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근·현대사]⑥선열들의 함자를 부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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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근·현대사]⑥선열들의 함자를 부르게 하라 |
김갑수 | 2014-9-18 12:25 |
선열들의 함자를 부르게 하라
“이홍광은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자 혁명군 수령이었으며 공산당원이었다. 견결히 항일하고 간고 분투한 그의 업적은 누구나 다 잘 아는 바이다”(1938년, 마오쩌둥) “동북항일연군의 참모장이며 제1군 제1사장이었던 이홍광 동지는 항일연합군 중에서 제일 높은 수령의 한 사람이었다.”(1946년 중국 <해방일보> ‘남만을 진동시킨 이홍광 동지’) 이홍광 열사는 1935년 5월 화자구 흑할자 인근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했다. 비슷한 이름 이동광을 아는가? 1904년 함북 경원군에서 태어난 그는 1936년 동남만성위 조직부장을 역임했다. 그는 군중사업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남만에서 농민들에게 가장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조국광복회 남만 대표로 맹렬히 활동하던 그는 1937년 황토강자 돌파전에서 전사했다. 그는 이름이 비슷한 이홍광과 함께 남만항일투쟁사에 혁혁히 기록될 선열이다. 허형식을 아는가? 1909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그는 하르빈 노동절 시위로 투옥되었다가 만주사변 이후 출옥했다. 1930년 초반부터 반일유격대에 가담한 그는 항일 제3로군 총참모장 등을 역임하면서 유수하자 전투, 라라돈 전투, 오도강 전투 등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자기희생 정신을 보여 주었다. 일본군의 대토벌로 소부대 유격전으로 전환한 뒤에도 그는 현장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다가 1942년 8월 장렬히 전사했다. 당시 선열의 나이는 33세였다. 양림을 아는가. 양림이 낯설면 그의 본명 김훈을 기억하는가? 3.1항쟁 이후 중국으로 들어간 그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대학에 유학한 후 1930년 유격투쟁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후 중공당에 발탁되어 강서소비에트 지역으로 전근한 그는 홍군대학 교관 직을 수행하면서 대장정에 참여, 많은 무공을 세웠다. 애석하게도 그는 대장정을 마친 직후 마오쩌둥이 진솔한 동정전투에서 38세의 나이로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동무들아 준비하자 손에 든 무기 리추악을 아는가? 그녀의 본명은 김금주, 1901년 평안남도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7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한편으로 공부, 다른 한편으로 노동하며 자랐다. 그녀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그녀는 국내 독립운동의 와중에도 엄청난 독서를 했다. 3.1항쟁 이후 지명수배되어 중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양림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항일연설을 감행, 중조인민이 연합하여 항일무장대를 조직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격하자고 호소했다. 1932년 가을 리추악은 중공 주하중심현위에 파견되었다. 그녀는 현위 위원, 부녀부장, 철북구위 서기 등 직무를 맡았다. 그녀는 이미 반일유격구의 저명한 항일 여성영웅이 되어 있었다.1936년 8월 27일 그녀는 적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시종 굴복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1936년 9월 3일 통하현성 서문 밖에서 그녀를 총살하였다. 그때 열사의 나이 35세였다. 동만 제2군 유격대 여대장 김확실을 아는가? 제6사 불사조 재봉대장 최희숙을 아는가? 그렇다면 제4사 기관총 여반장 허성숙을 아는가? 그녀가 간삼봉 전투에서 떨친 위용을 기억하는가? “참혹한 형벌은 혁명전사의 근육과 뼈를 깎을 수는 있었지만 여성 영웅의 확고한 의지를 굴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적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자 허성숙 동지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 허성숙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전우들과 함께 민족의 해방을 전취하지 못한 것이 애석할 뿐이었다.”(만주항일열사사전) 허성숙은 외쳤다. “나는 조선민족의 딸입니다.” 순간 총성이 울렸고 열사의 나이 24세였다. 이름만 나열하기에도 지면이 부족한 항일열사들, 여기에다 무명의 열사들까지 합쳐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수없이 그리고 영롱히 빛나야 할 선열들의 이름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고작 이화학당 출신 유관순 열사의 이름을 놓고 티격태격이나 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에게 선열들의 함자를 온전히 부르게 해달라.
