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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44> 미국 상공에 태극기를 휘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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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186회 작성일 10-12-14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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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과 그의 시대 -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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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우성 박용만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44. 미국 상공에 태극기를 휘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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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생들이 연습했던 비행기들. 기체에 태극 마크와 KAC 표시가 뚜렷하다.

 

한인비행학교에 훈련생들이 탈 첫 비행기가 도착한 것은 6월 중순이었다. 미국 스탠더드 항공사가 제작한 스탠더드 J-1 모델이었다. 꼬리에는 태극 문양이 커다랗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동포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리고 'KAC'라는 영문약자가 동체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걸 Korean Air Corps(한국 공군)의 약자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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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비행학교에서 사용했던 스탠더드 J-1 모델 비행기(레드우드 비행학교)

 

6월 22일자 <신한민보>에는 수일 전에 비행기 2대를 매득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약 2주 후인 7월 2일자를 보면 비행기 4대를 사오게 한다고 쓰여 있다. 7월 6일자 기사에는 비행기 1척을 더 주문하고 무선전신기계도 주문하겠다더라는 내용이 있다. 결국 비행학교가 보유한 연습용 비행기는 모두 5대였음을 말해준다.

 

당시 최첨단 훈련기는 대당 가격이 약 2천 달러 정도. 비행기 구입과 시설비 등으로 김종림은 2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리고 비행학교의 운영자금으로 매달 3천 달러씩 제공했다. 처음 15명의 생도들이 등록했으며 그 숫자는 한 달 만에 24명이 됐다. 두 달 후에는 다시 30명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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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비행학교 훈련생들

 

생도들은 월사금 10불만 내고 교련, 전술, 전략, 비행술, 비행기 수리와 관리, 무선전신학, 영어 등을 배웠다. 교관은 레드우드 비행학교 교관이었던 미국인 브라이언트와 미국인 비행학교를 졸업한 한인들이 맡았다. 미국인 교관에게는 월급 5백 달러가 지급됐다. 당시 일반 노동자의 월급이 약 25달러인 것에 비하면 무려 20배나 되는 거액이었다.

 

7월 5일 비행학교는 동포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인 개소식을 가졌다. 미국인 교관 브라이언트와 한인 교관이 비행기를 타고 시범 비행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비행학교가 정식 개학하기 전 미국인 민간 비행사들은 비행기를 타고 와 활주로에 내렸다. 친선방문을 한 것이다. 윌로우스에 있는 백인 영업회사 혹하이어 회사는 1백 불을 찬조했고 스파야라는 이름의 중국인도 20불을 후원금으로 내놓았다. 동포들은 훈련생들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서도 매달 6백 불씩을 보조했다.

 

개소식에서 노백린과 곽림대가 연설을 했다. "독립전쟁이 일어날 때 우리 공군이 일본에 날아가 도쿄 시내를 쑥대밭이 되도록 폭격하자"고 노백린은 목청을 높였다. 계속해서 그는 생도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는 독립전쟁에 나갈 용사이다. 우리의 적은 일본이다. 일본은 군대를 끌고 와서 우리나라의 황제를 위협하고 강제로 합방이라는 구실로 강점하였다. 그들은 우리 동포들을 노예만도 못하게 학대했고 금수처럼 천시하여 인권유린은 물론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며 참살에 학살을 더했다. 우리의 강토를 빼앗고 생존권을 짓밟은 원수 중의 원수다. (중략)

우리 비행사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 도쿄이다. 독립전쟁이 일어날 때 우리 공군이 일본에 날아가 도쿄 시내를 쑥대밭이 되도록 폭격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꿈에라도 잊지 말고 명심불망하여 언제나 전투출격 태세를 갖추고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훈련이 아니라 실전이다. 실전으로 알고 싸우자. 일기당천(一騎當千)이라는 말이 있으나 우리 비행사는 일대당만(一臺當萬)으로 일본인을 처치해야 할 각오로 훈련하고 싸워 기필코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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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학교 풍경. 1920년만 해도 비행기는 물론 자동차도 흔하지 않았다.

노백린 장군과 훈련생들이 투지를 불태우고 있을 때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영사관은 비행학교를 주시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앞으로 보낸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의 내용은 이렇다.

"지난 7월 7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당일 교장 노백린, 총재 김종림은 장래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은 비행기에 의존하는 것 외의 수단은 없다고 극언을 했다. 현재 연습생은 25 명이고 무선전신 장치가 완전한 비행기가 5대 있다."

노백린은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부임하기 위해 비행학교가 설립된 지 5개월 만인 7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상해로 향한다.

 

그가 떠난 후 비행학교에 불운이 밀어닥쳤다. 그해 10월 비바람 때문에 김종림의 논에 추수를 앞둔 벼들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쌀값도 하락 추세여서 그는 그렇지 않아도 벼농사에서 손을 떼려던 참이었다.

