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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⑪기생을 통해 본 망국 조선의 풍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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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3,252회 작성일 14-09-3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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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⑪기생을 통해 본 망국 조선의 풍속도
김갑수 | 2014-9-26 08:57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조선을 패망시킨 제국주의라는 것이 뭔지 알아야”

제국주의의 어원인 임페리엄(imperium)은 원래 ‘법에 의한 명령’을 뜻한다. 그런데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로마에 의한 타 민족 지배’라는 뜻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이 말이 세계화된 것은 1870년 경 유럽에서였다. 당시 영국의 어느 신문은 나폴레옹의 몰락을 보도하면서 나폴레옹의 제2제정을 가리켜 처음으로 제국주의라는 용어로 칭했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는 전제정치와 같은 개념으로 쓰인 것이다.

제국주의는 다른 민족을 침략한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와 대립되고, 전제정치라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대립된다. 그런데 유럽의 열강과 일본은, 자국민에게는 자유를 누리게 하고 민족주의를 강화하면서 다른 민족에게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억압했는데, 바로 이 이중성이 곧 제국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제국주의란 ‘주의’라고도 할 수 없으며 쉽게 말해 ‘강도 근성’과 같은 것이다.

자연과학의 발달을 산업혁명으로 연결시킨 유럽 국가들은 예전에 없던 생산의 과잉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제품이 팔리지 않는다면 생산자는 고스란히 손해를 떠안게 될 판국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게 되었는데, 시장을 찾고 보니, 그곳에는 값싼 원료와 노동력까지 있는 게 아닌가?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개척이라는 미명하에, 군사력이 약하고 빼먹을 게 많은 나라 순서로 침략했는데 이것이 곧 식민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식민지를 갖고 있는 나라를 ‘제국’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그곳을 점령하고 보니 노예와 여자까지 얻을 수 있게 되어서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었겠는가?

자본주의 체제 착근에 성공한 영국은 19세기 중엽 이미 자국 영토의 75배를 넘는 50개 이상의 식민지를 경략하고 있었다. 그들은 군사력을 앞세워 세계 전역에 걸쳐 통상권을 지배하면서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그들은 ‘대영제국의 영토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더욱 황당한 말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였다. 물론 이 말은 그들이 얼마나 인도를 황홀히 여겼는지를 역설적으로 짐작케 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 말에는 인도를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하는 영국인의 강도 근성이 나타나 있었다.

이런 영국도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독일, 미국, 프랑스 등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유럽과 미 대륙은 바야흐로 자본주의 강국끼리의 각축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1870년대 초부터 시작된 유럽의 경제 불황은 이런 경쟁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제국주의의 종주국 영국은 광범위한 식민지의 결속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에즈 운하 주를 대량으로 사들이고 인도 지배를 강화했으며 영연방 자치령을 본국과 결합하려 하였다.

한편 불황이 장기화되자 유럽의 제국들은 더 많은 식민지를 얻으려 하는 과정에서 빈번한 분쟁과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특히 1880년부터 30여 년 동안 아프리카를 나눠 먹는 과정에서, 외교적 대립과 군사적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1898년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 군대와 대령이 통솔하는 프랑스 군대는 수단의 나일 계곡에 있는 파쇼다에서 일촉즉발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것은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교차점에서 충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금세 야합하기로 합의했다. 영국은 이집트를, 프랑스는 모로코를 각각 먹는다는 것으로 묵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독일이 모로코에서 프랑스에 시비를 걸었다. 추악한 이전투구였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지역 전쟁도 결국 식민지 분할 전쟁이었다. 남의 나라, 남의 영토를 놓고, 선점한 제국과 우리에게 부스러기라도 떼어 달라는 후발 제국이 벌이는 분쟁과 대립은 더러운 아귀다툼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제국들은 식민지 경영의 명분으로, 대상국의 질서 유지와 문명 혜택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약탈과 학살로 나타났다. 한 예를 들자면 벨기에의 군인은 고무 채집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콩고 주민의 팔 다리를 잘랐다. 이런 일들은 식민지 침략과 지배 과정에서 어디서든 예외 없이 빈번히 나타났다.

