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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⑩ 한국 가톨릭은 105인 사건의 공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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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3,629회 작성일 14-09-30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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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⑩ 한국 가톨릭은 105인 사건의 공범이었다
김갑수 | 2014-9-25 09:05


한국 가톨릭은 105인 사건의 공범이었다


“오늘의 추기경들, 뿌리는 제국주의 선교사”

1911년에 발발한 ‘105인 사건’의 명칭은 1심 재판에서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는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 ‘선천사건(宣川事件)’ 등으로도 불렸는데, 이것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직후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을 날조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비교적 잘 알려진 사건이고, 이로 인해 민족주의 단체 신민회가 해산되기에 이르지만 이 사건의 배후에 한국 가톨릭이 숨어 있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정진석 등 오늘의 한국 추기경들, 그들은 이 글에서 논의되는 제국주의 선교사들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1910년 조선을 병합한 제국주의 일본은 주한 일본군 헌병대 사령관을 총독부 경무총장에 겸직 임명했다. 연쇄적으로 각 도의 헌병대장은 해당 도의 경무부장을 겸하게 되었다. 그들의 제1임무는 조선 독립운동의 뿌리를 뽑아 근원을 없애는 데에 있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안중근을 서둘러 총살시켰다.

그들은 정치적 성향을 띠는 조선인의 결사체라면 무조건 적발하고 처단했다. 그들은 불온하게 보이는 사람이 발견되면 일도 벌이기 전에 잡아들였다. 그들에게 고문당하는 조선인들의 비명과 신음, 그리고 그 가족들의 한숨과 탄식은 금수강산을 잿물로 물들여갔다.

제국주의 일본은 모든 집회를 금지했고 한글 신문을 폐간했으며 학원 사찰을 실시했다. 또한 그들은 회사령을 강행하여 민족 자본을 억압했으며 조선인의 광산과 어장을 탈취했다. 그들이 만든 철도와 도로와 항만과 화폐는 모두 식민지 조선을 갈취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이 실행한 교통과 통신과 금융과 재정은 전부 식민지 예속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방책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두려움이란 죄의 무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제국주의 총독 데라우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들었다. 조선인들의 저항은 현저히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면 마음이 더 편해지리라 생각하고는, 가을쯤에는 개마고원쯤으로 사냥이나 가려 했는데 그는 왠지 내키지 않아 취소해 버렸다.

총독 부임 후 데라우치는 식욕이 떨어졌는데, 어느 때는 갑자기 폭식을 해서 소화불량에 걸리기가 일쑤였다. 그는 생각치도 못했던 불면증이란 것을 얻게 되어 핏발 선 눈으로 회의를 주재했다. 부족한 수면 때문인지 책상 앞에서 시도 때도 없이 조는 모습이 비서들에게 목격되기도 했다.

데라우치는 저항인들의 씨를 말리지 않아 그런 것이라고 간주해 버렸다. 아직도 불온한 자들이 있어 그들이 꾸밀지 모르는 흉계에 자신이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경호 경비를 대폭 강화했다고는 하지만 자기라고 해서 이토 통감 짝이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거였다. 게다가 안중근이라는 놈의 가족과 친구들이 러시아에 살고 있는 이상 그런 일은 언제라도 일어날 개연성이 있었다.

사실 데라우치의 불안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보안법, 신문지법 등의 악법은 조선인의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계몽운동까지 지하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총독부 탄압으로 와해된 애국단체의 회원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장기적인 포석을 하고 있었다. 박은식, 신채호, 안창호 등은 종래의 입헌군주제를 자유공화체제로 전환하여 새로운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처음 그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이런 결사조차도 허용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점조직의 비밀 결사체를 만들고 신민회라고 이름 붙였다.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신민회(新民會)는 국민을 새롭게 만들어야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결사체였다. 서북지방의 기독교인이 압도적 다수로 참여한 신민회의 회원 수는 800명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신민회는 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정주에 오산학교, 평양에 대성학교, 강화에 보창학교 등을 세웠다. 그들은 강연과 출판에도 힘을 쏟았다. 그리고 민족 산업 부흥에도 관심을 기울여 도자기 회사 등을 만들었다. 그들은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여는 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애국 인사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면서 신민회는 와해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주동자 급들은 뿔뿔이 해외로 망명했고 양기탁, 김구 등을 비롯한 국내파들이 암중모색하고 있던 차였다.

안명근은 사촌이면서 동지이기도 했던 안중근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중근은 쾌거를 이루고 장렬히 순국했는데 반해 자신의 삶은 기회주의적인 것이라는 가책이 그의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자리 잡고 있었다. 때를 잡아 데라우치를 자기 손으로 처단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있다가 황해도 신천에 사는 한 부호의 밀고로 체포 직전까지 갔다가 도망친 후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한편 안명근은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에게 성체 성사를 해주었던 빌렘 신부를 믿고 따르고 있었다. 빌렘의 상관은 뮈텔이라는 프랑스 선교사였는데, 그는 대부분 선교사들이 그랬듯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뮈텔은 토마스라는 세례명까지 얻은 안중근을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고 부정했으며, 안중근의 성체 성사를 해 준 빌렘 신부에게 정치적 문제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업무 정지 처분을 내린 제국주의 선교사였다.

뮈텔은 빌렘에게 안중근 집안의 일을 소상히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그 내막을 알 리 없었던 안명근은 빌렘에게 데라우치 척살 계획을 고해했는데, 놀랍게도 이것이 빌렘을 거쳐 뮈텔에게까지 전달되었다. 뮈텔은 즉각 총독부 경무총장 아카시에게 통지했다. 이를 통하여 한국 가톨릭이 무엇을 챙겼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다. 그런데 당시 가톨릭은 명동 성당 토지 불법성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였다.

데라우치는 가능한 모든 정보망과 경찰력을 동원하여 안명근 체포 작전에 나섰다. 한편 지명수배되어 피신 중이었던 안명근은 데라우치가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척살하기 위해 권총을 숨기고 선천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105인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데라우치는 안명근을 빌미삼아 조선 민족주의의 씨를 말리고 싶었다. 그래서 냄새가 나는 조선인은 모두 잡아들여 안명근과 공모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기로 했다. 총독의 서슬에 질린 관리들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무분별하기 짝이 없는 검거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무려 600명이 불법 체포되어 고문을 견뎌야 했고 그 중 105인이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구미의 식민지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었던 대규모의 지식인 압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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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 사적 제258호. 1898년에 준공된 건물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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