜 하와이행 여객선에서 투신자살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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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 기자 말
48, 그는 왜 하와이행 여객선에서 투신자살했나
박용만을 비난하는 이승만의 글이 '국민보'에 실린 후 일주일쯤 지나 박용만은 그에 대한 반박문을 '연합회 공고서'에 발표한다. 제목은 '시국소감'.
"원래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그 사업 발전을 위해 유망한 인물을 청한다는 것이 이승만 박사를 청해 온 것이요,
그 인물을 받들기 위해 국민회를 희생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단체는 유망한 인물을 청해 온 까닭에 망하게 되니 이것이 그 인물의 죄악인가 그 인물을 맹종하는 동포들의 죄악인가. 양심으로 생각해 볼 것이다."
▲ 1914년 '알로하 카니발' 때 광무군인부대를 지휘하던 장교들. 왼쪽이 박용만으로 추정됨.
박용만의 '시국소감'은 그렇게 운을 뗐다.
그리고 그간의 경위를 상기시켰다. 처음에 이승만이 국민회 소유 엠마 기지를 가져가려는 욕심으로 시비를 시작해서 국민회를 전복하는 작란까지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 기지는 국민회가 교회 사업을 위해 좋은 목적으로 매득했던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단체가 분열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그 기지를 교회에 주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서 학교 사업에 쓰게 해달라 했고 국민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승만이 그 기지를 자기의 명의로 넘겨 달라고 할 때 국민회가 불허한 것은 그것이 공유물인 까닭이었다.
이승만은 그것에 감정을 갖고 각 지방에 다니면서 글과 말을 돌려 국민회 임원들을 비난해 인심을 선동했다. 1915년 5월에 풍파를 일으켜서 염치없고 비열한 수단으로 국민회를 전복한 이후에 독재 행동으로 매사를 임의 처단했다. 지금 그 기지는 어디 갔고 국민회 현상은 어떠한가. 박용만의 질문이었다.
"이번에 이승만이 다시 일으킨 풍파는 그 시비의 곡직이 분명한데 아직도 그 불의 행사를 맹종하는 동포들이 있으며 그 중에 각 지방 국어학교 교사들과 교회의 전도사들은 그만한 경우를 알면서 순실한 동포들을 선동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해외 단체의 적은 시비 같으나 민족 사업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며 만일 조국이 광복된 후에 이와 같은 인도자와 이와 같은 민기가 있으면 국가와 민족의 비운을 초래할 것이다.( 주(註) - 국가와 민족의 비운 여부에 대해서는 주관에 따라서 평가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은 현재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고 남한에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를 세웠다고 칭송을 받지만 자신은 3선 개헌을 시도하다가 국민들에게 쫓겨났다. 박용만은 약 30년 후에 일어날 일을 잘 예언한 셈이다.)
이승만이 국민회 재무 직임을 갖고 공금을 잘못 쓴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교정하려는 대의원을 모함하여 경무청에 체포케 하고 재판한 것이 염치없는 일이다. 더욱이 재판석에서 국민군단의 항일 운동이 죄이고 국제 평화의 소란을 음모하는 것이니 조처하라고 호소한 것은 우리 동포의 애국정신을 변천시키고 독립운동을 음해하는 악독한 행동이다."
박용만은 또한 이승만이 하와이에 오던 때까지도 국민회의 기상이 장쾌했고 동포의 염치와 양심이 아름다워서 안으로 단체에 화기가 있고 밖으로 각국 사람들의 칭송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오늘의 정형은 동포가 있는 곳마다 싸움인데 호소할 곳이 없고 외국인들의 비웃음을 받아서 대외 신용이 몰락됐으니 이렇게 된 것을 살피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용만은 그의 결론을 우려의 목소리로 끝냈다.
"이승만이 글로는 민주를 주장하고 실제에는 경우와 공론을 멸시하며 말로는 도덕을 부르고 행실로는 작당과 몽둥이질을 교촉하며 동포를 대하여 죽도록 싸우자 하고 파쟁을 기탄없이 조장하니 이것이 자기의 조그마한 지위를 보존하려고 동포로 하여금 서로 충돌하여 망운을 초래하게 하는 행위이다. 후일에 학자가 있어서 하와이 한인사회 실정을 기록하면 보는 자 누구나 책상을 치면서 질책할 것인데 행여나 이것이 우리 민족 장래에 거울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 1918년 3월 19일 박용만 기서
이승만이 "지나간 일을 다 잊어버리고 중요한 기관과 좋은 기회를 박용만씨에게 여러 번 맡겼나니..." 운운한 것은 1915년 이승만파가 박용만파를 국민회에서 축출한 다음 그 다음 해 박용만을 '국민보' 주필로 재임용한 것과 1917년 11월 뉴욕에서 약소국 동맹회의가 열렸을 때 그를 대표로 파견했던 사실을 뜻한 것이리라.
