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근·현대사]⑮자유시 참변, 사대의존주의가 빚은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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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⑮자유시 참변, 사대의존주의가 빚은 참상 |
김갑수 | 2014-10-1 11:07 |
자유시 참변, 사대의존주의가 빚은 참상 “야수처럼 싸우다가도 귀신같이 야합하는 게 제국주의” 일본군의 ‘간도출병’은 사실상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봉오동·청산리에서의 패배를 참변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은 러일전쟁 때 투입한 규모 이상의 지상군을 조선독립군 토벌에 내보냈다.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계속된 이 대토벌로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되었다. 이로 인해 간도지역의 조선인 독립운동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일본군이 대대적인 양민 학살을 자행한 것은 독립군과 주민의 연결 고리를 끊기 위해서였다. 특히 연변 자치주의 행정 수도인 연길과 용정 등지의 주민에 대한 가혹 행위는 조선 독립군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들은 간도뿐 아니라 노령 연해주의 동포들에게도 똑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김좌진은 분격했다. 그는 만주와 노령 일대에 흩어져 있는 모든 광복군을 규합하고 일본과 마지막 전쟁을 벌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군정서 포고문을 내려 마을의 장승과 길목의 나무들에 써 붙였다. - 슬프도다! 적의 독균이 간도에까지 이르렀다. 무고한 우리 양민이 적의 독봉 아래 원혼이 된 자 얼마며, 그 많은 재물과 양곡이 화염 속에 사라진 것이 얼마며, 땅은 얼고 찬 기운이 뼈를 깎는데 집과 옷이 없어 굶어 죽은 자가 또 얼마인가? (중략) 이에 아래와 같은 격문을 포고한다. 정의에 민감한 것이 우리 독립군의 정신이요,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은 우리 독립군의 기백이니 어찌 공로를 셈하고 이익을 꾀함으로 대의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이 격문을 읽는 즉시 다시 단결하여 함몰되어 가는 조국을 건지기 위한 대열에 동참함으로써 조국 광복의 대업을 조속히 이루어내자. -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모든 독립군들이 소만국경에 있는 밀산(密山)으로 모여 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그들은 소나무 껍질을 씹어야 했고 심지어는 배낭에 있는 양초를 꺼내 먹기도 했다. 그들은 퉁퉁 언 발로 찬 눈을 디디며 밀산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 중에는 집과 가족을 잃은 유랑민도 많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독립군 부대 총연합군을 결성했다. 자결한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고 김좌진 홍범도 조성환이 부총재로 위촉되었다. 그리고 김규식이 총사령, 이장녕이 참모장, 지청천이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마침 소련의 혁명 지도자 레닌은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혁명파인 적색군이 왕정파인 백색군을 상대로 치열한 혁명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알렉세예푸스크를 함락시키고 스와보드니(자유시, 自由市)로 도시 이름을 바꾸어 해방구를 선포해 놓고 있었다. 이것을 아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군들이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가자는 주장을 폈다. 오갈 데 없고 먹을 것 없는 간도 조선 독립군들에게 이 방법은 유일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군 부대는 이미 소련의 자유시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은 임시정부에서 사회주의 쪽으로 전향하여 이탈한 이동희와 문창범이 주도하는 무장대였다. 문창범은 간도 독립군이 주둔해 있는 밀산에 사람을 보냈다. 문창범의 사령 한창해는 간도 독립군 간부들을 설득했다. 그는 소련에 가서 공산군과 협조하여 일본군을 격퇴시키면 조선인 자치와 해방구를 얻을 수 있으니 함께 들어가자고 했다. 거의 모든 이들이 한창해의 제의에 찬성하는 기류였다. 한창해는 간도 독립군의 길잡이가 되어 흑룡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들어가고 있었다. 간도 독립군들은 자치주를 허락 받아 일본과 독립 전쟁을 치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한창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자유시 입구에 이르렀다. 그들에게는 무기가 공급되었다. 소련의 도움으로 재무장을 이룬 것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소련 측이 태도를 바꿨다. 