11월 11일자 <신한민보>에 난 기사를 보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해에는 추수를 착수하려 할 시기에 비가 쉬지 않고 찔끔 찔끔 내려 벼가 태반이나 쓰러졌다는 것이다. 벼가 땅에 누우면 추수 경비가 2배 이상이 들게 된다. 본래 한 에이커에 30석 이상을 추수할 셈을 잡고 한 석에 4불이 돼야 이익이 있는 것인데 몇 달 전부터 곡물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곡물회사와 도매점들이 담합을 하는 바람에 2원75전까지 내려갔다. 은행에서 추수경비를 대출해주는 것은 미곡의 현 시세에 기준하기 때문에 이미 땅에 쓰러진 벼를 이전의 2 배가량 비용으로 추수를 할 수도 없었다.

 

김종림은 60만 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을 하는 운명이 됐다. 그러나 그의 명예까지 파산된 건 아니었다.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그 첫해 김종림이 기부한 5만 달러는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2백만 달러가 넘는 거금이다. 미주 동포 최초의 백만장자였던 그는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고귀한 명예를 독립운동사에 영원히 새긴 것이다.

 

본국에서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로 알려진 사람은 안창남(1900-1930)이었다. 그가 일본 도쿄의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한 건 1921년. 이듬해 12월 10일 그는 서울 용산에서 1인승 단발 복엽기 '금강호'를 몰고 시범비행을 했다. 애국심이 높았던 그는 그 후 중국으로 망명했다. '대한독립공명단'이라는 무장항일단체를 꾸려 무력투쟁을 하던 중 1930년 4월 훈련 중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안창남에 비해 한인비행학교는 1920년 7월 7일 6명의 졸업생을 냈으니 1년 앞서 한인 비행사들을 배출한 셈이다. 하지만 한인비행학교는 이듬해 4월 중순경 폐쇄되고 만다. 이 학교 출신 중 세 사람은 중국으로 돌아갔다. 박희승과 이용근은 임시정부가 독립군의 비행병 참위(소위)로 임명했고 박자중은 만주 군벌 장작림의 항공대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미주에 남은 일부는 미군에 들어가 활약했다.

 

박희성은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 이미 망한 나라이지만 국위를 선양했다. 하늘 높이 태극기를 휘날린 것이다. 그 얘기인즉슨 샌프란시스코에서 동북쪽으로 130km 떨어진 새크라멘토 인근에서 1921년 3월 20일 대운동회가 열렸다. 박희성은 윌로우스에서 타던 비행기에 이용근, 홍종만, 정몽룡 세 사람을 태우고 수천 명이 운집한 운동회장으로 날아갔다. 그의 비행기가 나타나자 군중은 하늘에 대고 '헬로우 보이' 하며 함성을 질렀다. 수건을 흔들어대는 가운데 박희성은 태극기 마크가 선명한 비행기를 서서히 착륙시켰다.

 

다음 구절은 <신한민보> 기사를 직접 인용한 것이다.

"수천 명 남녀 군중은 한인 소년 비행대장이라 부르며 태극기도 만져보며 혹은 박희성씨와 악수도 하는 광경은 참으로 우리 비행학생들의 흥기를 돋우었는데 그 군중에서 서서 보는 일인들은 눈이 뚱그래서 보았다더라. 박희성씨는 자기 학비에 보태려고 여러 사람들을 비행기에 태워 돈을 벌기를 예산하고 그 운동장에 간 길이었다. 마침 백인 선생의 비행기 기관이 상하여 우리의 비행기를 좀 빌려주면 자기가 돈을 좀 장만하겠다 하매 우리 학생들은 그 선생의 특별 요청하는 것을 거절할 수 없어 빌려줘 십여 차를 공중에 날은 바 우리 태극기는 비행기가 날을 때마다 광채를 날리매 관광자에게 큰 환영을 얻었다더라."

 

LA에 있는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의 켄 클라인 교수는 한인비행학교가 2년 정도 지속됐고 졸업생은 모두 19명이었다고 말한다. 이 한인비행학교는 동부에 있던 필라델피아 비행학교와 서부에 있던 레드우드 비행학교와 함께 미국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졸업생 중 아무도 일본을 향해 폭탄을 싣고 날아가지는 못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수백 명의 한국청년들이 미군에 지원하여 일본과 싸웠다."

 

클라인 교수의 지적이다. 박용만의 소년병학교나 대조선국민군단도 마찬가지 아닌가. 졸업하자마자 전장으로 출전한 것은 아니지만 독립운동의 동력을 꾸준히 이어 갔고 일부는 미군에 합류하여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가.

박희성은 레드우드 시티의 비행학교에서 4월 10일 비행면허 시험을 치르다가 기체 결함으로 추락, 중상을 입었다. 6천 피트 고공으로 상승하려다 3백 피트 상공에서 추락했다. 기체는 산산조각이 나고 박희성은 30분 동안 기절했다. 하반신의 손상이 심해 사경을 헤맸으나 수술을 받고 겨우 생명을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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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희성(미국이름 Howard Park)이 받은 비행면허증.

 

오래 병석에 누었다가 몸을 추스르자 그는 다시 조종간을 잡았다. 그리고 새크라멘토 비행장에서 5천 피트 고공비행을 성공한 다음 5월 18일 면허장을 받았다. 이용근 역시 4천 피트 상공을 오르고 또 공중에서 8 자를 5번 그려 보인 다음 면허장을 받았다. 공인된 면허장을 손에 쥔 두 사람은 곧 결전의 현장인 중국 대륙을 향해 미국을 하직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Daum 카페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출처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원문보기   글쓴이 : 한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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