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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⑭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라는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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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3,366회 작성일 14-10-08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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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⑭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라는 허상
김갑수 | 2014-9-30 09:45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라는 허상

“7,500명씩이나 죽은 처절한 항쟁을 (3.1)‘운동’이라고 해?”

기미독립선언은 전국적인 파급력을 행사했지만 이는 2·8독립선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독립선언의 배경에 일찍부터 중국과 노령으로 건너가 개인의 영달을 포기한 채 목숨 내놓고 활약한 선각 독립 운동가들의 결정적인 공헌이 있다는 것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1918년 무오년 11월, 국외 지도자급 독립운동가 39명이 망라된 한국 최초의 독립선언문을 내놓은 것이었다. 이른바 무오독립선언문이었고 정식 명칭은 대한독립선언문이었다. 2·8독립선언문은 이 대한독립선언문을 전범으로 삼았다.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게 하라.’고 요구한 대한독립선언문은 2천만 동포에게는 육탄 혈전을 주문했고 일제에 대하여는 무력적 대응을 하겠다고 천명함으로써 일면 선전포고문의 성격을 띠었다.

대한독립선언문은 가나다 순으로 발의자의 명단을 밝히고 있는데, 신규식과 박은식, 박찬익, 조용은, 신채호, 이동녕, 이시영, 김규식, 박용만, 안창호, 여준, 이승만 등 외에도 김좌진 등의 무장 독립 운동가가 합세하고 있어 명실상부한 민족 대표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이 손병희와 최남선을 거치며 온건하게 바뀌면서 내세운 명분이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말대로 과연 조선의 민중은 피를 흘리지 않았는가? 당시에는 과연 누구를 위한 비폭력이고 무엇을 위한 질서 존중이었는지를 회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33인을 민족대표라고 여기는 사람도 최소한 그 시대에는 그리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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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에게는 나약성과 타협성이 있었다. 물론 그들이 무단정치의 공포 분위기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선언서를 작성 배포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구국 행위였다. 그들의 용감한 활동이 전국 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운동 벽두부터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약속한 시간과 장소인 오전 10시와 탑골공원을 일방적으로 바꿔 버렸다. 그들의 말로는 폭동의 우려가 있었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사후 공판의 변론에서 유효하게 작용했다. 그들은 오후 3시, 요릿집 태화관(구 명원관)에서 모였다. 그들은 민중의 동향이 예상보다 거칠어지자 스스로 운동의 주도권을 놓아 버렸다.

그들 중의 다수는 국제 정세를 읽는 실력이 부족했다. 그런 나머지 그들은 적국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정도에 그쳤고, 미국의 도움을 과신하는 타협적이고 의존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33인의 대표 격으로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손병희는 이미 러일전쟁 때 ‘일본이 패망하면 동양이 파멸한다’고 생각하여 일본에 군비 일만 원을 헌납한 일이 있었다.

33인은 운동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했다. 민중은 자기들처럼 무슨 일을 흉내나 내고 그만 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실제로 그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도 않은 채, 한용운의 간단한 취지 설명으로 대신하고 곧장 요리를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포승에 줄줄이 달려가는 모습을 민중이 본다면 그들이 얼마나 감격할 것인지를 헤아리는 두뇌도 없었다. 그들이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인력거 대신 자동차를 요구하자, 일본 헌병의 일부는 혀를 찼고 나머지는 비웃었다고 했다. 그들은 법정에서 ‘사의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손병희)’, ‘무식한 자들이 불온한 일을 할 것 같아서 (박희도)’ 장소를 변경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점으로 볼 때 그들 33인을 민족대표라고 존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들을 더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적합한 칭호를 매겨야 한다. 그들을 가리켜 더 이상 민족대표라고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도 그런 칭호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국내 종교계 대표라는 칭호가 적합하다.

3·1운동의 주체는 재 중국 독립 운동가들과 전국 방방곡곡의 초동급부들이었다. 그들은 비폭력 타협주의의 한계를 깨고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했다. 그들은 탄압에 대한 반발에서 그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폭압적 본질을 피부로 느낀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3·1운동’이란 용어에도 문제가 있다. 조선인들은 3, 4월 두 달에 걸쳐 200만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7,500명이 생명을 조국에 바쳤다. 33인을 보고 비웃었던 일본 헌병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뭉쳤고 그 뭉친 사람 중에서 지도자가 나왔다. 33인은 길어야 3년의 옥고를 치렀지만 학생과 농민 지도자들은 10년, 15년씩이나 되는 무거운 형량을 받았다. 그러므로 3·1운동은 기미평민항쟁쯤으로 용어 변경을 해야 마땅한 일이 아닐까 한다.

(부언) 한국의 독립운동이 미국에 처음 보도된 것은 1919년 3월 13일의 일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일본의 발표가 왜곡 축소되었음을 지적했다.


책과 종교는 제국주의 침략의 원흉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위서다”

우리가 흔히 기행문이라고 알고 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사실상 기행문도 아니며 견문록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리서나 박물지 또는 풍습 보고서로 보는 게 옳다. 마르코 폴로는 아예 중국에 가지도 않았거나 또는 갔더라도 아주 지엽적이고 소극적인 여행만 한 것처럼 보인다.

『동방견문록』의 원래 제목부터가, ‘디스크립션 오브 더 월드’ ‘즉 세계에 관한 서술’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태리 상인의 아들인 마르코 폴로가 감옥에서 구술했다는 동방견문록은 동양에서 보물을 얻고자 하는 서양인들의 물질욕과 맞물려 세계적인 저작물로 부각되었다. 당시, 즉 13세기 유럽의 대중에게 알려진 중국은 '비단과 향료의 지대'였다. 이런 가운데 중국에 관한 생생한 경험담이라고 해야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고 보고 부풀렸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마르코 폴로가 원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꽤 높은 벼슬까지 했다는 것은 유럽 사람들의 주장일 뿐 중국의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다. 마르코 폴로가 정말 황제의 칙사였다면 반드시 중국 기록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중국을 실제 답사했다면, 답사 중 최소한 두 번은 넘었어야 할 만리장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이상하다.