모든 한국인 독립군을 소련 공산 혁명군 휘하에 복속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동휘 계열은 공산군 지휘 하에 들어가 있었다. 소련 측은 공산 혁명군의 방침을 간도 독립군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며 이에 따를 것을 종용했다. 공산 혁명군으로 들어오지 않는 독립군들은 모두 무장 해제시키겠다는 최후통첩이 전달되었다.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적군과 조선 공산군은 무장 해제를 거부하는 조선 독립군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조선 독립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당황한 독립군들은 강으로 뛰어 들었다 공산군 측은 강물에 빠진 독립군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했다. 결과 조선 독립군의 피해는 사망 272명, 실종 25명, 포로 97명에 익사 31명이 추가되었다. 이른바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사변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사건으로 인해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 무장 투쟁 전열은 거의 흐트러지고 말았다. 이는 1930년대의 민생단 사건과 함께 우리 독립 운동사의 최대 비극이었다. 20여 년 동안 조선 독립 운동사를 빛냈던 홍범도의 부대는 삽시에 없어졌다. 호랑이 잡던 포수 출신 독립군 대장 홍범도는 찬바람 이는 러시아의 소도시에서 극장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죽는다. 소련에게서 백만 루불의 자금을 받았던 사회주의자 이동휘도 몰락을 거듭하다가 시베리아에서 병사한다. 일본 정예 육사 출신 장군 지청천은 소련군에게 체포, 투옥되었다가 임시정부의 석방 노력으로 풀려나게 된다. 여기에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음습한 야합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본과 소련 혁명 정부는 북경에서 이미 밀약을 맺어 놓고 있었다. 일본은 물자가 부족한 소련에게 캄차카 만 연안 일대의 어업권을 넘기는 대가로 소련 영내 조선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해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귀신처럼 야합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속성이었다. 언제나 그들은 약한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물질을 나눠 먹는 식으로 합의 보는 방법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민비와 고종이 러시아를 이용하려다 뒤통수를 맞아 일본에게 목숨과 주권을 빼앗겼던 역사가 지척에 있었는데, 독립 운동가들마저 또 소련을 이용해보려다가 일본의 공작에 궤멸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만 것이었다. 참고 : 법륜스님의 2012년 저서 『새로운 100년 통일 이야기』에는 이 자유시 참변이 마적떼의 습격에 의한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오마이뉴스>의 ‘오마이북’으로 채택된 이 책에는 ‘오연호(오마이뉴스 대표)가 묻고 법륜스님이 답하다’는 부제가 붙어 있기에 나는 이런 황당한 오류를 오연호 대표에게 메일로 통지했으나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
“5만의 제국주의 정예군에 승리 거둔 탁월한 무장항쟁” 간도의 독립군 투쟁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세계 독립운동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승리를 역사에 남겼다. 외세의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군대가 제국주의의 정예군과 맞붙어 두 번씩이나 대첩을 이루어낸 역사는 다른 식민지 국가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이미 구한말부터 의병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 경험을 쌓았던 홍범도는 간도국민회 산하 대한독립군 700명을 지휘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까지 들어온 일본군을 궤멸시켜 버린다. 무장 독립군들의 활약이 국경을 넘어 국내에까지 미치게 되자 일본군은 대대적인 추격 군대를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왔다. 당시 봉오동에서는 독립군 북로군독부 연합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봉오동 골짜기는 계곡이 가팔랐다. 홍범도는 일단 봉오동 주민을 대피시킨 다음 일본군 선발대대가 깊숙이 들어오도록 유인했다. 홍범도의 부대는 매복한 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 본대가 봉오동 입구에서 선발대대와 합세하여 들어왔다. 그들은 입구에서 대오를 정비한 후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섰다. 일본군 본대의 포위망에 걸렸다고 판단한 홍범도는 매복해 있던 병사들에게 사나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3시간여 동안 저항하다가 퇴각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자는 300명이 발생했지만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다. 