영국은 금과 다이아몬드가 새로이 발견된 땅을 빼앗으려고 보어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보어인 게릴라들은 무섭게 저항하며 영국군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이른바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할퀸 것’이었다. 그러자 영국은 보어인 섬멸 작전을 펼쳤다. 영국은 인구 50만, 병력 7만인 이 작은 나라에 45만 명의 정규군을 투입하여 모든 전답과 가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비전투원이 대다수인 보어인 21만 명을 집단 수용소에 넣었다. 시설과 대우가 최악이었던 이 수용소에서는 불과 열 달이 안 되어 2만 구의 시체가 처리되었다.

시간이 가면서 제국주의의 배후에는 과잉 생산자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그림자를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대 금융 자본가와 무기 산업자들이었다. 전자는 금융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손쉽게 전환하기 위하여, 후자는 매출의 지속과 확대를 위하여 극우주의자들과 결탁, 유착했다.

조선이 망한 1910년 시점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어림잡아 각각 20개국 전후, 독일과 스페인과 러시아는 10여 개국, 미국 네널란드 벨기에는 5개국 정도의 식민지를 차지했고, 이 밖에 이태리 포르투칼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고 일본 등이 제국주의 열강에 합세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일본은 동양에서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기생을 통해 본 망국 조선의 풍속도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기생에게 원했던 것은…”

- 민중화의 시대다. 학문도 민중화, 정치도 민중화, 모두가 다 민중화하는 시대니 어찌 기생이라고 민중화가 아니 되랴? 옛날은 관기라 하여 군수, 사또가 아니면 데리고 놀지 못하였던 기생도, 일조에 양반 정치가 끊어지면서 민중화되고 말았다. 인제는 개 쌍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 명기를 하룻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있게 되었다. - (1900년대 어느 신문 독자투고 글)

여기에는 심기가 불편한 어느 양반의 불만이 담겨 있다. 나는 이 글이 의외로 고약한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이 양반 독자는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기생을 독식했던 조선조 관리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 무엇보다도 고약한 것은, 제가 못 가지는 것을 가지는 자에 대한 증오가 있다는 점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기생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면서 기생에 대해 큰 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 거슬린다. 기생이란 돈이 필요해서 그것을 직업으로 삼은 여자들이다. 물론 그 직업을 좋게 볼 사람은 거의 없을 터였다. 예로부터 세속적인 것을 가장 비천하게 보아 온 것은 조선인의 도덕적 전통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속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세속적인 가치를 많이 추구할 때 하는 말이다. 세속적 가치에는 아주 여러 가지가 있다. 권력과 명예는 물론 학식이라는 것도 크게 보아 세속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돈은 가장 노골적으로 세속적인 가치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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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들은 몸뚱이를 이용하여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니 속된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돈을 필요로 하는 기생을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차지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그리 큰 잘못은 아니다. 그걸 관직이나 신분을 이용하여 차지하는 군수, 사또들은 사실상 기생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왜 기생들이 돈 있는 남자를 따르는지를 아는가? 기생들은 ‘돈을 주는 남자는 정직한 남자’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다. 여자는 대체로 순수한 남자를 가장 좋아하고 다음으로는 정직한 남자를 좋아한다. 그런데 순수한 놈이 어디 기방 같은 데에 가겠냐? 그래서 정직한 남자를, 즉 돈을 주는 남자를 그들은 선택하는 것이다. 정직한 남자라는 생각이 드니까 몸도 주고 마음까지도 주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생이 제일로 싫어하는 남자가 누군지 아는가? 돈 아닌 것으로, 다시 말해서 신분이나 교양이나 순수를 가장하여 접근하는 남자들이다. 이런 남자는 십중팔구 기생만도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 왕실은 300여 명의 기생을 해고했다 그리고 1908년 일제는 기생 단속령을 내렸다. 관기가 없어지면서 수많은 지방 관기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서울, 즉 한성은 기생으로 넘쳐났다.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기예만 하던 예기들도 매음을 불사하게 되었다.