우리의 독립운동은 크게 셋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상해에서 중경에 이르는 임시정부 중심 세력, 광동 봉기에서 대장정 그리고 연안에 이르렀던 중국 인민혁명 참여 세력, 마지막으로 간도 즉 만주 반일 무장투쟁 세력이다. 편의상 상해파, 연안파, 만주파라고 호칭한다면, 먼저 상해파는 광복군, 연안파는 조선의용군, 만주파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요즘 북에서 말하는 ‘백두산 혈통’은 만주파에 속한다. 다만 이렇게 단순히 3분법으로만 하다 보면, 일찍이 서울 도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왕산 허위, 연해주에 가서 투쟁했던 안중근,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청산리의 주역들인 홍범도·김좌진·이범석 등과 이른바 북경파로서 무정부주의와 관련되는 이회영 등을 놓칠 수가 있다. 누구보다도 양세봉 장군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1920년대 말과 30년대 초 조선혁명군 지도자로서 ‘군신’의 호칭을 얻은 무장투쟁가였다. 양세봉 장군은 이념을 배격했다. 이 점에서 그는 가장 순수한 무장투쟁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유일하게 남북 국립묘지(북은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상해파의 최대 공로자는 예관 신규식과 백범 김구라고 할 수 있다. 신규식은 상해임시정부를 만든 분이고, 김구는 상해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킨 분이다. 우리가 알 듯이 제국주의 군부에 인상 깊은 테러 공격을 감행한 윤봉길의 상해홍구공원 거사는 백범 김구의 작품이었다. 상해파의 약점은 무장투쟁보다 외교노선에 치중했던 점이다. 무장투쟁 역량이 없다 보니 간헐적으로 테러공격을 수단화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는 윤봉길 거사를 ‘중국군 몇 개 사단의 공로’ 이상으로 치하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는 지원을 요청하는 김구에게 ‘일본군 장군을 하나 죽이면 또 하나의 일본군 장군이 뒤를 이을 뿐’이라며 테러공격의 비효율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들은 8·15 이후 국내로 돌아와, 정확히 말하면 남한으로 와서 또 다른 시련에 봉착했다. 그들은 한독당, 즉 한국독립당을 만들었다가 온갖 박해를 견디다 못해 궤멸되는 불운을 겪었다. 여기에는 미군정과 친미 이승만 세력, 친일지주세력 한민당이 야합했다. 이승만이 만든 자유당은 오늘날 새누리당의 전신, 또 다른 친일세력 한민당은 오늘날 새정치연합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비극이라면,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이었던 한독당이 망해버린 데에 있다. 반대로 말해서 친일세력이 득세하고 있다는 데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극이자 모순이다. 한독당의 전신적 지주였던 김구는 안두희의 흉탄에 숨졌다. 그런데 안두희의 배후는 누구였을까? 김구 암살은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과 한민당의 합작이었다. 독립운동 세력의 제2열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안파와 제3열인 만주파는 8·15 이후 북으로 귀환했다. 연안파에는 오성륜과 박영과 김산 등이 있었다. “조선혁명이 완성되기 전까지 내게 평화는 단지 고통일 뿐이다.” 이것은 박영이 광저우에서 만난 김산에게 한 말이다.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으로서 그는 흥미로운 책 『아리랑』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밖에 중국인민혁명군가를 작곡한 음악가 정율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욱 본격적인 연안파로서 조선의용군과 관련되는 양림과 무정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중국혁명군 내에서도 크게 인정받은 혁혁한 혁명열사들이었다. 특히 무정은 중국 인민혁명군 전체의 ‘포병대장’ 소리를 들었다. 여기에 약산 김원봉을 추가할 수가 있다. 이들은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작업에 참여했다가 몇 년 후 김일성에 의해 정리 또는 숙청되는 운명에 처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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