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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⑧헤이그 밀사와 정미7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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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이엘
댓글 0건 조회 2,905회 작성일 14-09-3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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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와 정미7조약
궐석재판 “이상설 사형, 이준·이위종 종신징역”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한국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고종의 마지막 노력이 시도되었다. 그는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 고종은 회의가 열리기 두 달 전인 4월에 정사 이상설, 부사 이 준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회의 참가 주선을 요청하는 친서를 주어 보냈다.

두 사람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를 거쳐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전했다. 을사조약 이전 러시아 공사관 서기였던 이위종은 영어 불어 노어에 능통한 26세의 젊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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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3인,좌로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사람이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1907년 6월 25일이었다. 그들은 26개국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만나 황제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여 을사조약의 무효화를 회의 의제에 상정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일본은 현지에서 즉각 회의 참석 방해 공작을 펴는 한편, 국내에서는 고종을 연금하여 책임 추궁에 들어갔다. 러시아 대표는 주최국 네덜란드에 책임을 전가했고 네덜란드는, ‘을사조약은 각국 정부가 이미 승인했으므로 한국에는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한국 대표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하였다.

구미어에 능통한 청년 문장가 이위종은 각국의 언론인들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알리는 절박한 호소문을 영, 불, 노어로 각각 만들어 배포하면서 직접 연설도 감행했다. 이위종의 격문과 연설은 각국의 흥미와 관심을 삽시에 얻어냈다. 감동 받은 각국 대표들은 한국의 입장을 동정한다는 결의문을 박수로 채택했고 한국 대표의 연설 문안은 헤이그 신보에 보도되어 국제 여론을 환기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치적 성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한편 일본 통감부는 궐석 재판을 열어 이상설에게 사형을, 이 준과 이위종에게 종신 징역을 선고했다. 부사 이 준은 지병과 화병이 겹쳐 현지에서 분사하고 말았다. 그는 일본의 미움을 사 평리원에 기소되었을 때, 황제가 특사로 석방시킨 적이 있었다. 민영환과 비슷한 경우였다. 그리고 죽음으로 특사에 보답한 점도 민영환과 같았다. 이역만리에 이 준을 묻으며 이상설과 이위종은 눈물을 뿌렸다. 그들은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평생 망명 생활을 하며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다. 이어 즉위한 아들은 망국의 황제답게 모든 침울한 굴욕을 체험하게 되고, 역시 비운의 황제답게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24일에 맺어진 정미7조약으로 일본의 내정권이 합법화되고 잇달아 발표된 광무보안법은 한국의 모든 언론에 굴레와 고삐를 씌웠다.


의병 항쟁의 불길로 타오른 조선의 군인들

“나라 잃은 군인, 만 번 죽어도 서럽지 않다.”

1907년 8월 1일, 제국주의 일본은 한국 군대의 해산령을 내리게 됨으로써 그들의 한반도 병합은 마지막 수순을 밟아갔다.

하세가와 일본군 사령관은 대한제국의 친일 대신들을 소집했다.
“조선 군대는 우리 천황 폐하의 은혜를 모릅니다. 조선 신민이 천황 폐하의 아름다운 시책을 온전히 받는 데 조선 군대가 방해가 된다면 경들은 어떻게 함이 옳다고 보오?”
“말씀은 옳지만 사나운 조선 군인들의 반발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우리 천황 폐하의 군대가 그들을 무마할 것이오. 그러니 경들은 조선 황제의 재가를 받도록 하시오.”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마지막 절차로, 대대장 이상의 장교를 일본군 사령부로 집합시켰다. 한국 군대 제 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은 이미 고종황제의 강제 양위 때에 부하들을 규합하여 항거하려 했다가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여 포기한 적이 있는 고급 장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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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 해산에
죽음으로 저항한
조선 군대 대대장
박승환

그는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일본 사령부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서소문 병영을 부하들과 함께 끝까지 지켰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병영 사수의 의지를 천명하고 싶었다. 마침내 군대 해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왔다.

박승환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이는 우리 황제의 뜻이 아니다. 매국 대신들의 소행이다. 그러니 나는 따를 수 없다.”

그는 붓을 들어 먹을 적셨다. 굵은 눈물이 손등에 뚝뚝 떨어졌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써내려갔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서럽지 않다.’

이어서 그는,“대한제국만세!”라고 외쳤다. 그러고는 권총을 꺼내 이마 옆으로 가져갔다. 수십 명의 부하가 지켜보는 가운데 지휘관의 총성 한 발이 청아한 가을 하늘을 찢었다.

흥분한 부하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들어가 탄약을 모조리 꺼내왔다. 얼마 후 일본 군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한국 군인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했다.

군인들은 서소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이 벌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의병들이 가세했다. 지게를 벗어 던진 노동자들과 교복 차림의 학생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상인들까지도 봇짐을 내던지고 합세했다. 그리하여 서소문 전투는 일약 격렬한 무장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이 자리에는 신규식과 노백린이 있었다. 노백린은 신규식이 다닌 육군사관학교의 교육국장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격려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적군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들은 부둥켜안기도 했다.

일제는 사전 증파해 두었던 대규모의 병력을 무차별 투입했다. 그들의 화력은 대한제국의 군대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우세했다. 어쩔 수 없이 한국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수도 없이 많은 군인과 시민들이 ‘대한제국만세’를 외치며 쓰러져 갔다.

일찍이 대규모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은 민종식, 최익현 같은 전직 관리나 양반 유학자였다. 그들은 일제가 임진왜란과 을미사변의 주범임을 민중에게 환기시켰다. 그러자 이름 없는 농민들이 너도 나도 자원해 왔다. 더 많은 무리는 따로 의병군을 조직하기도 했다. 한편 신돌석은 태백산을 중심으로 활약한 대표적인 평민 의병이었다.

유학자 최익현의 체포는 오히려 의병들의 투혼을 되살려 내었다. 그는 줄에 묶여 대마도로 끌려갔다. 그때 최익현이, ‘왜놈 땅을 밟지 않겠다.’며 버선에 흙을 담아 신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또 그는, ‘목이 타서 죽더라도 도적의 것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대마도의 토굴에 갇혀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끝내 굶어 죽었다.

의병 항쟁은 해산 군인들의 참여로 방방곡곡에서 일었다. 포수들은 멧돼지를 쏘던 총부리를 왜적과 친일 지주에게 돌렸다. 그나마도 없는 농민들은 곡괭이와 쇠스랑이라도 어깨에 메고 나왔다. 일본군과 친일 정권은 궁지로 몰렸다.

그들은 의병이 하나라도 나타나면 마을 전체를 불태웠고 인근 지역 양민들까지 집단으로 학살했다. 끝내 의병들은 고립되고 위축되었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하고 스스로 해산했다. 하지만 이들의 투쟁은 일제의 강점을 수개 년 지연시켰으며 지식인들을 각성시켰다.

어느 외국인은 한국 견문기에다 두 명의 의병 사진을 싣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보았다. 여섯 명이 가지고 있는 총 중에 다섯 개가 제각기 다른 종류였으며, 그 중 어느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전혀 희망 없는 전쟁에서 죽음이 이미 확정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청년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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