참패에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관동군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특공대 10명은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 일본군의 토벌 작전을 어느 정도 파악해 놓고 있었다. 일본은 영사관에서 30명의 사망자가 난 것을 중국군의 소행으로 몰아 붙였다. 이것은 군대를 중국 영내에 진입시켜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려는 술책이었다. 일본군은 만주에서 자유로운 무장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국내군을 북상시키고 시베리아군을 남하시켜 북로군정서 토벌에 나섰다. 그리하여 5만이 넘는 대병력에 항공대까지 포함시켜 북로군정서를 사방에서 압박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장백 삼림의 말미에 있는 지린성의 수림은 울창한 원시림이었다. 김좌진의 독립군은 1차세계대전의 정세 변화로 귀국하는 체코 군대와 협상을 벌여 그들의 무기를 사들였다. 체코군으로부터 은밀히 무기를 인수받은 곳이 이 지린성의 원시림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압제를 받고 있던 체코군은 동병상련의 우호감을 실천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소포, 수류탄, 중기관총 외에도 많은 양의 탄약을 그들은 한국군에게 제공했다. 이 체코의 실탄 80만 발이 청산리 전투에서 사용된 것이었다.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한국 독립군의 토벌을 요구했다. 중국군 여단장 멍프이더오는 하는 수 없이 한국 독립군 부대가 있는 곳으로 진공하는 척했다. 그는 조용히 사람을 보내, 한국 독립군에게 지린성을 떠나는 것이 유리하다고 알려 주었다. 한국 독립군 1,200명과 예비군 1,000명은 장백산 깊은 곳에 들어가 실력을 더 기르기로 했다. 그런 다음 낭림산맥을 넘어 국내로 진공하여 전원이 참혹하게 죽자고 모두 모여 맹세했다. 죽음으로 치욕을 씻음으로써 국내의 동포들을 깨어나게 하자는 희망을 그들은 품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장백산 청산리 방향으로 행군하기 시작했을 때, 대규모의 일본군도 청산리를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기병과 보병이 어우러진 북로군정서는 180량의 우마차를 거느리고 있었다. 9월 초순 북극의 초가을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조국의 늦가을과 흡사했다. 뺨을 스치는 만주의 가을바람은 웬 일인지 마치 새털처럼 온화했다. 행군 소리는 계곡에 메아리가 되어 은은히 돌아왔고 행군이 내는 흙먼지는 뽀얗고 기다란 띠를 만들고 있었다. 산을 넘으면 산이고 고개를 넘으면 또 고개였다. 그들은 강을 건너 동포 마을에서 하루 노영을 했다. 연대장 이범석은 광복군 1,200명을 지휘하고 있었고 총사령관 김좌진은 예비군 1,000명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천보산(뎬바오산) 자락을 지나고 있었다. 일본 광산업자가 채굴하는 은동광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소대 병력쯤의 관민합동수비대가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광복군은 거침없이 그들 가까운 곳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끝없는 광복군의 행렬을 보고 파랗게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참모들이 김좌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개들에게는 총알을 낭비하지 말자.” 그 한마디로 행군은 다시 시작되었다. 일본 수비대는 김좌진의 말 궁둥이를 향해 거수경례와 ‘받들어총’을 붙였다. 마침내 그들은 청산리 어구에 들어섰다. 청산리 외곽으로 두 갈래의 큰 길이 있었다. 한 갈래는 중국인 마을로 통했고 다른 한 갈래는 두만강으로 통해, 그 강을 건너면 조국 땅 함경북도 무산군이 있었다. 청산리는 가파른 산 속에 있는 계곡 분지였다. 서북으로는 수림이 적었지만 동남으로는 수목이 빼곡했다. 그곳의 숲은 20미터가 넘는 소나무 잣나무 떡갈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숲으로 들어가면 대낮에도 어두워 앞으로 가기가 힘들었다. 숲의 바닥은 낙엽이 이불보다 두껍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청산리에는 곳곳마다 크고 작은 골짜기가 있었다. 유격전으로는 최적의 지형이었다. 골짜기의 높은 곳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볼 수 있었다. 10리 너머쯤 광야에서 수십 마리의 긴 뱀이 준동하고 있는 것 같은 일본군의 행렬을 본 것이었다. 일본군 제 37여단에, 기병부대와 야포부대가 합쳐진 대규모 병력이었다. 일본군 육군 소장이 지휘하는 정예부대였다. 광복군은 유리한 지형지물을 찾아 신속히 이동을 시작했다. 전위대에게 북쪽 고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벌겋게 물들어 있는 황혼이 피의 전쟁을 예고하고 있는 듯했다. 어림잡아 일본군은 1만 명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아직 지형을 익히지 않은 그들은 공격을 늦추고 있었다. 광복군은 깊은 골짜기라면 모두 찾아 들어갔다. 