이승만의 글에서 "1915년 풍파 시에도 박씨가 미주에 갈 때에 박씨를 돕는 자들이 국문과 영문 신문에 드러내어 떠들기를 이승만이가 박용만을 죽이려 해 박용만이가 피해 미주로 갔다 하며 미주에서 어떤 못된 자의 구타를 당한 후 전보 내왕과 국문 영문 신보에 또 드러내어 이승만이가 자객을 보내어 박용만을 죽였다고 떠드는지라..."는 '오진국(吳鎭國) 사건'을 뜻한다.
국민회 중앙 총회장 안창호와 부회장 박용만의 취임식이 1915년 6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거행된 다음 박용만은 7월 중 계속 샌프란시스코에 머물고 있었다.
7월 12일 오진국이 박용만을 찾아왔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 스탁턴에서 이발업을 하던 자였다.
"어떻게 오셨는지? "
박용만이 일어서며 묻는 찰나 오진국은 그의 정강이를 구둣발로 사정없이 걷어찼다.
박용만이 그 자리에서 거꾸러지자 이번에는 팔꿈치로 그의 목을 힘껏 후려쳤다. 박용만이 바닥에 쓰러지자 그는 등 위에 구둣발을 올려놓고 짓눌렀다.
"피땀 어린 동포들 돈을 빼돌려? 너는 오늘 내 손에 죽어야 돼."
오진국은 두 손으로 박용만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왜 이러시오?"
"몰라서 묻네? 박상하, 김종학 니네 패들이 공금을 빼돌리지 않았는가?"
오진국은 박용만에게 '국민보'에서 손을 떼고 중앙총회의 부회장직을 사퇴하라고 협박했다. 또 종이에다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오진국의 눈에는 살기가 번득였다. 다리를 심하게 다친 박용만은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자칫하면 개죽음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각서를 써주기로 했다. 여관으로 돌아온 박용만은 며칠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사건이 알려진 뒤 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서는 오진국의 지방회 대의원 자격을 박탈하고 벌금 10달러를 부과했다. 그러나 그는 지방회의 결정에 불복하고 북미 지방총회와 중앙총회에 계속 상소했다.
그러다 9월 2일자 '신한민보'는 오씨가 자복했다고 전한다.
"스탁턴에 있는 오진국이 중앙총회 부회장 박용만씨에게 대해 무례한 행동이 있은 일로 새크라멘토에 있는 동포 50여 인이 그를 크게 힐책하매 오씨는 전과를 깨닫고 사죄를 청했으며 또는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서 처결한 벌을 복종하겠다 하였다더라."
▲ 1917년 발행된 미국돈 1 달러
9월 30일 오진국은 하와이 행 여객선을 타고 가다가 투신자살했다. 왜 하와이 행을 결심했는지는 미스터리다. 그의 짐은 국민회에 보내졌으나 유서는 없었다.
'신한민보'는 '태평양에 장사한 오진국' 이라는 기사에서 "오씨는 미주 한인사회의 창립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자기의 성력을 다해 힘쓰던 사람이라. 한번 오씨가 금년 7월 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에게 무례한 실수를 한 후에 여러 사람의 동정을 스스로 끊고 홀로 비관에 처하였더라"고 썼다.
▲1915년 11월11일 신한민보 1면 - <태평양에 장사한 오진국>
1914년 10월 22일자 신한민보의 '감하의연(感荷義捐)'난에는 오진국이 기부한 의연금의 내역이 실려 있다.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10불 클레몬트 학생양성소 10불
학생연합회 영문보 5불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관 건축비 10불
산넘어 병학교 5불 태평양 중앙학원 5불
호놀룰루 여자 기숙사 5불
그때 오진국은 다른 한인과 동업으로 노스다코타 주에서 서양요리점을 하고 있었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월급이 많아야 20불인 것을 감안하면 두 사람이 합해 냈다 하드래도 총액 50불은 막대한 금액이었다. 그 중 이승만이 관여한 태평양 중앙학원과 호놀룰루 여자 기숙사에 10불, 박용만이 관여한 산넘어 병학교에 5불을 기부했다.
동포가 벌이는 사업이라면 손을 내미는 족족 기부를 했는데 하와이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다.
박용만을 매도하는 이승만파의 어느 누구로부터 듣지 않았다면 박용만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나섰겠는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나오는 '신한민보'는 외려 이승만파의 부당함을 지탄하는 쪽이었다. 따라서 이승만파로부터 하와이 국민회의 파쟁 소식이 전해지자 애오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땀 흘린 돈을 아낌없이 내놓던 그의 애국심이 분노로 폭발한 것 아니었을까.*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출처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원문보기▶ 글쓴이 : 한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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