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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16 ‘민족 개조론’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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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4,098회 작성일 14-10-0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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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16 ‘민족 개조론’이란 무엇인가
김갑수 | 2014-10-2 13:22


 ‘민족 개조론’이란 무엇인가

1920년대 초반 잡지 <개벽>과 <동아일보>에는 ‘민족적 경륜’이라는 제목의 글이 2년 간격으로 게재되었다. 이른바 ‘민족 개조론’으로 더 알려진 이 글은 <개벽>에 발표되었다가 2년 뒤인 1924년 <동아일보>에 다시 5회에 걸쳐 게재되자 전국적인 파급력을 행사했다.

소설가이자 동아일보 편집국장인 이광수는 아주 요상한 방법으로 조선인의 자존심을 훼손했다.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그의 소설 <무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정>에서 선각자라고 제시되는 인물 이형식은 위선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데다 자아도취까지 심한 인격체였다. 그리고 이형식의 애인 김선형은 유치한 의식을 가진 예수교 장로의 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마치 조선의 신지식인이라도 되는 양 표현된 것이었다. 게다가 이광수는 소설의 말미에서 식민지 조선을 난데없이 미화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런 소설이 영향력 있게 읽히는 당시 조선인의 정신 수준은 사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이광수는 민족을 개조해야 한다는 주장을 외국 사상가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개진했다. 그는 조선이 망한 것은 낮은 민족 수준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 민족은 성격적 결함이 있고 인종적으로 열악하므로 스스로 독립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희생자만 내는 민족 해방 투쟁은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광수의 영향력이 아주 크다는 데에 있었다.

이광수가 빌려다 쓴 프랑스의 사상가 르몽도 직접 빌린 것이 아니었다. ‘민족개조론’은 이미 학계에서 왕성하게 논의된 적이 있는 이론이었다. 선의의 민족개조론은 크게 두 방향이 있었다. 하나는 고유한 문화와 정신을 바탕으로 민족 성장을 도모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구 문화의 보편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민족의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양 심리학의 민족진화론을 차용했는데, 이광수는 남이 차용한 것을 재차용했다. 이를 교묘히 감추기 위해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은 해외 동포의 것인데 자기의 것과 일치하여 발표한다’고 말했다.

이광수는 근거 없는 엘리트 의식 또는 선각자 의식에 젖어 있었다. 그는 대중의 속성을 전혀 몰랐다. 1884년 이래 1924년까지 한국 민족 운동의 역사를 개괄한 이광수는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을 아예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3·1운동에 대해서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자각 없이 추이하여 가는 변화'일 뿐이라고 진단했다.

그렇다면 이광수는 왜 2·8독립선언서를 썼던 것일까? 유학생 지식인 중에서 문사 자리를 지키고 싶은 명예욕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광수는 한국 민족의 속성으로 나태와 허위 봉사심 결여, 비사회적 애국심 등을 들었다. 이와 비슷하게 현상윤은 원망 시기 간사 비천 등이 한국 민족의 병근(病根)이라고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들이 말하는 조선 민족의 범주에 그들 자신은 들지 않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대중은 오로지 교화의 객체일 뿐이었다. 그들은 대중의 역동성을 무모한 군중 심리로만 여겼다. 이광수는 <이순신전>에서 거북선을 만든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천재적 역량이라고 했는데, 왜 그는 당대에 높은 수준으로 발달해 있었던 조선 기술자들의 건축술과 조선술은 간과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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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광수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 - 1950년 10월 25일
1917년 소설 '무정' 발표
1924년 동아일보 편집국 국장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
1939년 조선문인협회 회장


황당한 사람들, 식민지시대 계몽주의 지식인들

- 자기들을 조선인의 범주에 넣지 않았던 조선 사람들 -

식민지 시대 위장된 애국자들은 계몽주의자들 가운데 현저히 많았다. 대체로 그들은 서구 문물에 대해 근거 없는 동경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일본 유학 출신자들이 더 그랬다. 일본 유학 출신인 이광수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분열과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라고 말하면서 ‘이기적이고 나태한 겁쟁이’인 조선 민중은 엘리트 지도자에게 복종하면서 집단에 봉사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광수가 말한 ‘이기적이고 나태한 겁쟁이’는 누구란 말인가? 어느 사회나 그런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이광수는 조선 민중 전체가 그런 것처럼 말한 것일까? 이광수가 존경한 인물은 안창호였다. 그런데 이광수건 안창호건 이유 없이 우리 것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식민지 시대 계몽주의자들의 글은 문장이 부정확했다. 이광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글이 어법과 어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 문장가라고 회자되는 최남선의 문장에도 과장되고 애매한 어휘가 빈번히 쓰였다.

더 놀라운 것은 유학과 한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글에 비해서 해외 유학을 한 계몽주의자들의 글에 어렵고 생소한 한문구가 더 많이 쓰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정확히 전달하기보다는 자신을 멋있게 보이게 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썼다.

계몽주의자들은 몇 개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그들은 하나같이 사회진화론을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그들은 사회가 시간과 함께 발전한다는 스펜서의 사회유기체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은 세상에는 미개화한 나라와 반개화한 나라와 개화한 나라가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은 반개화, 서양은 개화한 나라라고 단정했다. 그에 의하면 아프리카는 미개화한 나라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사회란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가 무조건 발전만 한다면 역사적으로 무수히 확인할 수 있는 문명의 멸망사를 그들은 어떻게 말할는지 의아스럽다. 게다가 서양은 무조건 개화했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 군사적, 경제적 우월이 개화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은 인종에 따른 우열의 서열이었다. 대표적인 개화 신문인 <독립신문>에는 인종 차별 의식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논설이 부지기수로 게재되었다.

다음으로 계몽주의자들은 대부분 집단주의에 휘말려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민족주의는 일제의 국가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없었다. 그들은 개인주의라는 것이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새로운 의미의 국가나 민족, 그리고 개인주의 같은 개념들은 사실 모두 서양에서 이식된 것들이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당연히 개인과 사회의 조화가 있어야 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개인의 발전을 토대로 한 사회 발전을 지향하는 개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사회를 위해 개인의 복종과 희생만을 강요했다. 그들은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의 계몽주의자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거의 모두가 민족개조론에 동조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 계몽주의자들은 두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선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악의의 것이었다. 최소한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은 악의의 확신범들이었다. 또한 서재필은 진작에 조선인이 아니었다. 그는 영달을 위해 조국을 버린 사람이었다. 한편 안창호는 앞의 네 사람처럼 일신의 세속적 영달을 위해 민족개조론을 폈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선의건 악의건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이 얼마나 근거가 박약하고 위험한 것인지를 모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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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
1890(고종 27)∼1957. 문화운동가, 작가, 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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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1878-1958)
1878∼1958, 독립운동가, 친일파.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으나, 일제시대 말엽 대동방주의를 내세우며 친일활동으로 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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