교포 마을에 사람을 보내 피신하게 하고, 남는 사람에게는 광복군이 투지와 무기를 잃어 무기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형에 익숙한 사냥꾼을 뽑아 적정을 살피고 오라고 했다. 적의 기병대가 이따금씩 출몰하면서 정찰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지휘부에 자주 들어왔다. 광복군 부대는 다시 백운평 골짜기로 전진했다. 적정을 살피고 온 보고를 종합하면 적은 삼 면 포위로 압박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정찰 보고가 들어왔다. 골짜기를 따라 10여 리를 더 들어가면 공터가 있는데 공터 가운데로 실개천이 흐르고 그 옆으로는 깎아 세운 듯한 산이 있으며 주위의 밀림은 사람 하나가 빠져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비좁다고 했다. 김좌진은 예비군을 이끌고 전장에서 멀리 가기로 했다. 불필요한 희생자를 줄이겠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들은 실제로는 절반 이상이 비전투원이었다. 마을에서 독립군이 무기력하다는 말을 들었는지 일본군은 기병부대를 앞세우고 대담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이범석이 지휘하는 광복군은 공터 부근에 매복한 채 일본군을 기다렸다. 그들은 긴장과 호기심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는 첫날밤 신부를 기다리는 것처럼 황홀한 기분으로 적을 기다린다는 병사도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얇은 홑 군복을 입은 그들은 금세 몸이 식고 있었다. 이범석은 불을 피워도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푹신한 낙엽에 몸을 넣은 채로 손과 얼굴을 모닥불에 녹였다. 가벼운 바람이 모닥불의 불씨를 흔들고 있었다. “대장님, 만약 제가 도망가는 걸 보시면 대장님이 권총으로 쏴 버리세요.” 눈과 눈썹이 아름다운 지용호는 17세 소년이었다. 그는 광복군에 들어오고 싶어 나이를 속였다고 실토했다. 그는 이 밤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고 말했다. 밤이 더 깊어갔다 젊은이들은 하나 둘씩 잠들기 시작했다. 이범석은 눈을 크게 뜨고 공터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서편으로 성큼 옮겨져 있었다. 이정(李楨)은 46세의 노령이었다. 키가 크고 말수가 적은 그는 모닥불 앞에 앉아 망연히 달을 보고 있더니 즉흥으로 오언절구 하나를 읊었다. 나뭇잎 떨어져 산 속은 정밀한데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광복군은 한 사람의 예외 없이 나뭇가지로 위장했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었다. 오전 8시 경 일본군 전위부대 1천여 명이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공터 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 중의 많은 수가 건빵을 씹으며 태평스럽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자주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져 있는 말똥을 집었다. 말똥의 온기를 가지고 광복군이 언제쯤 이 길을 통과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물론 말똥이 차가우면 오래 전에 이 길을 갔다고 생각할 터이었다. 그런데 말똥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광복군이 매복을 끝낸 지가 벌써 여러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맨 앞에 오고 있는 장교는 금 줄 견장 네 개를 단 소령이었다. 그는 말똥 만지던 손으로 건빵을 먹기도 하고 그러다가 손을 콧수염에 문지르기도 하면서 걷고 있었다. 이범석의 권총은 콧수염의 심장을 조준하고 있었다. 갑자기 콧수염은 오른 손을 군도에 대며 왼손으로는 망원경을 잡았다. 그러더니 아주 신중한 걸음으로 속도를 늦추었다. 이범석의 총알이 콧수염의 심장을 정통하는 것으로 일제히 600개의 총구에서 연기가 올랐다. 일본군은 어디에서 총알이 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백운평 1차 전투에서 일본군은 수백 명의 전사자를 냈다. 광복군 피해는 부상자 포함 수십 명이었다. 타격을 받은 일본군은 전열을 가다듬으며 장기전에 돌입했다. 광복군은 주력부대가 백운평에 남은 것처럼 위장하고 밤새 120리를 이동하여 일본군의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갑산촌에 진지를 구축한 광복군은 한국인 촌락 천수평에 와 있는 일본군 제 120기병중대를 기습하여 4명의 도망병을 제외한 중대장 이하 전원을 사살하였다. 그들은 상부로 가는 일본군의 정보 문서를 읽어 19사단 2만의 주력부대가 어랑촌에 있음을 알고 전원 옥쇄의 각오로 어랑촌을 향했다. 그들은 어랑촌 전방의 마록구 고지를 점령하여 지리적 이점을 확보한 후, 김좌진의 지휘를 받으며 2주야에 걸친 혈전을 치른 끝에 90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일본군 950명을 더 사살했다. 2,200명의 병력이 5만의 제국주의 정예군과 맞서 2,000명에 달하는 적군을 사살한 청산리 전투는 세계 식민지 항쟁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탁월한 독립전쟁이었다.<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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