마르코 폴로는 10년 이상 중국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런 그가 당시 크게 발달했던 인쇄술이나 서적에 대해서도 한마디 안 한 것으로 보아 그의 경험을 사실이라고 믿기 힘들다. 아니면 그는 소인배 장사치여서 그런 문화나 유적에는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가 서양에 전한 것은 '밀가루 면발' 하나는 확실하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밀가루를 부풀려서만 먹었지 반죽해서 국수로 만들어 먹지 못했다.

이태리 요리 중에 스파게티란 게 있다. 이것은 『동방견문록』에 소개된 자장면을 보고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자장면에서 ‘자’는 튀긴다, ‘장’은 된장을 뜻한다. 그러니 스파게티는 서양 자장면인 셈이다.

문제는 『동방견문록』의 파급력에 있었다. 이 책의 영향으로 콜럼버스라는 약탈자가 아메리카 대륙에 간 것이고, 이후에도 이 책은 서양인들의 목적과 의도에 부합되도록 수없이 윤색, 첨삭되어 동양에 대한 호기심과 탐욕을 끊임없이 부추겨 왔다.

사실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책들은 바로 이런 책들이다. 동양이 무조건 신비하다고 말하는 ‘무선동의 선동서’들 말이다. 같은 논리로 말한다면 동양인에 대한 서양인의 온정주의, 동양인을 지원하는 서양인들, 동양인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들, 이들이야말로 미상불 ‘보이지 않는 적들’이라는 생각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보통 비단길이라고 하면 육로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비단길은 세 개였고 그중 바다 비단길이라는 것도 있었다. 바다 비단길은 중국 남동해안에서 시작하는 루트였다. 한국의 경주, 개경, 서경과 연결되는 중국의 항주 영파 온주 광주의 무역선들은 베트남의 호이안과 밀라카 왕국을 통과하여 인도의 마드라스 콜롬보 그리고 페르시아 만의 바스라와 홍해 연안의 아덴과 제다를 지나 알렉산드리아 베네치아 포르투칼까지 연결되었다.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바다 비단길은 제국주의 침략의 정통 코스로 바뀌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과 갈등도 많았지만 선진 문화를 전래해 주는 중국에 대하여 대체로 은의를 입고 있다고 여겨 왔다. 하지만 은의에는 양날이 있게 마련이다. 중국, 한국과 달리 일본과 서양은 그 은의를 다른 날로 갚은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인류 역사에서 분명한 것은, 이민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동양과 서양은 질적으로 격차가 있었다는 점이다. 서양이 항해술이 앞서서 동양을 정벌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허구에 불과하다. 낙타 한 마리는 270킬로그램의 물품을 등에 지고 사막과 초원을 타박타박 걸어야 했지만, 이미 8세기 후반 중국의 300톤 급 다우선 한 척은 600마리 분의 낙타 등짐과 550명의 선원을 함께 실어 나를 수가 있었다. 요컨대 당대의 송과 원은 벌써 세계 초유의 해상 강국을 이뤄 놓고 있었다.

원의 뒤를 이은 명나라는 1405년부터 28년 동안 서양 원정을 벌여 수군 제독 정화(鄭和)가 지휘하는 막강한 해병대가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진출했다. 정화의 남양 원정군은 중화제국의 위용을 한껏 과시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7회나 서양 원정에 성공하고 돌아왔다. 수십 개의 선단으로 조직된 100여 척 중대형 함선에는 20,000명의 정예군이 타고 있었다. 심지어는 317척의 함선과 28,000명의 병사가 일제히 출동한 적도 있었다.

이것은 당대 세계 최강의 무적함대였다. 그들은 베트남 해안을 통과하여 호르무즈 해협과 홍해 그리고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케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원정을 한 것이지 정벌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황제의 하사품을 수여하고 답례 진상품을 받아왔다. 요컨대 그들의 원정 목적은 ‘시혜와 과시’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주변국들에게 문화를 주고 중화 중심의 질서에 동참토록 하려는 외교 사신들의 행차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동양은 서양에 나침반과 화약과 인쇄술을 전해 주었다. 나침반이란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물건이다. 나침반이 없으면 항해 중인 선장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안개나 어둠이나 폭풍은 그들을 절망하게 만든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육지가 보이는 연안을 따라 항해를 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기원전에 밀짚과 나무로 묶은 지남철을 이용했다. 동서양에서 지남철과 컴퍼스는 자장면과 스파게티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서양인들은 컴퍼스로 방향을 측정하면서 동양 정벌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동양에서 화약이 사용된 것은 2천 년 전 일이다. 고려에도 이미 화약이 있었다. 동양과 달리 서양인들은 총과 대포를 주로 만들었다. 그리고 총과 대포는 해상 원정대의 약탈 무기가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서양인들은 책까지도 동양에 대한 침략 수단으로도 사용했다. 『바이블』 역시 그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저 유명한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에서 바이블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인데, 기실 이 책의 내용은 ‘영국 근대문명에 대한 예찬과 식민지 침략의 정당성’ 외에는 없다.

은의는 양날로 돌아오는 속성이 있다. 어떤 날로 은의를 갚느냐는 당사자의 심성과 교양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제국주의 서양과 일본은 전형적으로 배반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 현저히 많은 집단인 것만은 틀림없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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