기생을 가장 밝힌 것은 일본인 무역상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전통미를 간직하고 있는 기생을 좋아했다. 중국인들은 조선인 기생에게 예술적 기생, 즉 ‘끼’나 프로페셔널쉽을 요구했다고 했다. 다음으로는 미국인들이었다. 미국인이 조선에 많았던 것은 아니다. 미국인은 선교사를 비롯한 기독교 관련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미 공사관 의사였던 알렌이 고종을 회유하여 얻어낸 운산 금광에 종사하는 미국인도 있었다. 미국인들은 터무니없는 것을 조선 기생에게 기대했다. 그들은 ‘서구적인 고상한 품격’을 요구한다고 했다.


일제의 경제정책, 그것은 ‘강탈’이었다

“왜 그 시대에 천석꾼 만석꾼이 출현한 것일까”

조선 민족은 일제 강점 이후 굶주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인구가 1910년대 후반에는 75%를 넘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라는 것은 조선의 토지를 빼앗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일제는 왕실이나 공공 기관의 토지를 일차적으로 강탈했다. 다음으로는 여러 사람이 주인인 공동 명의의 토지가 약탈 대상이었다.

일제는 빼앗은 토지를 일본인들에게 헐값으로 되팔았다. 그러자 왕조 시대에도 보장되었던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은 물론 경작권마저 몰수되었다. 그들은 지주의 소유권만 보장함으로써 대부분의 농민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소작료는 지주가 원하는 대로 바쳐야 했다. 자신의 세금까지도 소작농에게 전가하는 지주가 많았다. 이 모두가 지주만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토지조사사업의 독소 조항 때문이었다.

경작권 보장과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농민이 나타나면 일제는 무조건 지주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일제는 지주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지주는 토지를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었으며, 토지를 더 구입하려는 지주에게는 자금 융자도 쉽게 해 주었다. 지주의 땅이 많아질수록 소작비로 거둬들이는 쌀도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일본으로 들어가는 쌀의 대부분이 소작비로 받은 것이었다. 조선 쌀값은 당연히 치솟았고 지주들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천석꾼과 만석꾼은 일제의 토지 수탈 정책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산물이었다. 어쨌든 지주들의 ‘태평천하’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쌀값 인상은 농민에게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했다. 빚에 시달리지 않는 농민이 거의 없었고 추수와 동시에 빚을 갚아야 했으며, 빚을 갚고 나면 식량이 떨어지고 그래서 또 빌려먹게 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농민들의 식생활은 극도로 조악해졌다. 그래서 그들의 소원은 모두가 비슷해져 가고 있었다.

“쌀밥에 고깃국 한 번 먹어 봤으면…”

일제의 토지 수탈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내세워 자행되었다. 그것은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보고 배운 것이었다. 그들은 희고 윤기 있는 조선의 쌀을 본국으로 빼돌리는 대신 조선인에게는 누렇고 거친 만주 잡곡을 들여와 팔아먹었다. 결과 조선인은 일본인이 먹는 쌀의 반 정도로 연명해야 했다. 그나마도 없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때우며 하루해를 넘겨야 했던 보릿고개의 조선인들은 배설할 때 수도 없이 똥구멍들이 찢어졌다. 그래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자조적인 말이 전국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또 닥칠 보릿고개가 두려워진 농민들은 하루라도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눈보라 치는 북방이 안 두려울 리가 없었다. 그러나 얼어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누더기 봇짐들이나마 나누어서, 남편은 짊어지고 아낙은 인 채 까마득히 먼 간도 땅과 연해주를 향하여 눈 위에 바들바들한 발자국을 남기며 사라져 갔다. 조선의 농촌에는 날이 갈수록 빈 집이 늘어갔다.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 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 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쫒아 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이용악 <낡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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