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근·현대사]⑦ ‘역사의 신’을 모독하는 박근혜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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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⑦ ‘역사의 신’을 모독하는 박근혜 정권 |
김갑수 | 2014-9-19 12:48 |
‘역사의 신’을 모독하는 박근혜 정권 독립운동의 제3열, 3열이라고는 하지만 이들 만주파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하며 체계적이고 자주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한 세력이었다. 이홍광, 이동광, 허형식, 최용건, 김책, 김일성, 최현, 강건 등이 대표성을 띤다. 이들 중에서 살아남은 최용건, 김책, 김일성, 최현, 강건 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권력 핵심이 되었다. 이들은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군과 합작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조선인들의 자질이 워낙 출중하여 따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호칭이 부여되기도 했다. 항일유격전 중에서 보천보 전투와 간삼봉 전투는 특히 유명한데 이 두 전투는 모두 김일성이 지휘한 것이다. 김일성은 논리적이면서도 친화력과 리더십이 있어서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모두 인정받았다. 최용건은 김일성보다 13살, 김책은 김일성보다 9살이나 많지만 러시아 령 하바로스크에 합류한 이후부터 줄곧 그를 지도자로 받들며 협조했다. 이것은 중국 인민혁명 과정에서 주덕과 주은래가 후임 모택동을 끝까지 보위한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이 첫 부인 김정숙(김정일 생모)과 결혼한 것은 러시아 령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만주 반일항쟁파의 강점과 미덕은 첫째 무장투쟁의 방식이었다는 점, 이것은 독립운동의 본격성을 의미한다. 둘째 유격투쟁 방식이었다는 점, 이것은 적절한 전략전술을 선택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셋째 투쟁 과정의 높은 도덕성이다. 그들은 전혀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며, 극한상황이나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약탈, 테러, 단식, 이밖에 비인간적인 기만행위 등을 삼갔다. 이것은 상해와 국내에서 활동한 일부 좌파 운동권, 즉 박헌영 등의 방식과 대조되는 점이다. 1958년 북의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인민일보>는 이런 글을 내놓았다. “중국 인민은 북벌의 전화(戰火) 속에서, 장정(長征)의 길에서, 항일의 간고한 세월 속에서, 장개석의 통치를 뒤엎는 승리의 진군에서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중국인민과 공동투쟁을 했으며, 자기 생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중국혁명과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원조한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1958.11.22자 『인민일보』)
여기서 말하는 조선인이란 신해혁명의 혁혁한 조력자 신규식을 필두로 광동봉기에 참여한 오성륜·박영·김산 등 그리고 8,000km 대장정에 참여한 1,200명의 조선인과 항일무장전투에 참여한 연인원 2만 명의 조선 젊은이, 마지막으로 국공내전에 가담한 7만 조선인을 포괄한다. 조선인들은 중국 혁명을 위한 전투의 고비마다 결정적인 무공을 세웠다. 일신교도들은 ‘신의 역사’를 말한다. 반면 한국의 사학자 김준엽은 ‘역사의 신’을 말했다. 내 개인적 소회로 ‘신의 역사’는 터무니없지만 ‘역사의 신’은 그럴듯해 보인다. 지금 박근혜 정권은 숱한 역사의 왜곡으로 역사의 신을 모독하고 있다. ‘신의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의 용어를 빌리면 이것은 ‘독신죄’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과거를 장악하여 미래를 지배하려는 흑심을 품고 있다.
슬프도다!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황은을 우러르고 이것은 을사늑약 직후인 1905년 11월 30일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하면서 남긴 유서다. 이에 대하여 훗날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초석을 닦은 예관 신규식은, “민충정의 피여, 5조목의 통감협약이 협박으로 이루어지자, 서울로 달려 올라와 대궐 문을 두들겼으나 허사가 되자, 하는 수 없이 칼로 찔러 목에서 가슴까지 이르니 피가 바닥을 적시며 죽어 갔도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러일전쟁은 1904년 춘궁기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여순 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다. 대한제국은 허울뿐인 영세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한국의 조정을 협박하여 이른바 한일의정서라는 것을 체결하였다. 그것으로 일본은 한국에서 군사기지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일본은 그 해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강행했다. 이로써 한국은 사사건건 일본이 임명한 고문들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을사년 7, 8, 9월은 대한제국의 멸망이 브레이크도 없이 가속된 계절이었다. 을사년 7월에 제국주의 미국은 러일전쟁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일본과 야합한다. 미국은 일본의 조선 독식을 부추겼다.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정치적 우월권을 인정한다.’ 이것은 미국인 태프트와 일본인 카스라 사이에 맺어진 음습한 밀약의 핵심 내용이었다. 을사년 8월, 영국은 이른바 영일동맹이란 것으로 일본과 교합했다. 9월에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포츠머스 조약이 맺어져서, 일본은 한국에서 우려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이권을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았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는 바로 이 포츠머스 조약을 성사시켰다는 명목으로 노벨평화상이 주어졌다. 구미 열강의 보증과 러시아의 기권을 얻어낸 일본이 급기야 한국 침탈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을사늑약의 체결이었다. 그 해 11월 18일에 체결된 이 조약으로써 이제 한국 정부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는 어떠한 조약도 타국과 맺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의 황제 밑에 통감을 두어 모든 내정을 감독하게 하였다. 외교권의 박탈은 사실상의 주권 상실을 의미했다. 그리고 통감부의 설치는 통치권의 찬탈과 같은 것이었다. 을사늑약의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인들은 슬퍼하거나 분격하였다. 그리고 조약을 체결한 다섯 명의 매국 대신을 규탄했다. 그들은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었다. 포도대장 출신 참정대신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했다가 파면 당한다. 육군부장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의정대신 조병세, 특진관 이근영과 함께 대궐로 들어가 5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청원하였다. 마침 방방곡곡에서 유림들의 상소가 쇄도하고 있던 터였다. 민영환은 상소인 대표 ‘소수’를 자임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렸다. 그는 황제의 재가와 참정대신의 인준이 없는 조약은 원천 무효이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조약에 서명한 적신들은 처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공사 하야시는 내부대신 이지용을 시켜 민영환을 기소했다. 민영환은 이튿날 새벽 고등재판소 평리원에 소환, 구금되었다. 고종의 특명으로 석방된 민영환은 다시 두 번에 걸친 절박한 상소를 올렸지만 고종은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급기야 그는 엄동으로 치닫는 11월 그믐날, ‘이천 만 동포에게 고하는 유서’를 쓴 다음 자신의 명치에 비수를 들이댔다. 그러나 칼이 작아서 한 번에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피가 손에 묻어 칼이 잘 쥐어지지 않았다. 그는 피 적신 손을 벽에 문질러 닦았다. 그러자 끌린 핏자국이 바람벽 여기저기에 남게 되었다.<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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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협님의 댓글
김광협 작성일김광협은 어디 갔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